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瀷
1681~1763
1 개요
본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실학자이다. 재야의 학자로 머무르면서 실용적인 학문을 할 것, 한전론, 호포론, 개병제, 양반의 생업 종사 등을 주장하였다. 일부 문벌가문의 자제들이 쉽게 급제할수 있는 과거 제도의 실태를 지적하고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 또한 과거제도, 노비제도, 문벌제도, 잡술, 승려, 건달을 나라를 좀 먹는 여섯가지 폐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허목의 학통으로 이잠, 이서우의 문인이며, 유형원을 사숙하였다.[1] 저서는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등이 있다.
2 성호학파
이익은 근기 남인 계통으로 윤휴나 허목에 가까운데, 이익에 의해서 하나의 분파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호학파이다. 이후 성호학파는 노론계열 실학자들이 망라된 북학파[2]와 함께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양대 계보를 이루게 된다.
다만 성호학파의 경우는 성호 이익이 살아있는 동안에 벌써 분파가 이뤄진다. 이렇게 성호학파가 분열된 것은 이익이란 인물 자체가 복잡다단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크다. 때문에 성호학파는 이익이 연구하던 분야의 일부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아서 심화, 발전시키는 것으로 실학의 계보를 이어갔는데 예를 들어 성호학파 중 한사람이었던 안정복이 저술한 역사서인 동사강목에서 이익의 성호사설중 사론이 나온다든가 하는 것으로, 이걸 후대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던 것이다.
단적인 부분이 서학이라고 불렸던 천주교에 대한 수용태도였다. 이익은 조선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연구를 한 성리학자 중 한 명[3]인데, 천주교에 대해서 학문으로서는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반면에 종교로서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익 후대의 학맥에서도 천주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중에서 천주교를 학문으로만 받아들이거나 혹은 반대한 파벌을 성호우파, 혹은 공서파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신후담[4], 채제공, 이용휴[5] 등이 포함된다. 영정조시대 남인의 주류가 이들이다.
반대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신봉한 파벌은 성호좌파, 혹은 신서파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6] 등이 포함된다. 천주교 박해에 의해서 죽어나가는 이들은 대부분 이쪽이었다.
또한 공서파와 신서파 어디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이들도 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그 형제의 성향이나 본인들이 한때 천주교에 심취했던 모습을 봐도 신서파의 모습이 보이지만, 박해에서 살아남은 것이나 이후 천주교와 거리를 둔 활동 등을 볼 때 학자들에 따라서는 공서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공서파와 신서파 모두와 거리를 두고 일상생활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포함시키기 어렵다.
3 일본의 미래를 예견하다.
조선 내부의 문제 뿐만 아니라 조선 외부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통찰력이 상당했다. 당시 일본 쇼군 너머 덴노의 존재를 간파해내고는 조일 관계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 조일 관계의 모순이라는 게 뭔지 이해하려면 당시 동북아의 상황을 대강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일단 조일 양국은 누가 상국이고 뭐고 할 거 없이 대등한 국가로서 교류하였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조선 국왕은 이유나 실상이야 어쨌든 액면 상으로는 명청조 황제에게 예속된 신하였고, 조선이라는 나라 역시 이유나 실상이야 어쨌든 액면 상으로는 명청조에 예속된 조공국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달랐다. 일본 덴노는 역시나 이유나 실상이야 어쨌든 명청조와 관계 없이 왕 위의 존재로서 명청조 황제와 동급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역시 조선과는 달리 딱히 명청조랑 뭐가 있는 게 아닌 자주 독립국으로서, 액면상으로는 명청조와 대등한 국가였다. 즉, 이걸 대충 정리하면,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이다.[7] 근데 조선의 군주와 국가 위에는 명청조의 군주와 국가가 있다. 근데 일본의 군주와 국가는 명청조의 군주와 국가랑 대등하다.' 인 상황인 것이고, 여기서 일본 좋을대로 한 발 더 나아가면 일본이 조선보다 위에 있는 나라라는 괴랄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다.아니, 대등하다면서요? 그러니까 모순이지. 미친놈 헛소리로만 볼 일도 아닌 것이, 실제로 당장 일본이 운요호를 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올 적에 자기네들끼리 결정해둔 것이, '조선이 일본보다 아랫서열에 있는 나라임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저런 논리에 기초하여. 물론 이건 실패했지만….
