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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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제  

북제(北齊)는 옛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의 왕조다. 존속기간은 550~577년.

1 개요

북위동위서위로 갈라졌을 때, 동위의 효정제 원선견이 북제의 문선제 고양에게 선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서위의 후신인 북주에게 멸망했다.

스스로는 라고 칭했지만 소도성이 세운 남조(육조시대)의 제(육조)가 같은 이름이었기에 북제라고 한다. 그래서 육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1] 다만 남제는 북제가 세워지기 50년 전인 502년 멸망한 상태여서 둘이 겹치진 않는다.

당대에야 화북을 양분한 강호였겠으나 오늘날에는 중국사의 수많은 그렇고 그런 단명왕조1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 짧은 기간 동안 옆동네(고구려) 하고는 거란과 유민 송환 문제로 얼굴을 붉혔다.

2 역사

2.1 북위의 분열

북조의 북위는 효문제 원공의 정책으로 강대했으나, 나중에 선무제 원각의 황후였던 호태후가 나라를 말아먹고 거기에 육진의 난이 일어나 위기에 빠졌다. 호태후는 매우 음란한 여자로 자신의 친아들 효명제 원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독살하고 그의 딸을 아들로 속여 황제로 세웠다. 당시 이주영(爾朱榮)[2] 장군이 호태후와 '가짜 황제' 원소, 대신들 2천여 명을 황하에 처넣거나 처형하는 하음의 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다음 효문제의 조카 효장제 원자유를 세웠다. 이주영은 효장제에게 자신의 딸이자 효명제의 후궁이었던 이주씨(이주영아)를 시집보낸다. 효장제는 이주영을 암살하기 위해 이주씨가 아들을 낳았다는 거짓 소문을 내는데 이주영은 속아서 입궁했다가 효장제에게 암살당한다.[3]

효장제는 실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가 다시 난을 일으켜 효장제를 죽여버렸다. 이주영의 부장 이름이 좀 거시기한 고환이 이주조를 쳐부수고 난리를 수습한 다음 대승상 대장군에 올라 실권을 잡았다. 당시 황제였던 효무제[4]는 고환에게 모욕을 당하자 참지 못하고 고환을 칠려다가 실패하자 을 타고 홀로 수도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망가버린다. 고환은 추격했지만 잡지 못하자 그를 불려들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그의 친척[5]인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니 북위는 효무제를 옹립한 우문태서위와 효정제를 옹립한 고환의 동위로 분열되었다.

2.2 북제의 건국

동위의 효정제 원선견은 정말 안습한 황제였다. 원래 고환은 효무제의 도망으로 협천자 영제후[6]를 할 유리할 조건을 놓친 경력이 있어서 겉으로나마 원선견을 공경했다. 무엇보다 고환은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감히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으며 연회에서는 부복을 하고 축수를 했다. 원선견이 법회를 열고 수레를 타고 향불을 피우면서 가면 고환은 향로를 받쳐들고 도보로 그의 뒤를 따르니 고환의 부하들 역시 공손했다.

하지만 547년 고환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장남 고징그런 거 없었다. 그는 오만하여 연회에서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것도 군신간의 예의가 없었는데 이에 화가 난 원선견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이 어찌 이렇게 삶을 도모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런데 고징에게 황제로서는 당연한 호칭인 짐이라고 했더니 짐? 짐은 무슨 놈의 개대가리같은 짐이야! 개나 줘버릴 짐같으니!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즉, 니 따위가 무슨 황제냐?라고 공경대부 앞에서 엄청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거기에 고징이 중서 황문랑 최수서에게 주먹으로 세 차례나 구타를 하도록 명하니 그대로 당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비단을 내려 사과해야 했다.

