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1]-1791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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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솔즈베리(Frank O. Sailsbury)가 그린 말년의 존 웨슬리 초상화. 존 웨슬리의 초상화 중 대표적인 그림이다.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바라본다[2]

-1739년 6월 23일 동생 찰스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 中-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가장 좋은 것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존 웨슬리의 유언-

1 소개

감리교(Methodist Church)의 실질적 창시자이자 웨슬리안 교파[3]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를 졸업한 후에, 1725년 존 웨슬리는 부제(Deacon, 집사 목사)가 되었으며 172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컬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1728년에는 사제(Elder priest, 장로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교구 목회를 돕다가 옥스퍼드 연구 교수로 되돌아간 1729년부터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신학 공부와 경건 운동을 시작하였다. 미국에서의 선교가 실패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Morivans)[4]들을 만나 이들의 신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영국에 도착한 뒤로도 모라비안 성직자들과 교류하였다. 1735년 5월 24일에는 회심의 경험을 하고, 영국 전역을 다니며 경건 운동 및 사회 운동을 펼쳤다. 신성회 때부터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확고한 규칙(Method)을 세우고 따르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5]라는 별명(실제론 멸칭)을 얻었고, 이는 감리교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감리교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에서 감옥 개선과 노예제 폐지 등과 같은 사회 운동까지 포괄하는 큰 흐름이었다.

존 웨슬리의 신학 사상은 칼빈주의와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존 웨슬리는 특히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존 웨슬리가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한 것도 칼빈주의와 크게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6] 존 웨슬리는 성찬을 지속적으로 베풀고 행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영역에까지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또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존 웨슬리는 평생 영국 국교회 사제로 남았고, 감리교 운동은 단지 영국 국교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타락하고 경직된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는 경건 운동으로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 주교들과의 마찰과 대다수 국교회 성직자들의 비협조로 결국 독립 교단으로 분리되어 감리교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존 웨슬리는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며,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각종 사회 문제가 산적했던 영국을 변화시킨 위인으로 또한 평가받고 있다.

2 웨슬리의 신학사상

다음의 내용은 아래의 문헌을 통하여 쓴 것임을 밝힌다.

  • 장정개정(편찬)위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2012)』(2012, 기독교대한감리회)
  • 이선희, 『복음주의적 감리교 신학의 모색』(2002, 도서출판 복음).
  • 알버트 아우틀러, 『웨슬리 설교해설』(2005, 대한기독교서회).
  • 알버트 C. 아우틀러, 『웨슬리 영성 안의 복음주의와 신학』(2008, 한국신학연구소).
  • 존 웨슬리,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존 웨슬리 표준설교집 1』(2005, 도서출판 KMC).
  • 존 웨슬리, 『새로운 탄생: 존 웨슬리 표준설교집 2』(2005, 도서출판 KMC).

존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가 기초를 쌓아둔 개념들을 차곡차곡 봐야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신학사상은 칼빈주의자들의 말대로 단순히 세미-펠라기우스나 다름이 없다. 그의 신학사상의 기초-특별히 구원론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써보기로 한다.

그의 구원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행하시는 은혜(perventing grace)
2. 회개시키는 은혜(convingcing grace)
3.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
4. 성화시키는 은혜(sancifying grace)
5. 영화(glorification)

2.1 하나님의 형상과 원죄

구원의 순서를 설명하기 전에 웨슬리의 기초적인 밑바탕이 필요하다. 그렇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완전한 것처럼 완전했다. 이런 인간의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은 ‘본질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 구성되었다.-이것은 그의 설교 새로운 탄생 ‘본질적 형상’은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의지와 감성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은 영적존재. ‘정치적 형상’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인간을 형상화 할 수 있고, ‘도덕적 형상’으로서는 인간은 ‘성聖과 義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일치하며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깨끗하게 행할 수 있는 존재로서 죄도 없었고 악도 알지 못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인간은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완전한 율법을 주셨고 완전한 복종을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구별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자유, 다시 말해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냥 진흙으로 만든 인형으로만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이 의롭다든지 거룩하든지 또는 범죄하여 불의하든지 거룩하지 않다든지 하는 말씀이 무의미 했을 것이다.

