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1 개요


푸틴을 닮았다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José Eduardo dos Santos, 1942년 8월 28일 ~) (76세)

호세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며, 제2대 대통령으로, 동시에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MPLA)의 의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집권한 독재자이자 자신의 권력과 사치만을 위해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 독재자.

2 생애

산투스는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5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의 식민정책과 앙골라인에 대한 암목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1956년에 앙골라 인민해방전선에 그러나 포르투갈의 탄압으로 1961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생활을 보내다가 소련으로 유학가서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1970년데 귀국하여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앙골라가 독립한 이후에 좌우간 내전으로 앙골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MPLA가 총재가 되었고 1979년에 아고스티뉴 네투가 사망한 뒤에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내전으로 인해 국가의 안정화같은건 전쟁에 급급한지라 이때는 별다른 업적같은걸 쌓을시간도 없었다.결국 냉전이 끝나자 1992년에 선거가 치러졌는데 조나스 사빔비가 위낙 악명이 높아서 1차 투표에서 49.5%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사빔비가 선거에 불복하고 다시 내전이 일어나면서 앙골라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에 UNITA가 항복하면서 앙골라 전역을 통일하였고 이후에 앙골라를 빠르게 안정화 시켜나갔다. 산토스는 2009년 말에 예정되어 있는 대선에 불출마 입장을 밝혔지믄 결국 집권 연장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는데 결국 대통령에 출마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안정화 이후에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나름 강대국축에 드는 나라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부정부패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고 교육이나 보육, 보건 예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도 않으면서도 산토스 자신과 그 가족들, 측근들은 매년 수억달러가 넘는돈을 횡령해가며 재산을 불려나갔고,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못한채 빈곤층으로 살고있다. 현재 대통령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30%에 이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래서 젊었을때 지녔던 이념따윈 내평겨치고 치부에 눈이 먼 타락한 인물이라는 평이 거의 지배적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장기 집권한 독재자이며, 국제사회는 그를 "은둔형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크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대한 자원을 통해 생기는 자금을 활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유와 다이아몬드 수출로 챙기는 자금으로 정치세력을 관리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다. 그는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꿨기 때문에 이 인간의 집권이 언제까지 연장될지는 알 수 없다.[1] 2012년 대선에서도 더시 당선되었다. 물론 야당과 국제사회는 불법선거로 이루어진 당선이라고 비판을 했다.

현재 앙골라는 여성의 66%만이 글자를 깨우치는 등 교육 문제도 심각할 뿐만 아니라 기대 수명은 1970년대 37세를 기록한 것에 비하면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51.5세에 머무르고 있어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크게 낮은 수치다. 또한 앙골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으나 정부는 시위대를 총으로 제압했고 이 가운데 사상자가 속출했었다고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주장한 적도 있으며, 산토스는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수많은 정적들과 언론인 등을 살해한 것에 대해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3 기타

이사벨 두스 산토스는 아프리카 최고의 여성 부호로 꼽힌다 이사벨 두스 산토스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앙골라 대통령의 장녀로 24세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사벨은 각종 관급 사업을 계약했고, 투자업체인 켄토홀딩을 설립해 포르투갈의 각종 기업들 지분을 사들였다. 2013년에는 포르투갈의 미디어 복합기업 존 멀티미디어 지분 10%를 1억6400만유로(한화 2600억원)에 인수했고, 포르투갈 은행인 방쿠 에스피리투 산투, 전력회사인 에네르지아스 데 포르투갈 등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모든 성공이 그의 아버지 때문이라는 점이 문제다.

앙골라에서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사람들은 폭력조직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폭력조직을 잡아야하는 경찰들이라고 한결 같이 증언한다. 만약 시내에 다닐 때 앙골라 여권의 미소지가 불법이라면 경찰이 총까지 들고 그 사람을 위협한다고 하며 결국에는 100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심지어 맞는 운전증을 가져와 운전사 운전 면허증을 경창이 보더니 보더니 이 운전증은 위조라 난리를 치면서, 결국 100달러를 다시 갈취해갔다는 증언까지 있다. 심지어 귀국 하는 날에도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경찰이 택시 운전자에게 시비를 걸어와서 결국 50달러를 경찰에 주게 된다고 하기 때문에. 앙골라를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돈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곳이 앙골라라고 증언한다. 이에 많은 운전자들은 경찰을 피해 이리 저리 도망다니며. 만약 붙잡히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돈을 뜯어 간다고 한다. 앙골라에 일주일 이상 거주하면 4회 이상은 이런 돈을 뜯겨간다고 해서, 앙골라에서 공무원들은 아주 직업이 좋다고 한다. 장소가 어디든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뒷돈을 챙길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자료

유명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가 앙골라 호세 대통령을 위해 거액인 100만 달러( 약 10억6050만원)를 받고 2시간 공연을 벌여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토르 이사장은 "머라이어 캐리는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현금이 아직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며 "불과 5년전 카다피 가족 앞에서 공연했는데, 또 아프리카 최고 인권파괴자이자 타락 정권(로버트 무가베도 만만치 않다.)의 전시 공연을 했다"고 비난했다. 자료
  1. 여담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을 때 앙골라의 야당인 UNITA 소속 라울 단다 의원은 "오늘은 앙골라의 민주주의에 매우 슬픈 날, 이는 민주주의를 파묻기 위해 무덤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난했던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