물론 원선견이 아주 바보는 아니라서[7] 한편으로는 몰래 그를 죽이려 했지만 세력이 부족하여 결국 발각되었다. 이에 고징이 군대를 이끌고 입궁하면서 폐하께서 어찌하여 반역을 생각하십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원선견은 정색을 하며 '예로부터 신하가 군주를 배반한다는 말은 있으나, 군주가 신하를 배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자신이 반역을 꾀하면서 어찌 짐을 책망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고징은 탁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대성통곡하면서 사죄하였다. 그러나 사흘 후, 원선견은 고징에 의해 함장당에 연금되었다. 원선견은 하도 갇혀 있다보니 바람 좀 쐬려고 가끔씩 말을 탔는데 고징은 원선견이 효무제처럼 달아날까봐 겁이 나서 감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걸 고징의 심복이 목격하자 심복에게 대장군(고징)께서 말을 타시지 말랍니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때마침 고징이 음식 나르는 노비 난경[8]에게 암살당하자 원선견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징의 동생 고양이 태연한 기색으로 진압을 지휘해 뒷수습을 말끔히 하고 권력을 재빨리 장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그는 결국 고양에게 선양으로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했고 중산왕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끝내 그에게 짐독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일단 그는 성 북쪽에 매장되었으나, 얼마 후에 무슨 생각인지 고양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업성을 흐르는 장수에 던져 버렸다.

2.3 후경의 양나라 귀순

이런 혼란 속에 고징의 시절 하남의 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소연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548년).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작은 영토 하남을 노리다가 양무제의 말년도 피로 얼룩지고 만다. 안습.

양나라는 후경이 살해 된 뒤에도 북제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다가 이에 반발한 진패선이 친북제파들을 죽이고 진나라를 세우면서 일단락 된다.

2.4 고양의 공포 정치

북제의 첫 황제 문선제 고양은 위에 잠시 언급한 고환의 차남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고징이 549년 노비 난경에게 암살당하자 침착하게 난리를 수습하고 권력을 강화한 다음 선양받는다.

그는 과단성과 능력이 있어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나라를 맡겨 나라를 안정시켰다. 고양은 정신이 멀쩡할 땐 이성적이고 유능한 왕이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술이 취하면 그야말로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람이 말년에 갈 수록 술취한 날이 늘어났다는 것. 술 취하면 살인의욕이 치솟는지라, 죄수들을 살인용 더미로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살인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중엔 그냥 재판 받던 사람까지 넣어야 할 정도였다. 살인용 더미를 데리고 다닐 걸 추천한 대신도 두번이나 끔살당할 뻔할 정도였으니 죄수들이 당할 운명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양은 원선견의 을 강에 쳐넣고 북위의 원씨 일족 700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살했다. 이 때 갓난아이도 위에서 떨어뜨려 창으로 찔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고 시신들은 모두 장수에 버렸다. 그 후 장수에서 잡힌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의 손가락이나 손톱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생겨서 오랫동안 성 사람들은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 고양은 술을 마시고 친어머니 누씨를 모독한 패륜아이기도 했으며[9] 아버지 고환의 첩이었던 이주씨[10]를 범하려다가 실패하자 로 죽였다. 또 자신의 첩 설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찢어 죽여 인피악기로 만들고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살육하는 등 공포 정치를 한 폭군이었다. 무엇보다 나체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발가벗고 나녔으며 높은 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즐기는 등 그냥 미친놈이었다.

고양은 결국 재위 9년만에 죽었으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연호가 천보(天保). 그나마 당시에는 '정치가 위에서 군주는 어두웠지만 아래에서 능신들에 의해 맑았다.'라고 평가받았다.

3 쇠퇴와 멸망

고양의 장남 폐제 고은이 그의 뒤를 이었지만 "폐제"에서 짐작하든 다음해 고환의 6남 효소제 고연이 찬탈해 그를 죽였다. 고은은 고양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다르게 학문을 좋아하고 바른 사람이었으나, 심약하여 고양이 매우 싫어했다. 한 번은 금봉대에서 죄수들의 목을 자르라고 했는데 결국 자르지 못했고 채찍으로 맞았다. 이 때부터 말더듬이가 되고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한다. 고양도 이를 우려했는지 고연에게 미리 '네가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면 마음대로 하되 부디 내 아들을 죽이지는 말아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고연은 고양의 유언대로 찬탈은 했으나, 결국 조카 고은은 죽여 버렸다.

