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

이 문서는 고려와 거란의 전투에 관한 것입니다. 고려와 몽골 제국의 전투에 대해서는 귀주성 전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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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기록화

여요전쟁 중이던 1019년 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龜州)[1]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귀주 대첩
날짜
1019년 2월
장소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군) 동쪽 근교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고려거란
지휘관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소배압
야율팔가
해리†
고청명†
아과달†
작고†(모두 요사에서 발췌)
병력불명(20만 전후)불명(10만 이하)
피해 규모불명지휘관 4인 전사
천운군, 우피실군 궤멸
결과
고려군의 승리
기타
고려와 거란 화의 맺음. 여요전쟁 종결.

1 소개

오늘로 치면 베테랑 장군이 행정직 공무원들에게 제대로 망신을 당한 전투[2]

1018년 12월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끌고오자, 이듬해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보병 기병 총 20만 8000명을 이끌고 북진, 거란군을 크게 격파했다.

숫자만 봐서는 20만으로 10만을 격파한게 뭐가 대단하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거란의 10만은 거의 대부분이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로 이루어진 정예들이었고, 고려군은 있는거 없는거 다 쏟아부은 상태였다.[3] 이런 상황에서 매우 적은 손실로 적을 괴멸시킨 전투였으므로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하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지향해야 할 것이고, 이는 손자병법에도 나와있는 유서깊은 전략의 기본이자 기본이다. 소수의 적으로 다수의 적을 이기려드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역관광당할 확률이 더 높다. 불리한 여건에서 승리해야 명장이란 생각은 영웅주의의 발로일 뿐이다.[4] 유목민 기병 10만이라면 고려군이 불리한거 맞을지도

쉽게 생각하자면 적의 정예 원정 전투부대 10만여명을 전멸시킨거다. 그것도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이...[5]

2 흥화진 삼교천 전투

귀주대첩을 두고 '수공으로 이긴 전투'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사실 이 전투는 귀주대첩이 아니라 흥화진 동쪽을 흐르는 하천인 삼교천(三橋川) 전투이다. 흥화진은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근교이고, 귀주대첩이 벌어진 귀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니 전혀 다른 곳이다. 그나마 흥화진 전투의 수공도 거란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강하는 거란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6]. 그래서 수공 직후 강감찬은 1만 2천의 기병대로 대열이 흐트러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강감찬 위인전에서 다른 전투보다 이 수공 장면에 초점을 두다 보니 '강감찬=수공=귀주대첩'이라는 공식이 생겨 버린 셈. 살수대첩을지문덕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오해(?)를 받고 있다. 수공을 안 쓴 것은 아니지만 당시 토목기술로는 적들을 수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수공을 할 수 있는 대형 둑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현재의 토목기술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발목 높이의 물을 일순간 흘려보낸 것. 물론 어지간한 사람은 이 정도의 급류에도 자빠지고 나뒹굴기 일쑤이기에 이 정도로도 적을 당황시키고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데에는 충분하다. 범람 등으로 인해 발목 깊이의 물이 지속적으로 쇄도한다면 실제로 매우 치명적이기도 하니 둑으로 일시적인 격류를 만든다고 얕볼 게 아니다. 쓰나미 항목 참조.

설령 둑을 쌓아 물을 막았다 해도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 물이 빛도 아니고 둑을 터뜨린다고 해서 바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이밍 맞추기 쉽게 도하지점 인근에 둑을 설치했다가는 정찰병들에게 발각되기 쉽다. 도하하는 도중이 가장 취약할 때임은 건너는 사람들도 알기 때문에 매복이나 기타 함정을 확인하느라 도하 전에 인근을 샅샅이 정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둑이 도하지점에서 그리 가까웠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둑이 크면 무너뜨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떠내려가 익사할 만큼 많은 양의 물을 들키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터뜨리기란 요즘 기술로도 불가능에 가깝다. 당하는 쪽이 알고 맞춰서 당해준다면 모를까. 정리하자면 수공은 거들 뿐 진짜 거란군을 제압한 것은 고려군이 맞다.