문제는 최초의 인간이 이 선택의 자유를 오용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위하여 선택하였고 그 순간 하나님의 형상 중 하나인 ‘도덕적 형상’을 완전하게 상실하여 ‘성聖과 義의’가 완전히 없어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본질적 형상’도 왜곡하여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의 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기의 뜻을 추하는 교만의 상태가 되었고 그것은 ‘정치적 형상’도 왜곡되어 인간은 성스럽지 못함과 우둔한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대변자로서의 행동에 나쁜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상황 이후 모든 인간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중생이 있기 전에는 죄악의 세력으로 아래에 놓인 노예가 되었기에 자유의지를 나쁜 쪽으로만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인간의 상황을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 부른다.

웨슬리의 원죄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원죄하에 있어서 아담과 동일한 죄책과 처벌을 받는 상황이며, 인간의 영혼과 정신, 모든 내적 및 외적의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되었고 그렇기에 모든 기질과 행동과 행동이 악하며 그의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선과 악이 섞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악한 상태에서 가끔 중단외어 선한 상태로 바뀌다가 다시 악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악하고, 이런 인간은 이성으로 신존재 증명은 할 수 있어도 이성이나 그 이외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도 없고 사귈 수도 없고,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두려워 할 수도 없으며 이런 무신론적 상태는 결국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하며 결국 원죄하의 인간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우상숭배자로서 이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뜻이다. 그렇기 인간은 자기의지라는 사탄의 형상을 각인시켰고 그리하여 세상사랑으로 연결한다. 웨슬리는 이런 인간의 원죄하의 상태에서 치유받을 방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나를 사랑했고, 나를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하는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증거와 확신,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치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다. 웨슬리는 이 칭의를 어떠한 제한도 없이 모든 죄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때서야 원죄로부터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 종교강령 7조인 원죄 항목에서도 이런 인간의 상태를 아담을 따라 죄를 범한 것이 아니요, 아담의 자손으로는 각 사람의 천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을 가르침인데 대게 인류가 근본적으로 義의에서 멀리 떠나 그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으로 나온다.

즉 근본적인 세 가지 형상으로서의 기능이 부패됨이 따라서 모든 근본적 義의에서 떠나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이 원죄하의 죄악된 인간의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인간은 악한 상태가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 없고 본질 자체가 악한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잠시라고 변화되거나 개선되는 일이란 없다고 웨슬리는 생각했고 이를 회복시키려면 오로지 칭의와 중생만이 인간의 원죄 하에 있는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웨슬리는 칭의를 통해서 인간은 원죄로부터 건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때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때때로 그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일로서 원죄 하에 있는 긴간이 선한 것을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선행하시는 은혜(perventing of pervenient grace)라는 인간의 부패한 본질과 구분되고 분리된 하나님의 자신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래서 웨슬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적 양심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는 것, 즉 인간 자체에 있는 기능의 활동을 할 수가 없는 하나님 자신이 활동하고 계시는 현상이기에 양심이라는 말은 선행하시는 은혜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2 웨슬리의 신학사상과 펠라기우스 사상과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신학사상에서 볼 수 있는 펠라기우스와의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펠라기우스와 웨슬리의 신학사상의 차이점은 바로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이미 본성이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지 않은 본성과 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서 죄를 범한다고 봤다.

자유의지로서 선을 택하면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택하면 악을 택할 수 있기에 자연인 존재 전체가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전적무능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 아니라 주장이 그 사상이지만, 웨슬리는 종교강령 제 7조에 의거하여 그 원죄에 대하여서는 단연코 부인했다.

그래서 종교강령 제 8조에서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류의 정형이 그와 같이 되어 자기의 천연적 능력과 사업으로써 마음으로 돌이키며 준비하여 신앙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모(傾慕)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의지를 얻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선한 사업을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의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고 나왔다.

즉,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비기독교인들도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믿음에 이르며 선행을 행하여 하나님께 그 대가로 구원의 은혜를 당연히 요구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함에 대하여 부정한 것이다. 또한 반펠라기우스(半semi-Pelagianism)의 왜곡된 자유의지관도 거부한다. 반펠라기우스(半semi-Pelagianism)은 인간은 은혜의 도움 없이는 구원도 얻지 못하며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의 선을 지니고 있는바 은혜에 의하여 일깨워 가지고 이 은혜를 거부하던지 아니면 노력하여 받는지 할 수 있다.

