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7대 목종 왕송 | ← | 8대 현종 왕순 | → | 9대 덕종 왕흠 |
묘호 | 현종(顯宗) | |
시호 |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 |
군호 | 대량원군(大良院君)[1][2] | |
능묘 | 선릉(宣陵) | |
성 | 왕(王) | |
휘 | 순(詢) | |
자 | 안세(安世) | |
배우자 | 원정왕후(元貞王后), 원화왕후(元和王后),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용왕후(元容王后), 원목왕후(元穆王后), 원평왕후(元平王后) | |
아버지 | 왕욱(王郁)[3] | |
어머니 | 헌정왕후(獻貞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992년 7월 1일 ~ 1031년 5월 25일 |
양력 | 992년 8월 1일 ~ 1031년 6월 16일 (38세 10개월 15일) | |
재위기간 | 음력 | 1009년 2월 3일 ~ 1031년 5월 23일 |
양력 | 1009년 3월 2일 ~ 1031년 6월 16일 (22년 3개월 14일) | |
출생지 | 고려 개경 헌정왕후 사저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
1 개요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충
자왈, 임금이 하늘의 뜻만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법을 어기면 하늘의 뜻을 이어 받았다고 해도 곧 그것을 잃게 되는 법이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이제현
고려의 제8대 임금. 고려의 전성기를 연 명군이자 고려 왕실의 중시조. 그리고 한반도 유일의 사생아 출신 군주.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으나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그나마 부계, 모계 모두 왕족 출신이라서 망정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다. 효공왕이나 우왕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이쪽은 각각 진성여왕과 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인정해 주었고 현종처럼 빼도박도 못하는 사생아는 아니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혈통상으로는 오히려 그만큼 강력하고 유리한 사람도 드물었는데, 황주를 기반으로 하여 개성 및 그 인근 호족들을 대표하는 헌정왕후의 혈통과 경주를 비롯한 그 인근 지방의 신흥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기 쉬운 과거 신라 왕실의 피를 받은 왕욱의 혈통을 받았으니 양측의 지지를 받기도 그만큼 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헌정왕후가 왕욱과 제대로 재혼을 한 뒤에 현종을 출산했다면 그의 정통성은 역사상 최강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왕건의 13번째 아들 왕욱과 천추태후의 동생이자 경종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위 전 군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이 명칭이 오늘날 합천을 가리킨다고 한다. 당시 고려 왕자들의 군호가 외가의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된 점으로 미루어 이례적인데 이 군호는 부친인 안종 왕욱의 외가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생아로 태어난데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끝에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난을 극복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이다. 인생역전 테크를 탄 왕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미천왕과 이미지가 겹친다.
그리고 이 사람 이후의 고려 왕들은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고려 왕실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임금. 성종의 딸이 현종의 부인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지만 원정왕후 소생은 없고 원화왕후 소생으로 효정공주와 천수공주 밖에 없기 때문에 태조 왕건의 아들들중 광종에서 시작된 직계 왕통은 사실 목종대에서 끊어진 셈이다.
2 출생의 비밀
그의 아버지 왕욱은 왕건의 13번째 아들이며 현종의 할머니이자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다. 그래서 혈통으로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혈통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진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조카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혼인이 아니라 불륜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선왕의 왕비이자 현 국왕의 여동생으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적인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외간남자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왕의 왕비가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덧붙여서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의 관계 때문에 친척 관계가 꽤 꼬인다. 모계만 보면 목종의 사촌동생이지만, 부계만 보면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라서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의붓아버지는 생략하자.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누나가 된다. 막장 드라마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극적인데,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빨리 가서 물어 보도록 하여 그 까닭을 알아 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왕욱을 멀리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으로 귀양보내 버렸다. 이 때 헌정왕후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진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죽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그래도 아기에게 죄를 묻기는 뭐했는지 성종이 궁궐로 데려와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켰다.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 그가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그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주고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출생의 비밀 돋네 이로 인하여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상봉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부자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만다.
3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성종도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 선왕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왕건의 손자인데 혈통으로 따지면 50%가 왕건의 피를 이어받았다. 부모가 아닌데도 개족보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목종의 어머니이자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한 뒤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이후로도 수차례 살해 시도를 하였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종을 후계자로 삼을 뜻을 품고 있었던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승려 '진관(津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一條流出白雲峯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萬里蒼溟去路通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아라 莫道潺湲巖下在
머지 잖아 용궁에 다다를 물이니까. 不多時日到龍宮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小小蛇兒遶藥欄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滿身紅錦自班斕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하지 말라 莫言長在花林下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을 테니. 一旦成龍也不難
《고려사》 세가, 현종 총서
진관사. 현재는 대부분 근대에 재건축된 건물들이라서 고려 시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
여담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 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 [4]
4 여요전쟁과 내정 정비
그러나 왕이 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요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것이다. 결국 현종은 그의 치세에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 항목 참조.