3 소배압의 진격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배압의 질풍같은 기동 때문에 개경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고려는 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시행된 청야전술로 인해 요군이 가는 곳은 집 한 채, 쌀 한 톨 없는 무인지경 뿐이었고,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저곳에 짱박힌 별동대를 계속 보내 요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계속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에서는 조원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고,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했다. 동북면(함경남도)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진다.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당시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가졌다.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만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위협하였다.

이렇듯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소배압은 2차 여요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까지 도착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여몽전쟁 때의 몽골군에게도, 병자호란 때의 군에게도 고려와 조선은 각각 이렇게 패배를 당하였다.[7]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만든 요새) 외엔 마치 핵폭탄이라도 맞은듯 쌀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새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병력들 뿐이었다(...). 아~ 소배압 선수, 본진을 못뚫고 마네요 힘들게 오버로드 폭탄드랍하러 본진까지 왔더니 있는건 포토캐논밭&리버&템플러...

한 달 남짓 개경 근교에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받으며 보급난에 시달리던 소배압은 결국 개전 이듬해인 1019년 2월,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2차 여수전쟁을지문덕살수대첩 때 우중문에게 라도 한 수 선물했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을 곱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려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그리고 소배압이 요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귀주(龜州)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4 귀주대첩

강감찬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려군을 전략적 길목인 귀주로 집결시켰다. 그러나 김종현의 1만 병력은 이 때 무슨 이유인지 아직 도착하지 못 했다. 이들이 빠진 채 결전을 시작해야 했던 총사령관 강감찬은 매우 초조했겠지만, 이 변수도 결국 승리의 여신이 고려군에게 선사한 미소가 되었다.

그동안 전력에 그토록 타격을 입었음에도 명색이 요나라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인 소배압의 통솔력이 상당했던 듯하다. 그렇게 남진과 퇴군을 거듭한 군사임에도 손실도 거의 없었고, 마지막 회전(會戰)을 예상이라도 한 듯, 거란군 10만은 포진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 20만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그대로 전투에 돌입, 운명의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지게 된다. 귀주성 앞쪽으로는 두 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그 뒤쪽으로 구릉지대가 있는데 휘하 장군들은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하천 두 개를 건넌 뒤에 공격하도록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가 이에 반대하였고 소배압도 이에 따르면서 거란군은 개천 하나를 등 뒤에 두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이른바 배수진이다.

양측 병사들이 끊임없이 피를 쏟은 대혈투는 며칠 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거란군이 두 달 가까이 굶주리고 지치고 다쳤음에도, 드넓은 대륙에서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거란의 최정예다운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교과서위인전에서는 간략히 기술하느라 무기력한 군대처럼 그려지지만... 무기력한 군대라면 그 초단기간에 적국의 수도까지 들이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양측의 혈투가 절정에 달할 때 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10만 거란군 등 뒤에 별안간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 늦은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똥 싸다가길을 좀 헤매는 바람에 늦었다는 설도 있는데, 여하튼 이렇게 장대하고 정교한 전략을 총지휘한 강감찬이 이런 타이밍까지 의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한 출현은 통신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쉽지 않고, 또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가급적 해서도 안 된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자칫 대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김종현의 1만 병력이 후방에 나타나자 전방의 고려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거란군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워털루 전투프로이센 그리고 김종현은 30만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으로 주저없이 돌격해 들어간다. 쌍방간 주력이 격돌하는 대회전에서는 조그마한 변수도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데 1만쯤 되면 작은 변수도 아니다. 더군다나 김종현 부대는 거란군의 추격이 목적이었으므로 기병 위주의 편제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펠렌노르의 로한 거란군도 김종현 부대의 등장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고려사