그래도 고연은 능력이 있어서 고양의 폐정을 개혁하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자신이 처리했다. 그러나 고연 역시 다음 해 죽었는데, '태자는 죄가 없으니 네가 봐서 좋을대로 처리하되 앞 사람을 본받지 말라'라고 고환의 9남 무성제 고담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고담이 뒤를 이었는데 이 놈도 이름답게 형 고양과 판박이였다. 고담은 형 고연을 본받아 자신이 황제가 되었지만 결국에는 조카 고백년을 죽여버렸다. 무엇보다 고양은 잔인하고 음란했지만 능력은 있는 군주였으며 고연은 능력도 있고 부지런한 군주였으나, 고담은 능력도 없었고 음란하고 잔인했다. 고담이 고양의 황후였던 자신의 형수 이씨를 범해 딸을 낳게 했는데, 이씨가 부끄러워 딸을 방치해 죽게 하자 화가 난 고담은 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네 아들도 죽이겠다라며 고양의 아들 고소덕을 활로 쏴서 죽이고 능력 있는 고연의 아들 고백년도 결국 제거했다. 그런 다음 이씨를 녹초가 되도록 구타하다가 초죽음이 되자 수레에 실어 비구니로 만들어버렸다.

고담은 부역을 가중시키고 사치를 누렸는데, 고양은 그나마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이 자는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야말로 고담시티 565년 4월, 아들인 고위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제로서 정무를 보면서 음란사치에 빠졌고 568년 12월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다. 결국 그의 아들 후주 고위 대에 이르러 북제는 멸망하고 일족은 장애인들을 제외하면 북주에게 모조리 멸족당하고 만다.

3.1 후주 고위와 북제의 멸망 원인

사실 동쪽의 북제는 처음에는 부강했었다. 당장 수도가 낙양에 함곡관을 경계로 평야지대가 모두 북제의 영토였으니까. 특히 바다에 면하는 황하 하류를 끼고 있었기에 농산물이 풍부했다[11]. 돌궐과 손을 잡고 거란을 견제하기도 했다. 고위만 해도 고은-고연-고담의 짧은 재위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11년을 왕위로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위의 후반기 치세가 문제였다. 고위의 시대에 적들을 잘 막아내던 곡율광, 고장공[12]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전부 고위에게 살해당해 버리고[13], 선비족을 우대하고 한족의 율령체계를 거부하는 공포정치를 유지하면서 점차 쇠퇴했다.

거기다 고위는 화사개(和士開), 고아나굉(高阿那肱), 목제파(穆提婆), 한장란(韓長鸞) 등의 간신들을 신임하였고 국력을 크게 쇠약해졌다. 중신과 왕족들이 그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되었고 특히 곡율광도 고장공은 이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국력과 군사적으로 압도적이었던 북주와 진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지켜 본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출병을 결심했다.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영토를 잃고 말았다. 577년 후주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였고 북주군을 피해서 도피를 하지만 결국에는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3월 청주(青州)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북제는 멸망하였다. 북주는 그에게 온공(温公)으로 봉해졌지만, 577년 그의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결국 고위는 곡율광을 죽인지 5년, 고장공을 죽인지 3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고위는 막판에 자신의 8살 난 아들 유주 고항을 황제로 세우고 태상황을 칭했으나,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반역죄로 모함받아 고추로 입을 막아 질식사당하고 고씨 황족들은 모조리 멸족당했다.[14] 그런데 그의 어머니이자 고담의 황후였던 호씨와 그의 황후 목씨는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되었다. 남편 고담 못지 않게 음란하던 호씨는 화사개와 사실상 부부였으며 며느리까지 부추겨 장안에서 기녀가 된 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태후로 사는 것은 기녀로 사는 것보다 재미가 없다!"

비록 망국이지만 전직 태후와 전직 황후가 서비스한다는 소문에 해당 업소는 불야성을 이루었고 호씨와 목씨는 그 후로도 열심히 일하다가(...) 수나라 개황 연간에 사망한다.

