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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관료 | |
강감찬 표준영정 | |
이름 | 강감찬(姜邯贊, 姜邯瓚) |
초명 | 강은천(姜殷川) |
생몰연도 | 948년(정종 3년)~ 1031년(덕종 1년) 8월 |
국적 | 고려 |
최종 관직 | 문하시중 |
시호 | 인헌(仁憲) |
목차
1 개요
고려시대의 명신. 요나라의 대군을 격퇴한 귀주대첩으로 매우 유명한 장군,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명장이다. 본래는 문관이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당시는 양광도 금주)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1]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 강감찬이란 이름은 개명한 이름[2]으로 보이나 언제 개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 일대기
2.1 출생과 성장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의 네 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 이름이 낙성대(落星垈)이다낙성대학교가 아니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웠다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
그의 선조는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3] 그의 부친인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4]에서 금천으로 이주하였고 거기서 감찬을 보았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983년 이후 목종 말년(서기 1009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간의 공백을 메꿀 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
그 후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제법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이런 말로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 고려사열전 강감찬
- 그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 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했다. 뒷날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2차 침입 때 몽진을 주장한 것을 언급하며 "그 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5]라고 그 공을 평가했다. 이후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 등 승승장구했고,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지금의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늦게 출세하고 그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에 가까웠던 것 같다.
2.2 제3차 여요전쟁 시기 강감찬
귀주대첩 항목 참조.
2.3 큰 별, 지다
제3차 여요전쟁이 종전된 이듬해,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토사구팽을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74살이나 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문제였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6]
1021년에 개경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거기에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 이 탑은 오늘날에도 북한 개성에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132로 지정했다고 한다.
"菩薩戒弟子平章事姜邯瓚 奉爲 邦家永泰遐邇常安敬造 此塔永充 供養 時天禧五年五月 日也"보살계제자(불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하여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1021년) 5월.
이후 1030년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두르라는 간언을 올렸고[7] 곧 실행된 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이 되었고, 이듬해엔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에 봉해졌으며 1031년 8월,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다. 현종이 세상을 뜨고 3개월 뒤의 일이었다.
사후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3 작고도 큰 인물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도 있다.[8]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라 알려졌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문곡성 강림 설화를 생각하면 사실 하늘로 올라가야 되는 거 아닌가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당시 기준으로도 키가 작고 못 생겼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원래는 매우 잘생겼다고 하는데 얼굴이 너무 잘 생기면 큰일을 못한다 하여 마마신을 불러 얼굴을 얽게 만들었다고 한다.[9] 옛날부터 미남에 대한 견제가 심했음을 보여주는 예(?). 뭐, 예나 지금이나 외모로 전쟁수행이나 국가경영 같은 큰 일을 하는 건 아니니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사실 거란족의 2차 침입 당시 하공진을 내세워 침공을 피한 것, 그리고 3차 침입 때 수공을 사용한 것이나 부대를 갈라서 소배압을 귀주로 몰아서 박살낸 작전 등을 보면 장군보다는 전략가적인 면모가 더 강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애당초 강감찬은 문관 출신이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평소에는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 이었다는 소리.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도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
또한 강감찬이 이끈 귀주 대첩 이후 송, 요, 고려는 금의 건국 때까지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의 평화를 유지했다.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요전쟁 항목 참조.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가 오래 지속된 시기는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대첩으로 크게 발라버린 덕택에 거란은 정복전쟁을 중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송, 거란, 고려, 서하의 평화 속의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이다.
