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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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주요 교파(교단)
감리회구세군그리스도의 교회루터교회성결교회
성공회오순절교회장로회재림교회침례회

監理敎會, Methodist Church

1 개요

감리회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다.

성공회신부존 웨슬리[1][2]의 18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 운동에 기원하며 성공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창설된 교파이다.[3] 현재 전 세계적으로 7천500만명 이상의 신도가 있다.

원래는 존 웨슬리가 성공회에서 탈퇴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웨슬리가 교구들을 넘나드며 사목하는 것을 영국 성공회 측에서 크게 문제 삼았고[4](성공회에서 웨슬리의 사제로서의 권한을 제한함), 그것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를 따르는 세력이 성공회에서 분리된 것이다.

2 특징

2.1 조직 특성

장로회의 개교회 중시적인 정책과 달리, 감리회는 보편교회[5]와 비슷한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다. 각 지방의 감리사가 이끄는 지방회, 그리고 지방회의 집합체인 연회가 있다. 연회를 이끄는 목회자를 감독#s-2.1[6]이라고 하는데, 감독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7]되며 연회의 성직자 안수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감리교회에서는 감리교 본부에서 목회자를 파송한다.

감리교라는 말 자체가, 진리를 감독한다는 말으로서, 감리사를 두어 개별 교회의 신학적인 검증을 거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탓에, 개교회 중심의 장로회에 비해 조직 구조가 안정적이며, 신학적 입장이 강건한 것이 특징이다.(그러나 분열도 잘하고 통합도 잘한다는 말이 헛나온 것은 아니다.)

2.2 신학적 특성

장 칼뱅의 예정설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회와 달리,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웨슬레안 또는 알미니안(Arminian) 신학[8]이라고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웨슬리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 체계에는 분명히 차이[9] 가 존재한다. 그래서 구원의 절대주권성을 중시하는 한국의 장로회 신학자들은 웨슬리의 신학체계는 정통으로 인정하는 반면,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체계는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감리교회 교리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만민 구원(선행 은총), 칭의, 성화, 완전이다. 이는 개혁교회(장로회)에서 주장하는 예정설의 한 번의 거듭남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과는 다르다. [10]인간의 의지에 의한 거듭된 성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하나님께 더 높은 수준으로 만날 수 있으며,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 의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고, 이에 대한 확신이 강한 장로교나 기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점진적인 과정이며, 이때문에 감리교의 교리는 사실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감리교는 2006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세계연맹간에 맺어진 "의화에 관한 일치선언"을 갱신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이 문서에 사인을 하였다. 때문에 세세한 입장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톨릭교회, 루터교, 감리회는 동일한 구원관을 가지고 신자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만을 강조하는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밖으로 보이는 선행 역시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빈민 선교활동을 더욱 강조하여 분리된 교파가 바로 구세군이다.[11]

이러한 특성에 따라,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조직신학 및 기독교 사상, 성경학 등에서 진보적인 입장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다.[12]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한국의 감리교

3.1 역사

3.1.1 초창기

한국감리교회는 1884년 맥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아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을 그 시초로 본다.[13] 이후 1885년 헨리 아펜젤러배재학당을,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웠다.

미국의 감리교단처럼 남감리회, 북감리회로 유지됐던게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연회로 통합후 독립하여 자치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감리교회가 정립이 됐다.[14]

개신교 포교 초창기 때 감리회와 장로회가 과열 경쟁(?)을 벌이자 서울을 중심으로 북쪽은 감리회가, 남쪽은 장로회가 집중하여 포교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고 과거에 적혀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지 분할은 단순히 서울을 중심하여 남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서울 같은 큰 도시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지에 포함되었다. 남북 감리교를 통틀어 감리교는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남, 평북 일부지역으로 선교지를 구성하였고, 장로교는 경기,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으로 선교지를 구성하였다. 당시 감리교는 남북 감리회 두 개의 선교부만 들어와 있었고 장로교는 미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총 네 개의 선교부가 들어와 있어서 처음부터 양 교단은 교세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장로교가 보다 넓은 지역에 선교지를 할당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북한 지역에 우세했던 교단은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였다. 선교지 분할에 의미가 없어진 지금, 감리교가 중부 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장로교가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남부 지역까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존 웨슬리 시절부터 낙오지 지역에 중점적인 선교를 하던 관례대로, 섬이나 해안 지역에 감리교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현재 감리회는 처음 들어온 인천을 비롯, 서울, 경기도, 충청도(서해안) 쪽이 강세를 보인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도 나름 강세를 보이는 듯. 다만 경상도전라도 쪽은 장로교단이 압도적이라 감리교는 좀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다.