하지만 실상은 막부 정권의 덴노 능욕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화 왕조는 어쨌든 간에 자신들과 동급인 그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전근대 시절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면 조공 체제를 확립해 놓아야만 가능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민간끼리의 무역이라면 모를까나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면 어찌됐든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는 형식을 거쳐야만 했다. 문제는 바다라는 자연 장벽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한정된 관계로 외부의 침입에선 일단 안심이지만 역으로 외부 사정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사정상 발생되는 선민사상과 충돌하게 되는데, 일본의 막부 정권은 외부에 대해 자신들이 주권자임을 천시하는 방법으로 중국과 통교를 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무로마치 막부 시절은 이게 극에 달해 명나라로부터 대놓고 일본 국왕임을 책봉받았는데 이는 대놓고 정권의 명분을 덴노가 아닌 중국에 두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아시카가 요시미츠 항목 참조.[8] 에도 막부 시절은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가 없는 상태여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단, 민간 교류 라고 쓰고 밀무역이라고 읽는다. 는 활발하여 나카사키의 차이나 타운은 당시 데지마를 제치고 일본 내 제1의 외국인 거주지였다. 다만 현재는 데지마를 더 띄우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국가 대 국가로 교류한 나라는 조선이었는데 숙종 무렵까지 쇼군은 조선에서 '대군'급으로 여겨졌다. 숙종 무렵에 들어서 일본 측에서 쇼군을 국왕급으로 여겨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논란이 일었는데 이는 앞서 무로마치 막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덴노를 무시하고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대표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런 요청으로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을 쓰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쓴 것은 아니고 대군이라는 호칭과 혼용해서 썼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타이쿤 항목 참조. 물론 이런 미묘한 관계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식 외교 관계를 받아들인 이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을 지적한 것도 모자라, 그로써 야기될 문제를 지적하며 훗날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에 터진 서계 거부 사건을 예언해냈으며, 그걸로도 부족하셨던지 한 술 더 뜨셔서는, 당시 바다 건너 일본의 일본인들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대정봉환과 무진전쟁까지도 예언해내는 기염을 토해내셨다. 심지어는 '신정부군이 덴노를 옹립하여 명분을 세운다'는 대략적인 전쟁의 양상부터, 그에 따른 신정부군의 승리까지도 예언하였으니, 이 부분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 이 두 사건이 메이지 유신의 근간이 된다는 점,[9] 그리고 그 메이지 유신이 성호 이익 자신의 조국인 조선에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야 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다음은 저서 '성호사설' 권17 '일본 충의(日本忠義)' 편의 관련 부분이다.
왜황이 실권한 지가 불과 6, 700년밖에 되지 않는데 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차츰 충의로운 사(선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명분이 바르고 주장이 이치에 순하니[10] 훗날 반드시 한 번 그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에조가시마[11]인들과 연결하고 왜황을 보좌해서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필시 대의를 펴지 못하진 않으리니 66개 주의 태수들 가운데 어찌 뜻을 같이 해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12]
성호 이익은 저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100년도 더 전의 사람이고, 이 시기의 에도 막부는 오늘 내일 하기는커녕 건재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대정봉환과 무진전쟁 부분만 따지자면 이익은 직접 당사자인 일본인도 아니고, 저 동해 바다 건너 조선인이다. 21세기처럼 무슨 인터넷이나 하다 못해 전화선이 있던 것도 아니었던 시기에 이런 예측을 해낸 것이니, 실로 대단한 통찰력이라는 말밖엔 안 나온다.
다만 사실 일본 내 토막파(討幕派)의 움직임은 느닷없이 미국 놈한테 총포탄을 얻어 맞고 별안간 터져나온 아주 뜬금 없는 것이 아니라, 에도 막부가 건재하던 무려 18세기 전반 때부터 수도 교토의 근왕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퍼져가고 있던 것이었다. 다만 이때의 토막파들은 대놓고 토막 어쩌고 했다간 자기 목이 토막 당할 판이었으므로(…),[13] 자기들끼리 소주 한 잔 들이키며 크게 한숨 토하고 몰래 토막을 논하며 세상사를 한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동행했던 남옥(南玉)과 친왕의 교육 담당이었던 나와 로도(那波魯堂)가 만나서 나눈 이야기에도 나와 있는데, 이들은 언제 자신들을 막부에 찌를지 모르는 자국민들보다도, 그럴 위험이 없는 외국인이었던 조선인들을 상대로 그러한 토막의 속내를 은근히 털어 놓으며 한을 달래기도 하였으나, 막상 그 넋두리를 들어주던 통신사가 눈치도 없이 "당신들의 임금이 정권을 잡는 건 높이 살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라고 하라는 공감은 안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말을 건네며 토막의 뜻을 분명히 들으려고 은근슬쩍 찌르면, 그때만큼은 한 발 물러서서는 현시창에 부들부들하며 "창의적인 소리일 뿐이다." 라 하는 등, 말이든 행동이든 상당히 조심하면서 지냈다.[14]
나와 로도가 이런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은 일본에는 전무하며, 오직 조선통신사의 기록에만 존재한다. 통신사가 딱히 이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로, 그만큼 이 토막파들이 일본인들 상대로는 말을 대단히 조심히 하며 행동을 은밀히 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아울러 남옥은 이밖에도 교토 지식인들을 만나본 후 이런 말을 남겼다. "서경의 인사들과 깊이 마음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보니, 이들이 모두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관백(쇼군)을 패자로, 왜황을 왕자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관백을 왕망, 조조와 같은 찬탈자로 보고 있다."[15]
또한 청성잡기로 유명한 성대중 또한 나와 로도를 만나보고 나서 차상기(槎上記)에 남옥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서술했으며, 원중거(元重擧)는 자신의 저서인 화국지(和國志)에서 "에도의 정치가 흔들리고 찬탈자인 조조나 사마의와 같은 무리들이 만일 각지에서 나타난다면 왜황을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가 이 땅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기록을 남긴 걸로 보아 당시 통신사들은 왜황(덴노)이 허수아비며 이에 분노하는 지식인들이 많았음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토막의 움직임을 일본 막부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 측에서 훨씬 더, 그것도 무려 100년이나 빨리 인식하게 된 것. 다만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한 사람들은 통신사와 같은 소수 일본통들과 몇몇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딱 거기까지 아는 선에서 그쳤지, 성호 이익과 같이 그러한 환경이 미래에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또한 조선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찰해낸 경우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조선의 식자들, 특히 위정자들에게 그 이상의 일이란 건 결국 그저 '엮여봤자 피곤하고 생각해봤자 쓸모도 없는 바다 건너 섬나라 미개인들의 일'이었던 것. 모든 사람이 이익과 같았으면 일제강점기가 있을 수 있었겠나.