4 강감찬 설화
- 정사는 아니지만 강감찬의 탄생설화중 하나이다. 강감찬이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님들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빌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꿈을 꿨는데(점쟁이에게 들었다고도 한다), 선녀가 나타나서 100명의 여성과 사정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하면 대단한 아들이 생긴다는 점지를 했다. 그래서 강감찬의 아버지는 몇 년간 전국을 떠돌며 여자와 관계를 가졌고, 99명째 여자와 관계를 갖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 요괴를 만나 100번째 성관계를 갖게 된다. 그런데 사정을 참는 것을 깜빡하고….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10개월 뒤에 집 앞에 아이가 하나 버려져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라고 한다. 100명을 채우지 못했으므로 키가 왜소하고 얼굴이 못생겼지만, 99명은 성공했으므로 도술 정도는 부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아베노 세이메이라는 유명 음양사도 이와 비슷한 출생설화를 가지고있다.
- 강감찬이 젊었을 때 어느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아전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수령의 풍채가 볼품없고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그저 데꿀멍할 뿐이었다고 한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진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집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흠좀무.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해서 강감찬에게 오자 "자꾸 사람들 해칠래? 니들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꺼져 버려!"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호랑이의 우두머리였던 것. 호랑이는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강감찬은 끝내 용서하지 않아서 호랑이들이 스스로 남경을 떠났다는 것.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한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또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그랬다면 신랑이 자매덮밥 했겠지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똥개(...)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똥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백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 - 심지어는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후덜덜.
강감찬의 집 밑에서 술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 네 사람이 드는 가마)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하였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서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장군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엿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 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장군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아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
이렇듯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탄생 설화, 호랑이, 개구리 추방 설화 등등)가 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이나 담력, 혹은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다.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곤 한다. 과연 문곡성의 화신. 고려사열전에서도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5 오늘날의 강감찬
국립전쟁기념관에 있는 흉상
파일:Attachment/강감찬/e0017672 4ebdd4af609b7.jpg
(낙성대공원의 기마상. 대부분의 동상들이 그렇지만 낙성대에 가서 이 동상을 보면 동상을 점거하고 있는 닭둘기떼를 쉽게 볼 수 있다.(…) 비둘기들이 배설물을 배출하는 바람에 동상이 자주 더러워지는 편. 문신이었고 84년간의 일생동안 갑주를 입은 건 거란의 제3차 침입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대첩의 의의가 워낙 엄청나다 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뒷편에 보이는 산은 관악산.
낙성대학교 이사장님
사극 《천추태후》에서는 뭔가 포스가 넘쳤다. 문관 맞나 할 정도로 그 포스가 너무 강하게 나오는데 사실 드라마상에서는 문관이 아닌 무관처럼 그려진다. 중반까지 관복보다 갑옷을 많이 입고 나오기도 했고... 다른 것보다는 무관 역을 많이 맡았던 배우인 이덕화 씨의 연기 보정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초기에는 설인귀[10]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여기서는 서희를 스승처럼 모시며 그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데 강감찬이 서희와 6년 터울인 것을 생각하면 좀 어색하게 들리는 표현. 여담이지만 이덕화는 강감찬 역 제의를 받고 본인이 주인공인 줄 알고 좋아했다가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고 아쉬워했다고 하며 또한 탤런트 강부자가 농담삼아서 장난하지 말라는 압박(?)도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를 이끈 인물이면서도, 그 네임밸류에 비해 남은 행적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요소까지 있어 각색하기 좋은 조건을 많이 갖춘 인물인데도 3대 대첩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에 비해 묘하게 현대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감이 있다. 을지문덕 같은 경우도 오늘날의 지명도에 비해 행적이 많이 남지 않아서(더구나 을지문덕은 생몰년도도 미상) 강감찬과 마찬가지긴 하지만 적어도 을지문덕이 활약하는 고구려-수 전쟁 자체는 강감찬이 활약한 여요전쟁에 비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자주 다뤄진 편이다. 여요전쟁 자체가 전쟁의 크기나 중요도에 비해 현대 매체에서 이상하게 소외받는 전쟁이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당시는 양광도 금주)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하였다.