3.1.2 현대

200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출이 파행으로 치달아 2010년에 감독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도 했다. 감독회장 후보자들 간의 자격 요건 문제로 생긴 분쟁이 감리교 전체의 파벌 싸움으로 번져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참고). 이것을 '감리교 사태'라고 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2010년 12월에 감독회장 대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장로를 맡고 있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참고). 감리교 내부의 대립이 극심하다보니 법원에서 결국 공석이 된 감독회장을 감리교 목사가 아닌 장로교 장로로 선임하는 지경까지 간 것. 2012년에 전임 감독회장이 임시 감독회장을 맡아 이 문제를 수습하고 2013년에 정식 감독회장이 선출이 돼서야 '감리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하다.

2012년 9월 25일 감리교 총회에서 목회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미 목회세습 문제가 오래된 상황에서 감리교에서 먼저 뒤늦게나마 목회세습을 막아보겠다고 나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보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 목사는 다 날 죽이려 든다라고 미국에서 외쳤대나 뭐래나. 역시 불륜 6걸의 수장 답다. 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긴 뒤에도 편법[15]을 통해 목회세습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현재는 아들은 아버지가 담임했던 교회를 10년간 담임할 수 없도록 규정을 보완하였다. 직접적인 세습의 길은 거의 막힌 셈이다.[16]

2016년 1월 14일 제 31차 감리교 임시총회에서는 한국 교단 중 처음으로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였다. 물론 장정개정위원회가 올린 개정안에 따라서 기존 이중 직업을 가진 교역자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안 기존 법안을 재정자립이 어려운 미자립 교회[17]에서만 허용하였다. 이에 미자립교회 담임자가 이중직을 허락받으려면 , 해당연회 감독으로부터 근무지, 직종, 근무시간등을 서면으로 신청하고 허락받아야 한다. 이전에도 예장통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막거나 정죄하면 안된다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실제적으로 장정에 채택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최초로 이중직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미자립 교회에 대한 지원이 전과 같지 않고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2 특징

감리회는 미국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로 알려져 있는것과 달리, 한국의 감리회는 한국 개신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파인 개혁교회(장로회)의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보수적인 편이다. 분위기 상으로는 예장통합과 큰 차이는 없는 듯. 그러나 이는 교회에 국한된 문제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장로교를 모방하여 똑같이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현장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이 택하게 된 결과이다. 신학대에서는 반면 원래의 색깔처럼 굉장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합동보수·고신·재건 등 수구적인 장로교단에서는 감리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좋게 말해서 자유주의자, 나쁘게 말해서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18]

이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감리회의 기본 입장과 장로회의 기본 입장은 상당히 다르며, 교리적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단으로 해석[19][20]할 수도 있는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륜 6걸 항목에 나와있는 김홍도 목사같은 경우엔 근본주의적이며 반이성적인 발언을 남발하여 리처드 도킨스에게 세계구급으로 까이기도 했을 정도. 또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리회 계통 인사들 역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3.3 종파 및 교세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한민국 감리회를 대표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통합에 이어 3번째로 큰 교단이다. 그리고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소수 교단이 존재한다.# 참고로 JMS 등의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다[21].

기독교대한 감리회 기준 2016년 현재 교인수는 137만여 명이다.기독교 대한 감리회-교세현황

2000년부터 자세한 교세 변화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KMCMission)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3.4 교육

한국의 감리교 관련 교육기관으로는 감리교신학대학교(약칭 감신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22], 그리고 배재대학교가 있다. 이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만 교역자 양성 기능이 있으며, 배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신학과가 없다. 물론 미션스쿨이다보니 채플도 있고 배재대학교에는 복지신학과가, 이화여자대학교에는 기독교학부가 있지만 교역자양성기능은 없다. (배재대는 과거에는 신학과였으나, 지금은 샤회복지가 메인인 학과로 변했다). 연세대학교의 경우에는 장로교회와 공동으로 설립. 관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하고 있으므로 이곳의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은 주로 예장통합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3.5 감리회의 신앙고백