- ↑ 촌수로는 6촌 형이지만 생전에 한번도 못 만나 보았다.
- ↑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주축으로 중상주의, 이용후생학파라고도 부른다.
- ↑ 단적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조선에 전해질 때, 그 책의 발문을 이익이 썼다.
- ↑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의 형식을 빌어서 천주교를 공격한 대표적인 인물.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을 읽어보고 천주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전방위적 공격을 했다. 후대에 위정척사파들이 서양 문물을 비판하는데 기원이 되는 이론이 여기서 완성된다. 다만 마냥 비판하기는 그런 게, 천주교가 기술 등을 전수하는 게 결국은 종교포교 목적일 뿐이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를 수용하는 보유론을 편 것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본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 ↑ 이용휴는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의 아버지이다. 부자지간이 공서와 신서로 나뉜 것.
- ↑ 정약용의 형.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아들 정철상과 함께 시복되었다. 아내 유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시성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한국 103위 순교성인 항목을 참조.
- ↑ 또한 조선 측에선 군주 역시 대등하다고 여겼다. 애초에 중앙 정부는 일본의 덴노라는 걸 '왜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존재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고, 또한 허수아비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1764년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조선 속담에 "높고 오만한 자를 비난하는데 '왜황'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녹을 먹는 자를 '왜황'이라고 한다." 는 등의 왜황을 능욕하는 속담들이 존재했을 정도였다. 즉, 조선이 덴노를 상대로 가지고 있던 인식은 대략 이거였고, 쇼군을 상대로 가지고 있던 인식은 이거였으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면서 팽개쳐 놓았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는고 하면, 조선이 그러고 있는 걸 빤히 보면서도 딱히 뭐라 말도 안 하고 역시나 그저 어영부영 넘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기 덴노라는 건 그저 공기나 다름 없을 뿐인데, 구태여 그런 거(…) 들춰내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조선 정부한테서 괜히 안 좋은 소리나 나올 거야 불 보듯 뻔하고…
결론은 좋은 게 좋은 거지 - ↑ 참고로 요시미츠는 이와 더불어 덴노 가문의 혈통을 끊고자 하는 의혹까지 사서 일본 내에서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 ↑ 메이지 유신 그 자체를 예언해냈다고 보기에는 다소 미묘하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은 대정봉환과 무진전쟁보다도, 대정봉환을 명분으로 세우고 무진전쟁을 거친 뒤에 근대화에 성공한다는 것에 있는지라…
- ↑ 언뜻 보면 그냥 유교 성리학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쟤들은 맞는 말 하는 놈들이니까 이기는 법이다.' 라고 말하는 걸로밖에 안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건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도 명색이 왕조 국가인 일본에서 임금이 정치하겠다고 나설 때, 현실이야 어떻듯 최소한 명분 상으로는 신하인 쇼군이 막을 방법이 없다. 실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런 문제 때문에 무진전쟁 당시 비교적 순순히 대권을 덴노에게 넘겨줬다는 설이 있다. 설령 승전을 하더라도 그 뒤에 덴노가 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 지금의 홋카이도
- ↑ 이것 때문에 서계 거부 사건이 터지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그야말로 어거지를 부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다. 이 문제는 강화도 조약 내내 조일 양국이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조선 측에 유리한 쪽으로 매듭을 짓게 되니, 조약을 '조선 국왕'과 '일본 덴노'의 이름으로가 아닌, '대조선국'과 '대일본국'의 이름으로 체결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익이 지적한 것과 같은 수직적인 '황제와 왕'이 아닌, 수평적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된다는 논리. 실제로 조일 양국은 실상이야 어쨌든 이후로도 대등한 국가로서 교류하였다. 다만 그 이외의 조항들이 시망이라(…) 조선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자리잡고 만다.
- ↑ 실제로 다케우치 시키부가
간이 팅팅 부어가지고는덴노와 공가를 상대로 존왕론을 강의하다가 막부한테 박살이 난 사건이 있었으니, 이게 바로 호우레키 사건이다. - ↑ 남옥, '일관기(日觀記)' 권10, 황계. 참조
- ↑ 후마 스스무(夫馬進) '천황의 역사 6권-에도시대의 천황' 편 참조, 관련 번역은 http://pkt87.blog.me/2014055015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