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채문

智蔡文

고려때의 보우마스터 문신, ?~1026.

1 생애

1.1 서경성에서의 활동

이 사람의 어린 시절 생애는 알 수 없다. 고려 현종시기에 중랑장[1]으로 임명되어 직무에 임하던 중에 거란의 제2차 침공을 맞게 되었다. 지채문은 이때 군대를 인솔해 동북 방면[2]의 진수에 나섰다. 이후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영혼까지 탈탈 털리는대참패를 당해 서경이 위험해지자 현종의 명으로 서경을 지원하러 출전했다.

이 당시 서경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다름아닌 서경 내부에서는 거란에 대한 항복론이 우세했던 것이다.[3] 그래서 거란군의 사절과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 항복한 노의 등의 배반자들의 설득에 따라 거란에 항복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고려를 버리고 거란에 투항하기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서경성에서는 고려의 지원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서경성 내부의 내통자의 도움을 받아 서경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채문이 서경성에 들어가기만 했다고 해서 서경성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는데, 원종석은 지채문과 최창 등의 설득을 거부하고 항복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채문은 거란의 사절들이 거란 군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을 죽여버렸다. 애초에 항복할 길을 막아버린 것.

물론 서경성 내의 불안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후에 지채문이 탁사정의 군대와 합치니 서경성은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았고, 고려군은 다시 임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시간을 끌기 위하여 항복 사절을 보냈는데 [4] 거란 성종은 이를 믿고 서경에 점거병력을 보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채문과 탁사정이 내보낸 정예 기병들이었고, 그들은 몰살당했다.낚시 성공! 이 승리로 인해서 고려군은 사기가 약간 올랐고, 지채문이 성을 나가 주둔함으로서 야전을 준비하게 된다 '약간'이라고 하지 않았니?

이후에 거란군이 공격해 왔는데, 지채문은 탁사정과 군사를 합쳐 이들과 싸워 3천여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다음날에 거란군을 추격하다 역습당해 패주한다 캐안습

1.1.1 본격적인 활약

지채문은 개경으로 돌아갔고, 서경에서의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보낸 병력마저 상황이 그러했기에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당장 조정엔 항복론이 대두되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물론 귀주 대첩의 주역인 당시 예부시랑이었던 강감찬이 몽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5] 현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몽진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지채문은 선뜻 왕 앞에 나아가 왕의 호위를 자청했는데, 현종은 크게 감동하여 전날 이원, 최창이 도망해 와서 수행하겠다고 자청하더니 지금은 다시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신하 된 도리에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는 전선에서 수고했는데 또 나를 호위하겠다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살히 여기노라고 했을 정도였다.

어쩃든 드디어 왕이 몽진을 떠나게 되었는데 금군 50명과 왕후와 후궁, 그리고 채충순 등으로 매우 단촐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조촐한 몽진행렬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몽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이 시해될 위험에 쳐했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보우마스터 지채문이 활로서 그들을 쏘아 물리쳤다.

간신히 변란을 무마하고 나서 현종 일행은 창화현에 도착했는데, 이곳 아전이 현종에 극히 무례한 행동을 했다가 왕이 그의 말을 무시하자[6] 화를 내며 "하공진이 온다"며 소란을 피우고 다녔고, 이 때문에 현종 일행의 대다수가 도망쳐 버리고 만다.[7]
물론 이 정도로 끝났으면 괜찮았겠지만, 결국 일은 터졌다. 다름아닌 이날 밤에 정체를 모르는 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정말 왕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는 왕을 호위하던 궁인들 및 관원들도 모두 도망가 숨고 두 왕후만와 승지들, 그리고 지채문만이 현종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채문은 침착하게 임기응변을 발휘,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판 공성계 그리고는 슬쩍 두 왕후를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는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왕을 호위하며 탈출했다.

이후 지채문은 창화현에서의 일이 하공진의 수작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창화현으로 정찰을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현종에게 요청했는데, 많은 신하들이 난리 통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본 현종이 지채문을 쉽게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지채문은 "제가 임금를 저버리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라는 멋진 말로 왕을 안심시키고 허락을 맡는다.