그래서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먼저 의지를 결단하도록 기다리면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앞서도록 하시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형상과 자유의지가 완전히 상실 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악화 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의 구원에 있어서 자기의 타고난 능력만으로는 구원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어느 정도 회복된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이 역사하심에 앞서서 스스로 돌이키며 자신의 선행을 함으로서 하나님과 협동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엔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행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대가로 받는 것이므로 반펠라기우스(半semi-Pelagianism)가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 펠라기우스와 다를 것은 없다.

2.3 선행하시는 은혜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을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of prevenient grace)로서 인간이 먼저 스스로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원죄 하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닌 듯이 착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오셔서 역사하심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자신 스스로가 죄인임을 희미하게나마 질문하고 느끼게 된다.

이때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뜻하지 않게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라도 느낌이 있고 현재까지 자신의 삶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최초로 이런 것이 생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인 것이다. 즉 전혀 자신의 상태를 모르다가 하나님에 의하여 건짐을 받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단계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아오다가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어떤 환경의 영향도 아니고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도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시기 때문에 있게 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를 받기에 교회라던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 것에 응하지 않고 소위 ‘양심’의 빛.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역했을 때에서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양심의 현상에 응답하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양심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며 복음에 대해서 완악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이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그 뜻에 일치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인간이 가지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선 인간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시된 뜻, 특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율법을 알도록 하신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임을 알게 하시고 이것을 지킬 때 복을 이루시되 이 율법을 어기면 정죄와 처벌이 임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며,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장 선한 마음과 최선의 능력으로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없고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결국 율법은 자신이 죄를 알 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로마서 3장 20절)을 알게 할 뿐이다. 그리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게 되며, 죄인을 불사르시는 하나님의 영벌의 처벌을 알게 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간절하게 되나 자신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나를 죄에서 건져낼 유일 한 분, 하나님에게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웨슬리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 즉 회개시키시는 은혜라고 부른다.

2.4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칭의와 중생이 있기 전에 회개로 인도된 인간은 이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믿음을 받기를 사모하게 되며 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와 중생을 받도록 역사하는 은혜를 받게 된다 이것이 칭의시키는 은혜라 부른다.

이런 칭의의 은혜와 믿음은 이 세상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섭리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은혜라다. 그래서 만물 중 하나인 인간 자신도 이 은혜의 결과다. 이후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내가 하나님에게 화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확신으로 그 결과 우리의 지혜요, 의요, 성화요, 구속이긴 한마디로 구원이신 하나님에게 연합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오는 구원은, 첫째 현재적 구원 두 번째로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즉 자범죄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며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의 해방으로 이제는 하나님과의 화해된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죄책의 용서와 형벌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 이것을 칭의라고 부른다.

2.5 거듭남(중생重生, New Birth)

거듭난 사람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의 특징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생겨서 생동적으로 운동하는 상태로서 믿음을 가지면 죄를 용서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고(로마서 5:2, 히브리서 3:6)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마지막에 일어날 심판을 기다리는 담대함을 갖게 되며(소망), 이 소망이 있으면 마지막 심판 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신 대로(요한계시록 22:14)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게 된다.
이때 말씀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는 믿음을 더 크게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재림 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뵐 때 주님이 칭찬해 주시리라는 소망을 더 크게 하고, 이 소망은 사랑을 더욱 북돋우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은 중생한 사람 속에서 생명력 있는 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2.6 성화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분간 아무 시험도 느끼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는 한동안 죄의 세력들이 건들지 않도록 보호하지만 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았고 그의 종들도 시험받은 것을 본다면 그의 종들도 시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 안에 굳건히 거하며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한, 외적인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생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다시 중생하기 전의 상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그릇된 성질이나 소행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것들과 싸워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 정복해야 한다.

중생한 자들 안에서 이런 갈등은 왜 생길까? 첫 번째는 죄의 세력은 마지막 심판날 재림할 주 예수의 발 아래 멸망하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하는 활동을 계속하겠고 중생한자들의 믿음이 약해주면 그때 이 죄의 세력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중생한 자들에게 죄의 세력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할 때. 그 때는 믿음으로만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죄의 세력의 정체를 드러낸다.