거기에 그 순간 풍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동시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적벽대전? 당시 계절상으로는 북풍이 부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일시적으로 계절풍이 아닌 역풍이 부는 경우가 있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강감찬이 예측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당시 장수들의 필수 요건 중 하나가 기상 관측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72세)를 생각하면 오랜 경험과 치밀한 사전 정보수집으로 이 현상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기상 이변까지 나타나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간 반면 거란군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여버렸다. 고려군이 남쪽에, 거란군이 북쪽에 포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군에게는 순풍이, 거란군에게는 역풍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낱 바람이 병사들의 사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돌격하는 기병을 막는 과정에 있다. 진형 전방에 창병이 버티고 선 후, 그 뒤에 궁수들이 열을 지어 화살을 쏘아 올려 기병의 돌격을 일차로 저지하고[8] 돌격력이 죽은 기병을 중무장한 보병창병이 막아내는 것이 정석이다. 거란의 주병력은 역사상의 유목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듯 궁기병 위주였을 것인데, 돌격 전에 사격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당연한 일. 문제는 비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불어재끼니 풍속이 대단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강력한 역풍을 맞는 공자 입장에서 화살을 쏴봐야 공중에서 흔들거리다 툭툭 떨어지게 되거나 맞아도 큰 피해를 주기 어렵다. 아무리 못해도 순풍을 받는 화살이나 바람이 없는 상황에서의 화살보다 약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안 그래도 김종현 부대의 강력한 뒤치기로 멘탈이 흔들거리던 거란군에게는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거란군의 전위는 천운군과 우피실군이 맡았고 우피실군은 황제군 5위의 하나로 6만 병력을 보유한 정예군이다. 그런데 이 우피실군이 고려군의 돌격에 무너졌다. 배수진을 쳐둔 상태라 진형을 재정비할 수 없었고 이내 무너져서 퇴각하는데 이 때 강민첨의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盤嶺) 벌판으로 몰아넣었다. 추격부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므로 도망치기에는 최악인 곳으로 내몰린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거대한 포위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포위섬멸전이 그러하듯, 거란군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10만 거란 병력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다. 소배압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지만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이 4명이나 죽었을 정도로 고위 계층의 손실도 컸다. 요사에 기록된 이 때 전사한 지휘관은 천운군 상온 해리, 발해상온 고청명, 요련상온 아과달, 객상사 작고이다.

이 때 전사한 대장 중에 '발해상온'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고청명'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직함에서 보듯 발해인 출신 부대의 대장이었다. 발해인 부대도 상당수가 이 전쟁에 참전했다.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공격할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란군 소속 발해인 병사고려군 소속 발해인 병사 간의 접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족상잔이었던 셈. 참고로 고청명이 전사한 후, 그 가족들은 거란에서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나 크게 이겼는지 <고려사>에서는 이날 죽은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포로와 전리품은 산더미였는데, 우리가 거란과 맞짱 뜬 이후 거란이 이렇게 쳐발린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조차 '다하(茶河)와 타하(蛇河)의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캐발렸다'고 솔직하게 자백(?)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전쟁사의 주요 전투로 올리기에도 손색이 없는 대승 중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이 때까지 수많은 야전/회전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군을 크게 발라버린 이 싸움이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 대첩'이다.

5 전투 이후

이 전투 이후 거란은 두 번 다시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지 못했다. 거란 성종은 머리 끝까지 열받아서 소배압의 머릿가죽을 벗겨버리겠다며 날뛰었지만 차마 친인척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던지 진짜 그렇게 하지는 않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9] 훗날 덕종 때인 1033년 거란군이 정주까지 쳐들어오는 등 소규모 전투가 몇 번 있었지만, 이 또한 고려군이 금방 격퇴하면서 상황 종료. 덕종 항목과 여요전쟁 항목 참조.

그리고 이렇듯 초기의 기선제압, 청야전술, 수도방위와 지속적인 견제, 마지막 회전으로의 유도와 포위섬멸로 이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하게 진행된 3차 여요전쟁 전체의 전략/전술을 총지휘한 사람은 강감찬이었다.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이때 현종이 직접 나아가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지.누구랑 참 비교된다. 그리고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과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한 마디로 국가를 구원한 '영웅'이 된 것.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고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 등 방어에 신경쓰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전성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6 기타

귀주라는 지역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200여년 후 몽골 제국군이 쳐들어왔을 때 귀주성에서 귀주성 전투 또한 벌어진다.