이후 하공진의 결백을 확인하고 하공진이 거느린 군사들을 거느리고 창화현에서 잃어버린 말과 안장을 찾아 왕을 모시고 전쟁이 끝나자[8] 현종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수행했다. 이때 현종을 따르고 있던 류종과 김응인이 "두 왕후를 각각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경위하는 장병들은 동쪽 방면으로 출동시켜 긴장된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간의 한복판에 국모들을 내버리자는 말이었다. 즉 한마디로 개소리, 지채문은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자기 도리를 잃고 환난을 당하여 이처럼 파천하게 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인과 의로써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할 때인데 왕후를 버리고 혼자만 살 길을 구하자는 생각할 차마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라고 간절히 간하여 현종이 이에 찬동하고 류종의 의견을 묵살한다.[9]

이후에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모두 불만을 품자 이들을 포상하여 달래줄 것을 건의해 관철시켜 장병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문제는 환란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종이 전주에 도착하니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끼고 천하를 호령할 생각이었는지조조? 군사들을 이끌고 왕이 머무는 전각앞으로 전진했는데, 지채문이 전각의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왕을 호위했다. 물론 지채문이 조용겸의 수하 중 하나를 질책해 현종을 만나 뵙고 조용겸을 따르지 않게끔 했다. 결국 지채문의 기지가 다시 현종을 구한 것. 또한 나주에서도 거란의 사절을 거란군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해한 야경꾼이 잘못된 증언을 해서 현종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바로 (거란군을 피해) 달아나려 했는데 지채문이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직접 정찰을 나가 이들이 거란의 군대가 아니라 사신임을 확인했다.

이후 1026년(고려 현종 17년)에 사망한다.

1.1.1.1 일화

현종 일행이 사산현에 이르렀는데,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위하여 지채문이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에 말을 달려 기러기뗴를 놀라 날아가게 한 뒤, 그중 한 놈을 마상에서 자신의 몸을 제친 상태에서 활을 쏘아 맞추어 떨어뜨린 후, 말에서 내려 활로 쏘아 잡은 기러기를 왕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활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으리까?"라고 말하니 현종은 크게 웃었다.

1.1.1.2 평가

현종을 2차 여요전쟁 이후까지 살아있게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의 혼자서 현종을 지켜냈다. 모두가 달아나버린 상황에서도 굳게 현종을 호위하고 또 활로써 현종을 안심시켜 드리는 모습을 보아 활만 잘 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나고 강심장이었던 듯하다.

이후 현종이 환도하여 교지를 내렸는데, "내가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 먼 곳으로 피난할 때 따라오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으나나쁜 신하들! 오직 지채문만은 풍상을 무릎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말 모는 수고도 서슴지 않고 끝내 송죽같은 절개를 세웠으니 그 특출한 공훈을 생각할 때 내가 어찌 그 특이한 은전을 아끼리오?" 라고 했다. 현종이 지채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오늘날로 치면 대령급 장수
  2. 아마도 개경과 서경 사이의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북계였다면 서경이 포위당했을 당시에 지채문이 신속하게 구원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3. 아마 이것은 고려군이 겪은 통주 전투의 대패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주력군이 궤멸당한 상황에서 서경이 생각할 수 있는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은 항복밖에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4. 물론 고려사에는 항복 서신을 보내는 이유가 그럴듯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고려가 서경에 없는 군사를 모아 파견한 것을 보면 분명 항전의 의지가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5. 사실상 항전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6. 왕은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라는 말을 했다. 이는 매우 무례한 말인데 일국의 제왕에게 일개 아전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아냐며 거만하게 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의 아전은 조선의 아전과 다르게 지방 행정권을 가진 지방 호족들이기 때문에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고려의 지배층이던 경화거족도 아니고 지방호족 이름을 알리가...
  7. 하공진을 두려워한 이유는 하공진이 변방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즉, 자신을 귀양 보낸 왕에 대한 원한이 없으리라고 장담하긴 힘든 상황이었던 것.
  8. 1011년 1월에 거란군이 개경을 불태우고 회군함으로써 일단은 종결되었지만 퇴각하는 거란군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 히든 사기캐 양규의 전투까지 합하면 2월까지이다.
  9. 물론 이후에 현종이 현덕왕후가 임신중이라는 이유로 고향에 보낼 것을 상의하자 지채문은 반대하다가 사세부득을 깨닫고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