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동산 법.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토지를 부동산으로 치환하면 이해가 좀 더 쉽다.
1 요약
重農學派. 경세치용 학파(經世致用學派)라고도 하며,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들을 일컫는 말. 그들이 주장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정전론 등이 있는데 모두 따져보면 결국 토지의 분배와 관련되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토지의 분배는 결국 국가의 조세 문제와 병역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권세가와 사대부들의 대토지 겸병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휘청거리고 백성들의 조세부담은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지분배 정책을 바꾸자는 주장은 결국 국가체계 자체를 뒤바꾸자라는 이야기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씹혔다.
사실 그런데 이론 자체가 그럴듯하긴 했지만 따지고 들어보면 한계점도 명백히 있는 주장들이었다. 이런 이론을 주장한 자들이 대체로 재야학자들이라 실제 실천되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으나 이론 자체도 완벽했다고 보긴 힘들다.
2 균전론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이론.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주장했다. 유형원이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는 정전법으로 정전법에 근거한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했다고 볼수있다. 즉, 국가가 토지를 다 모아(국유화시켜서)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이론이다. 구체적으로 농민 1호당 1경(40두락)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각자가 1경의 토지에서 나온 소산중 10분의 1십일조?을 조세로 내며 4경마다 즉, 4호당 한명씩 병사를 낸다는 것. 토지를 지급받은 자가 죽거나 다른곳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관청에 신고하여 재조정하도록 했다. 유형원은 이를 통해서 조세문제는 물론 병역문제까지 한방에 해결할수 있을것으로 보았다. (부동산 개인 소유 금지)
다만 계급에 따라 토지가 차등지급된다는 점은 한계로 볼수있다. 유형원은 유생에게는 2경에서 4경까지의 토지를 분배하고 현직관리는 품계에 따라서 6경에서 12경까지의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농업을 하지 않는 상공업자는 일반 농민보다 적은 0.5경을 나누어주고 무당,승려,여자는 땅을 주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남편,아들없는 과부는 굶어죽으라 이거지 새퀴야
들어보면 그럴듯하지만 당시에는... 씹혔다. 물론 유형원이 재야학자라서 실제 정책화 시키기 위한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으나 이론을 가만 들여다보면 한계가 분명하다. 유형원의 주장대로 가려면 국가가 토지에 대한 장악력이 확고해야만 한다. 즉 관리나 유생이 힘없는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데 대해서 국가가 이를 제지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것. 그러나 조선이 중앙집권이 확고했다 하더라도 전국의 토지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그 상황을 조정한다는건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한양에서 먼지역에서 유생이나 관리가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그 상황을 조작해도 알 도리가 있었겠는가? 설령 유형원의 주장이 실제 정책으로 관철되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보나마나 유생,관리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서 겸병할 개연성이 컸을것이다. 나름 유교의 이상에 입각한 이론이었으나 어찌보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못한 백면서생의 주장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다.
3 한전론
성호 이익의 주장으로 사실 성호 이익이 독자적으로 만든 이론은 아니고 정석유,임박유,서명신등도 주장한 이론이기도 하다.
백면서생 유형원이 국가가 일괄적으로 토지를 전부 몰수해서 나누어준다는것과는 달리 이익등은 모든 토지를 일괄몰수하기 보다는 농민들에게 먹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지(영업전)를 분배하고 영업전은 매매를 금지하며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초생활보장과 비슷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어느 정도는 현실을 반영한 이론이기는 한데 사실 이전에도 실행한 적이 있다. 1518년(중종 13)에 부분적으로 실시하기도 했으나 별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 후기 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역시 씹혔다. 정약용은 한전론에 대해서 대토지 겸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고 경자유전, 즉 땅은 농사짓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4 여전론
정약용의 주장.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토지분배에 있어서 경자유전의 원칙이 확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자유전이란 땅은 농사짓는 사람이 가져야 된다라는 것. 그래서 정약용은 이 원칙에 근거해서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적 지리상황과 환경등을 고려하여 30호정도를 한개의 여(閭)로 묶는다. 여안의 토지는 여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한다. 여민들은 여장의 지휘를 받아서 농사일을 함께 하고 여장은 여민들이 일한 양을 장부에 기입해둔다. 수확철에 모든 수확물들을 한데 모은뒤에 장부에 기입된대로,즉 일한 양에 따라서 수확물을 분배받으며 이때 수확물의 10분의 1은 국가에 바치고 여장의 봉급을 제한뒤에 분배를 시작한다. 한마디로 공동생산,공동분배를 중심으로 한 이론이다.집단농장? 공산주의?