낙성대공원의 강감찬 동상과 함께 엉뚱하게 수원 팔달산에 강감찬 동상이 있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엉뚱하게 강감찬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의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 라는 엉뚱한 지시에 의해서였다. 팔달산의 강감찬 동상은 2007년 이전[11]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일제시대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KDX-2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인 DDH 979는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다.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6 강감찬의 묘
강감찬의 묘는 의외의 장소에 위치한다. 다름 아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12]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으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옥사'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에 해당하는데, 민회빈 강씨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강빈은 인조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한다.
본래 강감찬은 조선시대에 특별히 제사를 지내주던 고려시대의 명신에 포함되어 있었고, 실록을 보면 여전히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명신으로 대접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특히 선조 때와 광해군 때에 선조와 광해군 모두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 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도 보인다.[13]그랬던 묘가 정치적 옥사에 휘말려 묘까지 실전되어 버린 셈.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 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만다행.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고.
다만 유명 역사인물들의 묘소가 대개 사적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편인데 강감찬 묘소는 사적지로 지정되지는 않은 상태다.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을 보류한 상태이기 때문. 또한 분묘와 석물 등 역시 발견 이후인 196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강감찬 묘는 정확히는 '전(傳)' 강감찬묘인 셈이다. 대신 당시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 주기는 했었다고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사항은 여기 참고. 2014년 7월을 기점으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흥덕구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참고
여담이지만, 강감찬의 출생지라는 서울 낙성대 근방이 현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보라매 공원이다. 그런데, 이전된 장소도 이번에는 강감찬 묘역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어, 만일 사실로 확인된다면, 공군과의 인연이 기가 막히게 연동되는 셈이다.
7 이름에 대해
7.1 강한찬?
'邯'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설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자면 감자는 일본식 한자독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된 셈인지 한이 계속 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의 수도 한단(邯鄲)의 한은 한으로 읽으면서 강한찬의 한은 감으로 읽는 것이 오류라는 것. 또다른 근거로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나라 장군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강감찬'이라고 읽는 것이 일본어의 잔재라는 주장은 낭설. 그냥 흔히 알려진대로 '강감찬'이라고 읽으면 된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엄연히 강감찬으로 나온다. 한국에서는 형성자의 제자 원리에 따라 좌측에 있는 甘(달 감)자에서 음을 취해서 '감'으로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때문에 강감찬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쪽을 참고해 보는게 좋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는, 중국의 자전에서는 邯의 발음을 'ham'이나 'han'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병음으로는 hán이다. 邯은 일본 한자음으로는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기 때문에 언듯 보면 그럴듯해보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일본 한자음에서 /k/가 중고중국음의 /k/와 일대일대응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옛 일본어에는 /h/ 발음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의 /h[14]/ 발음을 /k/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15] 심지어 당시 曉모의 발음이 연구개음이었다면 음성적 유사성까지 맞아떨어진다.
더욱이, 한국 한자음의 관점에서 봐도 이 논리의 문제는 드러난다. 일단 한국 한자음은 중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당연히 중국어 원음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니기에 중국어 발음과 같지 않다. 그리고 음부인 甘에 이끌려서 잘못 읽던 게 전해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灣을 비롯해서 이런 사례 많다).
사실 이 설에서 가장 큰 오류는 대조하는 중국어가 중고한어가 아닌 현대 관화라는 것이다. 중고한어에서 邯은 匣모로, 상고 및 중고한어에서 [ɣ]의 음가를 가진다(상고음 검색기). 현대에 hán으로 읽는 건 匣모가 曉모로 흡수되었기 때문.
여담으로 애당초 匣모에 속하는 한자는 한국 한자음에서 ㄱ과 ㅎ으로 제각각 갈라졌기 때문에 ㄱ이냐 ㅎ이냐는 별로 논할 필요도 없다(동국정운에서는 ㆅ을 만들어 이런 차이를 교정하려 했다).
다만, 강감찬의 이름에서 邯을 '감'으로 읽는 것의 영향으로 인해 한단이나 장한(혹 장함이라고도 함)을 '감단', '장감'이라고 하는 오류가 심심찮게 나온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그 외에는 '한', '함'인데, 정작 법원이 정한 인명용 한자로는 '감'만을 음으로 지정해놨다.