  •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 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음을 믿습니다.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영생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아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이를 신앙의 실천적 목표로 삼아,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왔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사회적 삶의 새로운 실천 원칙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우주 만물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2. 가정과 성, 인구 정책 우리는 가정과 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귀한 제도임을 믿는다. 가정을 올바로 보존하며 성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구 문제로 인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있는 인구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한다.
3.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정권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위임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4.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5. 노동과 분배 정의 우리는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귀하게 여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를 시정하여 분배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6. 복지 사회 건설 우리는 부를 독점하여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무간섭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온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며 사는 복지 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7.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오늘의 지나친 과학 기술주의가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물질 만능주의가 도덕적 타락(성도덕, 퇴폐문화, 마약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 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

8.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우리는 근래에 급속히 발전한 생명 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장기 이식 등에 대해 교회의 책임 있는 대책과 올바른 의료 윤리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는다.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10. 평화적 통일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가지 국내외적 문제로 분단되어 온 비극을 뼈아프게 느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를 통한 민족, 민주, 자주, 평화의 원칙 아래 조속히 통일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11.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 우리는 재래적 분쟁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동시에 세계의 기아 문제, 식량의 무기화, 민족 분규, 패권주의 등의 해결을 위해 모든 나라와 협력함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

3.6 비판

3.6.1 친일 행적과 논란이 있는 교단 인물

가장 친일행적이 뚜렷한 교단이다. 구한 말에서 광복 이전까지 들어온 개신교 교단들의 신학교들 중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경우 설립 이후 해체된 적이 없는 신학교일 정도이다. 즉 일제 조선총독부에게 크게 밉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타 개신교단들은 일제 말기에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23].

가장 심각한 협조는 바로 신사참배 등 일제 말에 내선일체에 대한 협조이다.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제는 일본 내부 교단과 조선 교단의 합병을 추진했다. 감리교는 일본의 교단과 합병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남북감리회를 통합하고 초대 총리사가 된 양주삼 목사 역시 이에 자유롭지 못한 인물. 이에 대해 근대사를 다룬 책들 외에도 감리교 내 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이덕주 목사의 저서인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서울: 신앙과 지성사, 2009)[24]에서도 친일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처참하게도 저항한 목회자로 단 한 사람의 행적만 소개될 정도.[25]. 감리교는 교단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여 일본 감리교단과의 통합에 응했다.

이외에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윤치호 등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 중 평가가 갈리는 인물의 상당수가 이 교단에 몸담았다. 당시 선교사들 중 상당수는 조선에 대하여 비관적이었으며, 일부 지식인들 역시 조선에 환멸감을 느끼고 친일의 길을 가기도 했다. 현대사에서 난리를 친 이기붕도 여기.

3.6.2 정치적인 교단 구조

감독을 목사와 장로들의 선거로 선출한다. 역시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에서도 비관적인 어조로 잘 서술되어 있다. 책에 서술된 모습 외에도 사실상 선출된 감독직은 종신직으로 여겨지며, 신학교 간 파벌싸움과 정치계를 닮은 모습들이 자주 연출된다고.

목회자의 권한이 강력하다. 평신도의 직분인 장로는 종신직이 아니다. 이에 반해 목사는 전도사 시절 수련목 시험을 거쳐 수련목이 되고, 한 번 더 시험을 거쳐 목사가 되면 사실상 종신직이다. 위에 언급된 감독직을 선출하는 선거에서도 담임목사의 표를 따라가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3.6.3 가장 심각한 분열

장로교를 분열의 상징으로 보고 "우리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신도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예수교 대한감리회"를 취급조차 하지 않는 완전한 단절 이상의 분열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 수용 문제로 갈라섰는데 감리교는 "기독교 대한감리회"만이 감리교라 자처하면서 "예수교 대한감리회"의 존재를 언급도 않는다. 이는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 교단들"이 형식적이지만 하나의 한국장로회총연합으로는 함께하는 것과는 더욱 대조적인 처참한 분열이다.

심지어 신학생들 조차도 상당수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나무위키에서 "예수교 대한감리회"가 감리교 문서에서 언급된게 신기할 정도. 『이덕주 교수가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에서는 "예수교 대한감리회"와의 분열이 언급되지 않는다.