2차 때는 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 강조가 30만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하였다. 초반엔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요 성종의 군대에 패배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하고, 현종은 호남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것도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의 갖은 행패를 당했다. 호종했던 지채문의 활약으로 딱히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다음 왕조인 조선과 비교해볼만한 대목. 되려 깽판을 쳤으면 쳤지 당하진 않았다 이 와중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대단히 피로가 쌓인 상태였고, 양규와 김숙홍 등의 게릴라 전법에 말려들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더 난장판을 만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3차 때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잡고 왕재로서의 재능이 개화, 앞서의 치욕을 잊지 않고 방비를 튼튼히 해서 잘 막아냈다. 거란군 주력이 개경 100여리 밖까지 어택땅접근해온 상황이라 위기를 맞았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그러나 강감찬이 동북면의 방어를 수행중이던 기동대 3천3백을 개경으로 급히 이동시켜 방비를 강화하고 김종현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소배압의 후방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는 극단적인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민가 하나, 개 한 마리까지 소개시킨 상황이었고 현종 역시 개경의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켰던 데다가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백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백 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킨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좀 섬뜩한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이 1백 기가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다.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이다. 따라서 저 1백 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면 진짜 섬뜩해진다.
어쨌든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개경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고, 보급선이 단절되어 방위군과 추격군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한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이었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귀주 대첩이었다(...).
이렇게 거란의 침입 와중에도 내치적으로도 많은 일을 하였는데, 우선 이 무렵까지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제대로 정비하고 호족세력을 억눌러 안정화 시킨 다음[5]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동북쪽에서 소란을 피우던 여진족도 격퇴해가며 회유해 나갔다. 이런 조치가 효과가 있어 현종 말년에는 고려에 귀순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는 여진 부족이 늘어갔다.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법력으로 이겨내려고 만든 것이 <대장경>이다. 당시 송에는 억불정책이 지나쳐서 많은 불교경전을 불태워버렸는데 나중에 송은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정에는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높은 문화수준이 있었던 것이다.
현종은 이렇게 고난 끝에 왕이 되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고 지방행정체제를 재정비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오랜 고생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나치게 지쳐있던 탓인지 안타깝게도 40세의 나이로 일찍 숨을 거두었다.
5 원조 무신의 난 - 김훈 최질의 난
특히 현종 대의 최질과 김훈의 난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대를 증강시키는 과정에서 국가에서 지급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중앙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농봉)로 돌려버렸다. 때문에 2차 거란 침입을 맞섰던 무신들을 엿먹여버렸다.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이 2차 거란 침입에서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 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게다가 중앙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 빨게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1012년 그러니까 반란 2년전에 요성종은 강동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는 이미 거란과 산발적인 전쟁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1011년, 3차는 1018~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도 피해를 많이 입기는 했지만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하나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졸한 병크가 따로 없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최질과 김훈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 뺏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현종이 이자림(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왕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다음에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잡아 죽이면서 싱겁게 끝이 났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비중이 작은 사건이다. 애초에 원인이 그 따위라서 언급하기도 뭐한 사건이지만.
또한 이런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현종은 뒷수습을 잘 했다. 19명 이외에 가족은 하나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나라에 무신이 없어서 문신인 강감찬이 활약해야만 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 애당초 고려나 조선이나 전쟁의 총사령관이나 주요 지휘관은 문관이었다.[6] 또한 이 일 이후 무관에 대한 예우도 격상시켜서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만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거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해야 하고 리스크도 꽤 큰 대대적 조치이다. 더군다나 전란 중이라 재정 상태도 그렇고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조치를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 줄만한 대목이다. 덧붙여 오늘날의 국가 기념일인 현충일은 거란전쟁 전몰자에 대해 24절기중 하나인 망종에 제사를 지내던 전통을 감안한 것이다. 달력을 보면 현충일과 망종이 같이 써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인 것.