7.2 姜邯贊과 姜邯瓚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에 부수자인 구슬옥변이 있느냐 없느냐의 사소(?)한 차이다.
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贊이라고 쓴 게 일반적이지만 姜邯瓚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 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ㅡ<정조실록> 정조 20년 7월 21일
姜邯贊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瓚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 "고려사에서는 구슬옥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 금주(衿州)는 훗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주(州)'자가 들어간 고을 이름을 대거 '천(川)'으로 개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관악구 옆에 있는 금천구의 '금천'이 바로 이것.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서염윤→서희, 이인저→이규보, 최난→최충헌, 정몽란→정몽룡→정몽주 등.
- ↑ 흔히 알려져 있는 금천 강씨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이기 때문에 붙인 분파의 이름이다. 금천강씨는 진주강씨의 5대파(은열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인헌공파) 중 인헌공파를 말한다. 그러므로 금천강씨는 진주강씨와 다른 성씨가 아니라, 진주 강씨의 세파 중의 하나이다.
- ↑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이 일족의 사람 강진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 원문은 '좌임(左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왼쪽으로 옷깃을 여민다'는 뜻이다. 원래 이 표현은 '피발좌임(被髮左衽)'이라 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가 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을 평가한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에서 유래한다.
- ↑ 사실 이 정도의 전쟁 지휘는 예나 지금이나 순식간에 수명을 깎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무이다. 모 장관님 말마따나, 전쟁은 일선에서 뛰는 병사들에게나 그들을 지휘하는 장군에게나 절대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최고위 지휘관(ex : 제갈량, 이순신, 2차대전의 주요 장군/제독들)들이 한결같이 급격하게 크고 작은 몸/마음의 병을 얻고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점도 알아두자.
- ↑ 이 때 사람들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양산을 주고 양산을 펼친 사람들을 도열시켜가면서 성곽을 어떻게 세울지를 구상했다고 한다.(고려사열전 왕가도)
- ↑ 여담이지만 동시대에 송나라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포청천도 이 별의 화신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황과 촉나라 책 이야기도 있고.
- ↑ 그래서인지 90년 초반 나온 어느 위인전에서는 곰보에 키작은 얼굴로 그렸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얕봤다가 그의 말빨이나 기개에 데꿀멍했다고 나오는 묘사가 많다.
- ↑ 천추태후 전에 인기를 끌었던 KBS 사극 <대조영>이었고, 이덕화 씨가 여기서 맡은 설인귀 역이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사실상 자기가 죽인 아들과 며느리를 정치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강씨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과정에서 강감찬이 안장된 묘소까지 1063년까지 찾지 못 하게끔 만들어놓은 인조역을 맡아 역사개그가 터질 떡밥이 완성되었다.
- ↑ 광교 수변공원으로 이전되었다고 하나 확인바람.
- ↑ 본래 청원군 지역이었으나 2014년 7월 1일부터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어서 청주시 소속이 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청주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 ↑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년) 9월 9일,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년) 2월 6일. 다만 선조와 광해군의 지시는 강감찬 뿐만 아니라 김유신이나 김양, 정몽주 등 이전 왕조 명신들의 묘에 신경을 더 많이 쓰라는 의미로 내린 것이다. 근데, 그게 다 자기한테는 열폭을 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을 가리고 싶어하는 억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 학자에 따라서 x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참고로 현재는 관화에서는 x, 광동어에서는 h로 발음한다.
- ↑ 현대 일본어의 /h/ 발음은 옛 일본어에서 /p/ 발음이었고, 이 /p/ 발음이 /ɸ/ 발음을 거쳐 /h/ 발음이 된 것이다. /p/ 발음의 잔재는 촉음(っ)이나 ん 뒤에 남아 있고, /ɸ/ 발음의 잔재는 ふ의 자음에 남아 있다. 순음퇴화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