반면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을 정비하고 국력을 강화했으니, 점차 국력이 역전이 되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적인 일화로, 강을 끼고 대치하던 북제와 북주 사이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도강을 막기위해 국력이 약한 북주가 얼음을 깼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얼음을 깨는 처지가 되었다. [15]

이로서, 굳이 따지면 우문씨 일족이 황제를 강탈한 고씨 일족까지 멸족시키면서 완벽하게 북위의 유산들을 청소했다고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수문제수나라를 세우면서 우문씨도 멸족해버렸으니 모두 사이좋게 멸종

여담으로 북제가 존재했던 시기는 신라 진흥왕(540~576)의 재위기간과 정확히 겹친다.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고담은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봉했다.

3.2 북제의 황제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문목황제(文穆皇帝) [16]고수(高樹)[17]---
-북제 고조(北齊高祖)
북제 태조(北齊太祖)[18]
신무황제(神武皇帝)
헌무황제(獻武皇帝)
고환(高歡)--
-북제 세종(北齊世宗) [19]문양황제(文襄皇帝)고징(高澄)--
1대북제 현조(北齊顯祖)
북제 위종(北齊威宗)
문선황제(文宣皇帝)
경열황제(景烈皇帝)
고양(高洋)천보(天保) 550 ~ 559550 ~ 559무녕릉(武寧陵)
2대-폐황제(廢皇帝)
민도왕(閔悼王)
고은(高殷)건명(乾明) 560559 ~ 560-
3대북제 숙종(北齊肅宗)효소황제(孝昭皇帝)고연(高演)황건(皇建) 560 ~ 561560 ~ 561문정릉(文靖陵)
4대북제 세조(北齊世祖)무성황제(武成皇帝)고담(高湛)태녕(太寧) 561 ~ 562
하청(河淸) 562 ~ 565
561 ~ 565영평릉(永平陵)
5대-후주(後主)고위(高緯)천통(天統) 565 ~ 569
무평(武平) 570 ~ 576
융화(隆化) 576
565 ~ 576-
--초공애황제(楚恭哀皇帝) [20]고엄(高儼)---
임시-안덕왕(安德王)고연종(高延宗)덕창(德昌) 576576-
6대-유주(幼主)고항(高恒)승광(承光) 577577-
비정통-임성왕(任城王)고개(高湝)-577-
비정통-범양왕(范陽王)고소의(高紹義)무평(武平)578 ~ 580-

4 관련 항목

  1. 대표적으로 고구려 백제 등이 나와서 자주 인용되는 남쪽 제나라의 역사를 "남제서"라고 한다.
  2. 성이 이주씨로 선비족의 추장이다.
  3. 이 때 효장제는 옛날에 왕윤동탁을 암살하는데 사용한 방법을 연구하여 응용했다고 한다.
  4. <북사>에서는 효무제라고 기록했으나, <위서>에서는 출제라고 기록했다.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가 강하다.
  5. 효문제의 증손자
  6.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을 내림.
  7. 돌사자를 들고 담장을 넘으며 시와 부를 읊는 등 꼭두각시답지 않게 문무겸비한 황제였다!
  8. 포로가 되었던 양나라 서주자사 난흠의 아들로 난흠은 제물을 주며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9. 술에 취해 늙은 어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를 넘어뜨려 죽일려고 했다. 술이 깨자 불에 뛰어들어 죽을려고 했으나, 누씨의 만류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10. 이주영의 딸 이주영아(爾朱英娥)로 효명제의 첩이었다가 효장제의 황후가 된다. 그러다 고환이 그를 범해 아들 둘을 낳았다.
  11. 물론 북주 역시 후에 (사천)땅을 병합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다.
  12. 고씨 일족으로 난릉왕이란 작위를 받아 난릉왕 고장공이라고 한다. 삼국지주유에 비견될만한 미남자였으나 최후는 그런 거고 뭐고 없다.
  13. 북주의 무제는 곡율광의 피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고위는 고장공마저 독살했다(...).
  14. 오직 장애인들만 촉 땅으로 보내져 천수를 누렸다.
  15. 이는 원래부터 북주가 군사력이 강했지만 북제가 군주와 장수들의 역량으로 이를 잘 막아내는 처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목에서 보듯이 고위는 당대에 명장들을 숙청하며 나라를 자알 말아먹었다(...).
  16. 북제 문선제 추존
  17. 고수생(高樹生)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8. 북제 문선제 추존
  19. 북제 문선제 추존
  20. 북제 유주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