7 미디어 믹스에서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약 5분이 안되는 정도로 나온다.

거란군이 대군을 이끌고 오는 모습, 강감찬이 고려군에게 연설하는 것이 끝나면 물가가 있는 땅에서 양 군에서 기병이 먼저 격돌하는 모습이 나오며, 양 군의 보병도 격돌하면서 고려 측에서는 보병은 함정이 있는 지푸라기가 덮힌 지점에 대기한다. 거란 측의 보병이 함정에 빠지자 고려측 궁병이 멀리서 오는 거란군을 활로 쏴 죽이며, 고려측 보병은 함정에 빠진 거란군을 죽인다.

이어서 다른 곳에서는 궁병이 지푸라기 벽이 있는 곳에 불화살을 쏴서 거란군을 혼란시키고 고려 측 보병이 거란 측 보병을 공격하며, 상황이 불리하자 소배압의 부하가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하자 소배압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고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

  1.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귀주성 유적은 지금도 있다. 다만 이 대첩은 귀주성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2. 강감찬 장군은 분명 문관이시다. 다만 문관을 오늘날의 행정직 공무원과 똑같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당시의 문관들은 평시에는 경제, 행정 등의 국가 대사를 처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전시에는 최고 수뇌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실제 전쟁을 지휘했다. 즉 병사들과 최전선에서 무술을 발휘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무관이고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문관이라는 뜻이다. 첨언하자면 무관들만 병서를 공부한 것은 아니고 문관들 역시 과거의 사례를 참고해 가면서 병서를 공부했다.
  3. 당연한 말이지만, 침공군은 적국으로 공격을 가는 상황이므로 최정예부대로 공세를 펼치는 거지만, 방어군은 말 그대로 창만 들 수 있으면 모조리 소집해서 막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숫자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컷고, 병종 또한 보병과 기병의 차이는 매우 크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일반 보병과 기갑 부대 정도의 차이만큼 나는 셈.
  4.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총전력 면에서 명백히 열세였지만, 충무공 이순신은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만큼은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지형지물 등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웠고, 그 결과가 우리가 아는 전승신화다.
  5. 참고로 20세기에 기관총등 대량살상병기가 등장하고,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의 육전은 생각보다 전사자가 적었다. 현대의 대한민국 육군만 하더라도 30% 전투불가(전사가 아니다!)를 전투력 소멸취급해서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있다. 그러니 총기도 등장하지 않은 중세의 전투는 전투과정에서는 전사자가 적고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망자가 나왔고, 질병 등 비전투 손실로 더 큰 피해를 낳게된다. 야전병원이란 개념의 등장으로 나이팅게일이 위인전에 실릴 활약을 한게 19세기다! 거기에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에, 오히려 전투에 패배하여 흩어진 전력이 전사자보다 많은 게 이 당시의 전투였다.
  6. 종아리까지 차는 시냇물 건너는 것도 시냇물의 유속이 빠르다면 은근히 힘들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물이 빠르게 흘러온다면 갑자기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도강하던 병사들의 진형도 당연히 흐트러지게 되며, 아직 도강하지 못한 병사들은 더 높게, 더 빨리 흐르는 물을 건너야 하므로 도강이 늦어지게 된다. 그래서 도강을 이미 마친 병력과 그렇지 못한 병력이 일시적으로 분단되며 제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7. 일찍이 거란은 난공불락의 발해 요동방어선을 우회하여 수도인 상경을 급습 포위하여 전쟁개시 11일만에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킨 적이 있다.
  8. 최전방에서 궁수들이 쏘아붙인 후 창병들이나 대기병용 장해물 뒤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9. 소배압은 성종의 모후인 승천태후 소씨의 조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