중생한 자 안에 작용하는 죄의 세력의 활동 방식은 믿음이 약해지는 것, 교만, 자기고집, 세상사랑, 안목의 정욕, 분노, 원망, 불평과 같은 내적죄로서 이런 죄를 정복하는 방법은 첫째 중생한 자의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둘째 하나님께 속한 자라도 내적죄로 인한 책임을 느끼며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것임이 마땅함에도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마지막은 중생한 자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도 없으며, 원할 수도 없으며,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내적인 죄에서 스스로 탈출 할 수 없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중생한 자가 회개할지라도 이런 회개가 곧 죄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이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고 말슴하실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두 번째 변화가 필요한대 칭의와 중생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다. 이런 변화는 중생한 자가 회개하며 동시에 나를 온전케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 약속이 지금 여기서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세력을 매일같이 약화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이 있으면서도 또한 주님이 손수 말씀으로 깨끗하여져라 하실 때 일어나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들로 이뤄진다.

2.7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

중생한 사람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는 것이 감리교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치한다. 이 완전의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완전한 사랑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사랑으로서 이런 완전은 칭의 뒤에 가능하며 우리가 죽기 이전에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이뤄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 완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도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완전한 신자라도 하나님과 동일한 궤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완전은 계속 향상되며 더 빨리 자랄 수도 있는 정지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은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선행이 있고 그 과정 중에는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들이 있고 그것을 토하여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

2.8 영화(榮化, Glorification)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은 자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때에는 이 세상에 황폐하게 될 것이고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육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 될 것이다.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약속된 영생을 받는다.

2.9 이전 버전에 대한 설명

이전 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는 양자의 영의 수용에 대하여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신의 영의 증거를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 안에서 사역하는 성령의 열매에 의한 것이다. 이 증거는 외부로 나타나는 죄를 범하거나, 감당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거나 내적인 죄를 범할 때 틀림없이 파괴된다. 성령이 탄식하는 일에 의해서 그것은 파괴된다. 신자들은 성령의 사역의 증거로서 실생활에 있어서 어떤 결실을 맺도록 강조한다. "성령의 결실은 성령의 증거다."》라고 했지만 사실 이것은 칭의론과 중생론 원죄론이 뒤죽박죽인 구절이다.

특히 ‘양자의 영의 수용’은 중생론에서 나온 구절로서 풀이할 수 있고, ‘우리의 영혼 안에 사역하는 성령의 열매’는 성화론에서 나온 구절로 풀이할 수 있고, ‘이 증거는 외부로 나타나는 죄를 범하거나, 감당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거나 내적인 죄를 범할 때 틀림없이 파괴된다. 성령이 탄식하는 일에 의해서 그것은 파괴된다.’는 인간론-원죄론으로 풀이 할 수 있지만 이것마저도 제대로 된 웨슬리 신학을 잘못 이해함으로 쓴 글이다. ‘또한 신자들은 성령의 사역의 증거로서 실생활에 있어서 어떤 결실을 맺도록 강조한다. "성령의 결실은 성령의 증거다.’ 속에 있는 중생론에 대해서 정확하게 중생에 대한 웨슬리의 설교에서 따왔던 극히 일부만 언급해 놓은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면 바로 전 버전에 나온 저 문단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이 전의 버전에서는 《이 증거는 외부로 나타나는 죄를 범하거나, 감당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거나 내적인 죄를 범할 때 틀림없이 파괴된다. 성령이 탄식하는 일에 의해서 그것은 파괴된다.》라고 하면서「파괴」라는 단어를 썼지만 웨슬리의 원죄론에 있어서 인간은 영혼, 정신, 모든 내적 외적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했고 거기서 모든 기질과 생각과 행동이 악하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이 선택의 오용으로 부패한 것이지 이것이 파괴된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중생을 강조한다. 그는 에베소서 2장 10절과 4장 24절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신이 창조한 새 본성을 입게 된다고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랑이 신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변하고 교만이 겸손으로, 격정이 온순으로, 증오와 적의가 성실과 온유로 변하게 된다. 세상을 사랑하고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한다. 이렇게 말한 다음 웨슬리는 요한복음 3장 8절을 인용한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이것은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미시적으로 잡은 것일 뿐이다. 웨슬리의 신학사상 중에서 하나만 강조하기에는 그 순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질 수 없다. 당장 웨슬리의 신학적 검토를 해 보면 구원의 순서가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본다면 하나만 강조하기에는 서투른 해석적 방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 그의 어록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 감각을 통해 세상을 포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자연인은 자연을 보고 관찰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제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초자연적인 확실한 증거, 곧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자기 신앙으로 똘똘 뭉친 것은 거짓 체험이다. 진짜 체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는 체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는 것이며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되뇌이는 것은 거짓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을 체험하면 그는 즉시 변화되고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성령이 함께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즐거움을 안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처음부터 먹지 못하게 해서 식탁에서의 기대감을 아예 꺾어놓는 방법이 특히 바람직하다."[7]