6 평가
일생 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으나 이것을 모두 극복하고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연 중흥의 군주로, 고려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다. 당대인물이었던 최충은 주나라의 성강지치와 한나라의 문경지치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다고 평가했고, 고려 말 이제현은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했다. 무엇보다 현종이 3차 여요전쟁에서 적의 침공이 있음에도 꿋꿋하게 도성에 남아 수비에 임전했던 점은 한국 역사상 드문 일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결과적으로) 외교 실패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을 하게 만든 왕이라는 평가도 있고, 2차 침입에서의 몽진이나 할 때의 안습한 모습이라든지 전후에 무장들을 죽인 일도 있어서 흠잡을 수 없는 왕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7]
다만 2차 침입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현종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당시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는데 강조가 고려군 주력부대를 데리고 나가 싸우다가 박살이 난 상태라 현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화려해보이는 전쟁보다는 겉멋은 떨어질지라도 전쟁을 딛고 국가를 발전시킨 공이 크다. 정치, 외교 면에서는 사실상 전왕인 목종과 천추태후의 실책을 떠맡았다는 점과 갑자기 왕위에 올라 정권 기반이 취약한 편이었다는 점에서 위에 대한 비판에 대해 충분히 옹호가 가능하다. 특히 2차 침입 때 몽진을 가지고 현종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때 몽진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감찬이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는데 강감찬만 홀로 몽진을 주장했고 현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어쨌든 고려의 국력 신장을 이끌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며 그의 아들 세 명이 왕이 되는 기염을 토하는데(덕종, 정종, 문종) 아들들도 명군이 되어 모두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세 아들 간에는 형제상속으로 이어졌고 넷째인 평양공 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고려는 예종,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인종시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렸다. 문종의 세 아들(순종, 선종, 숙종)과 인종의 세 아들 (의종, 명종, 신종)도 줄줄이 왕이 되었으나 그다지 좋지 못한 경우이다. 앞서 태조 왕건의 세 아들인 혜종-정종-광종도 그리 모범이 될 만한 사례가 아니다. 비록 요절이 원인이었지만 고려에서는 현종의 세 아들들이 줄지어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받아 성군이 된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려의 전성기를 연 임금. 또한 목종 대에서 사실상 끊길 뻔한 직계 왕통을 이어받고 후대 왕들의 맥을 이어줬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로 고려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임은 틀림없다.
삼국지 최후의 승자인 사마염과 자(字)가 같다. 둘 다 자가 안세(安世). 그러나 군주로서 현종 쪽이 비교가 미안해질 수준으로 넘사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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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풍군 중서면에 있는 현종의 선릉(宣陵). 능역 앞은 옥수수밭이다. 그래도 현종의 선릉은 고려 왕릉 중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7 사극
미천왕과 마찬가지로 별로 각색을 안 해도 사극화하기 안성맞춤인 서사구조를 가진 임금인데도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는 임금. 출연한 드라마는 하나 있긴 했지만 주역도 아니었었고 드라마도 안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종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면 그의 인생은 RPG형 사극'성장형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극에 딱 맞다.
- 1) 불륜관계로 출생
- 2) 권력 다툼으로 궁에서도 쫒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 3) 복귀하여 고려 황제로 즉위
- 4)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 5) 고려의 태평성대을 열어제침
어쨌든 천추태후에서의 현종 역을 맡은 배우는 성인 배역 김지훈. 특이하게도 현종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는 3명이었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은 김호진이었고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신애가 출연했었다. 불륜 출생이나 초반의 고난은 묘사되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극의 주역이 천추태후다 보니 그리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신혈사로 가게 된 것도 천추태후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묘사되며 김치양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주지 스님이나 강감찬 등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다.
즉위 직후에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 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극의 마지막을 장식. 하지만 거란전쟁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 되어버린 탓에 현종의 대거란전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8 같이 보기
- ↑ 오늘날 합천군을 가리킨다.
- ↑ 신혈소군(神穴小君)
- ↑ 시호는 사후 현종이 추존한 안종 헌경효의대왕(安宗 憲景孝懿大王)이다.
- ↑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 ↑ 호족세력을 안정화 시키고 군현제를 설립한 것이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에는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 ↑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명원과 권율도 문관이었다. 수군을 총지휘했던 이순신이 다소 특이 케이스였던 셈. 이순신이 역임했던 삼도수군통제사는 이 때만해도 정3품 수군절도사와 동급의 별정직이었으나, 임란 이후 종2품 관찰사 및 병마절도사와 동급의 상설직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 역임 당시 이순신은 이미 정2품 정헌대부 문반품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지휘권을 행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 ↑ 박종기,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고구려연구재단2차국내학술회의", "고려국왕책봉연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