4 국내 주요 감리회 교단 목록

5 인물

5.1 목회자, 신학자

5.2 평신도

6 외부 링크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예수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1. John요한영어 명칭인 관계로 '요한 웨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영국사람이다보니 존 웨슬리로 부르는 게 맞긴 하다.
  2. 참고로 존 웨슬리 본인은 감리회 등의 분리에는 반대하였으며 끝까지 성공회 신부로 남아 있었다. 종교적 문제에선 깔 양반은 물론 아니지만... 어린이 교육 문제에선 깔게 많은 양반이다. 영국 요리 참고.
  3. 참고로 이때 성공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잔류한 성공회 내 복음주의 일파를 '저교회파'라고 한다.
  4. 성공회 측의 이러한 견제에 웨슬리는 "나의 교구는 전 세계다"라며 돌직구를 날린 바 있다.
  5. 가톨릭, 동방정교회, 자칭이지만 성공회
  6. 보편교회의 주교와 비슷하다. 영어 칭은 감독과 주교가 둘 다 bishop으로 같다.
  7. 그런데 한국 감리교에서는 감독의 임기가 끝난 전임 감독도 '감독'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잘못이라는 지적도 상당수 있다.
  8. 이 계통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네덜란드의 아르미니우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참고로 장로교에서도 초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칼뱅주의의 관점에서) 이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그저 개신교의 여러 다른 신학사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9. 알미니안은 회개와 같은 신앙적 행동이 신의 구원의지와 협동할 때 구원이 완성된다고 보고 있지만, 웨슬리안은 회개조차 선행하는 은총에 의한 것이므로 구원의 주권만큼은 온전히 신의 의지라 주장한다
  10. 위 문단은 오해가 있다. 칼뱅이 애초에 강조한 것이 성화이다. 즉 구원의 필수 조건이 어느 정도의 성화인가에 대한 논란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예수를 믿어도 어느 정도까지 성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있을까? 칼뱅주의에서도 성화의 삶은 예수를 믿은 후 일어난다고 애초에 칼뱅이 초창기 저작인 "『기독교 강요』"에 써놨다. 선행 역시 구원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로 개혁교회도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눈에 드는 가식에 가까운 행위를 경계할 뿐이다.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풀릴 오해들인 셈이다. 다만 인간의 의지 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성화를 이해한다는 차이가 있다.
  11. 여담으로 감리회 국제본부와 구세군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
  12. 대표적으로 사회 내 소수자(대표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은 타 교단 측에서 봤을 때 상당히 충공깽한 수준. 그러나 한국의 감리교는 장로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감리교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라 최근에는 목회자가 동성결혼, 동성애를 옹호할 경우 교단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13.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파송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4. 여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감리교단도 통합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보다 앞서서 감리교단을 통합했다.
  15. 본인과 연결된 다른 목사를 거쳐 아들에게 목회직을 넘기는 방법
  16. 이제 남은 방법은 맞바꾸기 뿐이다.
  17. 월 1000~1500만원 이하
  18. 다만, 교리와는 달리 교회 내의 기본적인 구조는 당연히 감리교의 기본적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와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 안수에 적극적이며, 여성 장로의 천거 또한 개혁교회(장로교)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차이점 중에 하나다.
  19. 쉽게 정리하자면, 구원론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에 대한 입장차이는 이단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
  20. 물론 큰 틀에서 해석하면 같은 개신교적인 해석으로 통합할 수도 있으며 이는 외국에서 두 교파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개신교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한국과 달리 "장로교인", "감리교인"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파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로 Evangelical(복음주의)라고 말할 경우 보통 장로회이다.
  21. 예수교대한감리회의 영문 이니셜은 JMC(Jesus Methodist Church)이므로 JMS와 혼동하지 말자. 자세한 것은 JMS 참고.
  22. 연세대는 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등이 통합으로 이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감리회보다는 장로회의 영향력이 더 큰 편이다.
  23. 물론, 광복 이후 설립된 목원대학교의 경우는 다소 억울할 수 있다. 목원대학교는 1954년 찰스 D. 스톡스 선교사가 세웠다.
  24. 사학도가 아니더라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 읽으신다면 이 책이 뺄 것은 빼고 서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그림자를 말살하지는 않았다.
  25. 일제 말기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침례교성결교는 교단이 해체되었고, 장로교는 평양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를 잃었다. 장로교는 일제에 협조한 목사들 위주로 새로 신학교를 열었는데 그것이 조선신학교이다. 이에 반하여 끝까지 저항한 장로교 목사들이 형성한 교단이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교단이다. 광복 이후 전래된 루터교 등 이러한 역사적 과오에서 자유로운 교단들도 있다..
  26. 1930년 조선 남/북감리회의 통합을 주도했던 교회. 통합 감리회의 초대 총리사인 양주삼 목사가 담임을 했던 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