이런 체제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최소한 일을 해야만 먹고살수 있게 된다. 자연히 양반입네 하면서 띵까띵까하던 사람들도 농사일을 하게 될수밖에 없게된다. 정약용은 양반들이 지적능력을 발휘해서 농업생산력 향상에 기여하게 될것으로 보았다. 또한 상공업자들은 농사일을 하지 않더라도 생산품을 곡식과 교환해서 살아갈수 있으리라 보았다. 정약용은 또한 농민들이 자유롭게 여를 옮겨다닐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10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전국의 토지이용과 인구분포가 고르게 될 것이라 보았다.지역균형발전?
이것도 가만 들어보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역시 씹혔다. 정약용 본인조차도 주장한 뒤에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비판에 동의했을 정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체제에서는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충 시간만 떼우는 식으로 일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생산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것이다. 게다가 농민들이 자유롭게 옮겨다니게 되면 자연히 더 좋은 여를 찾아갈 테고 되려 전국적으로 고른 토지 이용과 인구 분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더 격차가 심해질 수밖에 없어진다.
5 정전론
여전론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은뒤 정약용이 이를 수용해서 새롭게 정립한 자신의 토지분배 이론. 경세유표에서 이를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정전론 자체는 저멀리 주나라 시대의 주공때까지로 거슬러올라간다. 토지를 우물 정(井)의 형태로 9등분하여 8호에게 각각 한구역씩을 주고 경작하게 하고, 맨 가운데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구역의 수확물은 자신들이 갖고 맨가운데 구역에서 난 수확은 국가에 조세로 바친다는 이론이다. 중국에서도 진,한 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토지 겸병이 극에 달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장되어 당송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주장되었다. 명나라때에 이르러서야 서구와의 무역으로 풍부한 은이 유입되면서 토지세와 호구세를 결합해 화폐로 내는 일조편법이 만들어지고, 청나라 때에 이를 완전히 은으로만 내도록 규정한 지정은제가 확립되면서야 중국도 조세 문제에서 겨우 해방되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자가 존경한 주공의 이론이란 점에서 유교적 이상에 부합한 이론으로 여러 학자들이 주장했다. 정약용도 초기의 여전론에서 벗어나서 정전론을 주장했는데 정약용의 정전론이 이전의 정전론과 다른 부분은 정약용의 확고한 원칙인 경자유전 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에 있다.
즉, 정약용은 정전론의 원칙대로 국가가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는 9등분하되 토지를 받는 이는 철저하게 경작능력을 따라서 토지를 받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다시말해서 실제 농사를 지을 능력이 있는 사람만 토지를 분배받아야 한다는것. 특히 군역문제 해결도 고려해 병사가 될수 있는 힘센자가 있는 농가에 토지분배의 우선권을 준다. 이를 사전(私田)이라하며, 사전을 분배받은 농민들이 공동으로 맨가운데 구역의 토지,즉 공전(公田)을 경작해 공전에서 나온 소출을 조세로 국가에 바치게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또한 국가가 전체 토지를 몰수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탓에 비판을 받자 정약용은 현실을 반영해서 현체제의 토지소유 상태는 인정하되,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행정상으로 9등분한뒤에 그중에서 9분의 1을 국가가 매입해 공전으로 삼고 그 토지에서 나는 소출을 조세로 거두면 될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역시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집단농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체 누가 자기 것도 아닌 세금 낼 토지에서 열심히 농사일을 하겠느냐는 점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하지 않고 인구수도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