4 관련항목

  1. 율리우스력으론 6월 17일
  2. 짧게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명언이다. 의미는 전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뜻이다.그러나 당시 성공회 교구 사제들이 관할권을 문제 삼는 것에 대꾸하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3. 사실 웨슬리안 교파라는 용어는 없다. 존 웨슬리가 직접 세우게 된 교단은 감리교이지만 감리교로부터 성결 운동이 발생했고 오순절 운동, 구세군 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웨슬리의 신학과 사상이 영향을 미친 개신교 교파는 감리교, 성결교(성결교는 미국에서 나사렛 성결교가 처음 생겼고, 일본 동양선교회가 한국으로 선교하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성결교는 웨슬리의 사상을 따르고 있지만 나사렛 성결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순복음(한국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단), 구세군 등 그 수가 많다
  4. 루터파의 경건주의 그룹
  5. 사실 Methodist는 웨슬리주의자에 대한 전용 멸칭이 아니라 당시 국교회와 청교도 교회의 침체를 비판하며 등장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개혁가들을 싸잡아 비꼬는 말이었다. 청교도 중 개혁을 주장한 그룹이 중심이었고 성공회 내부의 칼빈주의자들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웨슬리 파도 그들중 일부와 묶인 것. 초기에는 칼빈주의자들과 함께했으나 웨슬리가 독자적인 신학관을 표방하면서 갈라선 것이다. 웨슬리파의 후신인 감리교는 잉글랜드 북동부 일부지역, 이외의 나머지는 칼빈주의 Methodist들이 활동했다. 이 내용은 『옥스퍼드 영국사』에서 대략적인 확인이 가능하다. 칼빈주의 Methodist들의 활동은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을 통해 간략히 살펴볼 수 있다.
  6. 성화는 종교개혁 시기 칼뱅에 의하여 강조된 것이다. 『기독교 강요』에서는 초판부터 성화에 대한 내용이 고작 한두 줄로 언급된 이중예정에 비하여 더 많은 분량으로 서술되어있다. 성화의 개념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가까운 것인데 당시 가톨릭은 성례에 참여하여 성화된다고 가르쳤다. 칼뱅은 성화를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즉, 성례의 의미에 흡수되어 가던 개념을 종교개혁 시기 칼뱅이 순종 훈련의 과정으로 강조한 것이다. 한국 정교회에서는 "신화"라는 개념으로 가르친다(『정교회 교리서』에서 볼 수 있으며, 개신교의 순종 훈련과 가톨릭의 성례 참여의 중간 느낌이다. 읽어보면 재미있다. 시간의 개념이 신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며, 모든 시간(과거에서 미래까지)이 신 앞에서는 현재와 같이 펼쳐져 있고 교회의 신도들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서술도 있다.). 다만 "완전"의 개념은 웨슬리의 독자적인 것이다. 어디까지 성화되어야 완전한지는 웨슬리조차도 기준을 제시하니 못했지만. 이외에도 칼뱅이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을 할 것을 주장한 내용도 초판부터 수록되어 있었다..
  7. 영국 요리 항목이 루머 일색이던 시절에는 저 발언과 당시 영국의 금욕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트집잡아 영국의 요리문화 자체를 비하하는 데 사용했지만, 웨슬리 본인은 단지 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한 말일 뿐이다. 3세기가 지난 요즘도 반찬투정하는 개초딩과 부화뇌동하는 맘충들을 보면 여전히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