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욱

남진의 역대 황제
3대 폐제 임해왕 진백종4대 고종 선황제 진욱5대 후주 장성공 진숙보
묘호고종(高宗)
시호효선황제(孝宣皇帝)
연호태건(太建, 569년 ~ 582년)
진(陳)
욱(頊)
소세(紹世)
생몰기간530년 ~ 582년
재위기간568년 ~ 582년

1 소개

진욱(陳頊 530년 ~ 582년, 재위 569~582)

재위 기간 동안 태건(太建)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선황제(宣皇帝).

2 개요

중대통 2년(530년) 7월 진도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진천의 친동생이다. 는 소세(紹世), 아명은 사리(師利)이다. 진욱은 너그럽고 총명했으며 키는 8척 3촌이고 용모와 풍채가 좋았다. 또 용감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3 초기 활약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 그의 숙부 진패선이 자신의 아들 진창(陳昌)과 함께 그를 강릉으로 파견했고 직각장군, 중서시랑에 임명했다. 하지만 승성 3년(554년), 강릉이 서위에 의해 함락되어 진창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다. 진패선은 즉위한 후에 두 사람을 돌려 달라고 여러 차례 북주에 청원했으나, 북주는 허락만 하고 석방하지 않았다. 영정 원년(557년), 멀리서나마 시흥왕을 거쳐 안성왕에 책봉되었다. 천가 3년(562년), 결국 건강으로 돌아와서 시중, 중서감, 중위장군에 임명되었고 양주자사가 되었고 천가 6년(565년) 4월에는 사공으로 승진했다. 진욱은 벼슬이 높았고 진천의 친동생였으므로 권세가 대단했다. 직병 포승예는 진욱을 믿고 불법 행위를 했는데 어자중승 서릉이 진욱을 탄핵했다. 이에 진욱은 전상에서 형 진천을 모시고 서 있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낯빛이 변했고 그 일로 분노한 진천에 의해 시중, 중서감에서 해임되었다.

4 조카를 보좌하며 실권을 잡다

천강 원년(566년) 3월, 진천이 위독해지자 그를 불렀는데 진욱은 태자 진백종이 나약한 것을 걱정했다.

짐은 태백(太伯)의 일을 본받을 생각이오. 그러니 경이 이 자리를 대신했으면 하는데..."[1]

그러나 진욱은 눈물을 흘리면서 강력하게 거절했고 결국 유사지, 도중거와 함께 진백종을 보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유사지와 도중거는 궁중 내에서 정사를 처리하고 진욱은 측근들을 데리고 상서성에서 정사를 처리했다. 5월, 진욱은 표기대장군, 사도, 녹상서사가 되어 중외의 제반 군사를 관장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욱의 지위, 위망, 권세가 조정 내외에서 높고 커졌다. 유사지는 이를 시기하여 상서좌승 왕섬과 함께 진욱을 외지로 보낼 음모를 꾸몄다. 진욱은 이를 알면서도 병을 핑계로 유사지를 불러 얘기하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태후와 진백종에게 사람을 보냈다. 태후와 진백종은 각각 "내가 한 게 아님, 난 모름"이라고 말하자 유사지를 감옥에 가두고 옥중에서 죽음을 내렸다. 또 도중거와 우위장군 한자고[2] 등도 죽이고 조정의 모든 대권을 손에 넣었다.

5 조카를 폐위하고 황제가 되다

진백종의 친동생 시흥왕 진백무가 이에 불만을 품고 악담을 퍼붓자 광대 2년(568년) 11월, 태황태후 장씨의 명으로 진백종, 진백무 형제가 유사지와 공모했다고 모함하고 진천의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진백종을 임해왕으로 폐하고 진백무를 온마후로 폐했다. 진백무는 금방 제거했으며 진백종은 570년 사망했는데 정황상 그도 죽음을 당한 걸로 보인다. 이듬해 정월 황제에 즉위했으며 태건 5년(573년) 3월, 진욱은 북제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진천장군 오명철에게 10만 명을 이끌고 토벌하도록 했는데 계속 승리했다. 태건 7년(575년)에 이르러 회하 남북의 영토를 모두 수복했으나, 태건 9년(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2월, 진욱은 다시 오명철에게 3만 명을 이끌고 수양에서 사수를 건너 북주의 팽성을 포위하게 했으나, 북주 군대에게 전멸되고 오명철도 포로가 되었다.

또 태건 11년(579년) 9월, 북주군이 회남을 공격하자 결국 장강 이북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으며 태건 13년(581년)에는 양견이 북주의 우문천(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세우고 북주를 멸했다. 이로 인해 진욱은 실의에 빠져 병을 앓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 진욱은 재위 14년만에 53세의 나이로 건강 선복전에서 사망했으며 2월, 현녕릉에 안장되었다.

6 여담

선제이자 친형이었던 진천도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나약한 진백종을 걱정해서 눈을 감을 때까지 편안하지 못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조카 진백종을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진욱도 자신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진숙보 걱정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진백종은 단순히 나약한 인간이었고 북에서는 북주와 북제가 대립하여 외정에서는 큰 위험이 없었으나, 진숙보가 즉위할 때는 북주가 북제를 멸한 후 수나라가 찬탈하여 한창 진나라를 노릴 때였다. 진숙보 자체도, 의외로 그다지 어리석진 않았으나 통치 자체에 관심이 없는, 진백종보다도 심각한 인간이었다.
  1. 태백은 주무왕의 백부를 말한다. 무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는 손자 창(무왕)이 영특해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문제는 창의 아버지 계력이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장자 상속제였던 주나라에서는 매우 힘들었다. 이에 계력의 형이었던 태백과 중옹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긴 다음 강동 오지로 들어가 오랑캐와 살면서 왕위 계승을 스스로 포기했다. 즉, 진천은 아예 처음부터 아우 진욱에게 황제 자리를 줘서 비극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2. 진천과 남색을 즐긴 사이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