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
이름 | 척 존스 CHUCK JONES |
분야 | 영화 |
입성날짜 | 1995년 2월 13일 |
위치 | 7007 Hollywood Blvd. |
애니메이터 프리츠 프렐랑과 함께.[1]
1 개요
Charles Martin Jones, 줄여서 Chuck Jones. 1912.9.21 ~ 2002.2.22
스포케인 워싱턴 출신 미국인 애니메이터이자 카툰 원화가,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감독.
2 생애
척 존스가 출생한 지 몇년 후 그의 일가는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했는데, 자서전에 의하면 아버지는 실패한 사업가로써 이전에 문구 제품과 연필들을 구입해 비즈니스 사업을 진행했었다고 한다. 이후 Chouinard Art Institute에서 배우면서 청소부로 일했고 졸업 후엔 어브 아이웍스의 스튜디오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자신의 첫번째 아내가 된 도로시 웹스터를 처음 만났다. 시간이 지나 당시 루니 툰 단편을 제작하던 워너 브라더스 내부의 스튜디오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1933년 어시스턴트 애니메이터로 활동해 2년이 지난 1935년엔 애니메이터로 승진하였고, 이때 텍스 에이버리 등의 여러 애니메이터들과 같이 터미트 테라스로 불리던 소규모 작업소로 이사해 애니메이션 활동에 임했다.
척 존스가 초창기(1940년)에 감독한 단편 중 하나.
1938년 감독으로 승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루니 툰 감독진으로 자리잡았으며, 1940년대 초기 스튜디오 내부의 애니메이터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당시 프로듀서이던 리언 슐레진저와 마찰을 빚은 경력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만 공습의 여파로 미국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에 관여한 이등병 스나푸 시리즈의 감독을 담당했고, 이후 1940년대 후기부터 50년대까지 화성인 마빈, 페페 르퓨, 로드 러너, 미시건 프록, 클로드 캣 등 자신이 창작한 수많은 단편 카툰들의 캐릭터 디자인과 감독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척 존스와 카툰 제작에 협력한 주요 애니메이터들은 마이클 멀티즈(스토리 작가), 모리스 노블(레이아웃 원화, 배경 디자이너, 공동 감독), 아베 르비튜(공동 감독), 켄 헤리스, 벤 와샴이었다.[2]
1957년 발표된 what`s opera, doc? 영상.
워너 브라더스가 1953년 갑작스레 애니메이션 부서를 폐쇄하면서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4개월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제작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물론 이후 복귀해 다시 루니 툰 감독을 맡게 되었으나 척 존스는 1962년 아내 도로시와 UPA에서 제작한 단편 카툰 gay purr-ee의 시나리오를 작성한 바 있었는데, 이는 워너 브라더스와 맺은 전속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였고 결국 그해 해고당했으며 척 존스 자신은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3]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은 얼마 못가 mgm에 흡수되어 mgm 애니메이션 디비전으로 바뀌었고, 톰과 제리 단편 제작기인 1965년엔 TV 스페셜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의 감독 & 제작을 맡은 바 있으며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몇 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1970년 mgm에서 애니메이션 디비전을 폐쇄한 후에도 몇년간 tv 스페셜 제작에 임하였고, 1976년 워너 브라더스와 애니메이션 제작 협력을 재개해 루니 툰 tv 스페셜 몇 편과 관련 영화 몇 편의 감독을 맡았다. 이듬해엔 시카고-트리뷴 ny 뉴스 신디케이트에서 1년간 신문 만화를 연재하였으며, 첫째 아내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마리안 던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딸 린다 존스가 설립한 린다 존스 엔터프라이즈에 자신이 제작한 카툰과 패러디 그림, 갤러리 등을 팔았고 그렘린 시리즈에서 애니메이션 시퀀스 감독을 맡는 등 말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였다.[4] 2002년 2월 22일, 심장 마비가 발생해 척 존스는 숨을 거두었고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흩뿌려졌다.
3 의의
1940년대 초기 워너브라더스로 이직한 애니메이터 텍스 에이버리가 비현실적이며 과장된 슬랩스틱, 비정상적 캐릭터 등을 연출해낸 것과 해나-바베라 콤비가 톰과 제리를 감독함으로써 기존의 슬랩스틱, 개그들을 변화시킨 상황 속에서, 척 존스는 시각적으로 구조화된 개그 코미디 슬랩스틱[5]을 활용한 바 있었다.
그리곤 당시 미국 극장가에서 유행한 추격물 카툰의 틀 하에서 내부적인 설정들을 극단화시킨 로드 러너를 제작했으며, 각양각색의 캐릭터가 나오는 단편들을 감독 및 창작함으로써 위의 두 감독들과는 대비되게 주로 코미디, 슬랩스틱을 수성시키는데 기울였다.[6]
척 존스는 또한 19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루니 툰의 수많은 조연급 캐릭터(화성인 마빈, 마녀 헤이즐, 와일리 코요테, 로드 러너, 고세머 등등)들을 창작해냈으며, 1938년부터 1962년까지 200여 편이 넘는 루니 툰 단편을 감독해냄으로써 오늘날 루니 툰 하면 떠오르는 감독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애니메이션 감독(중 1명)으로 자리잡았다.
4 트리비아
- 194~50년대 당시 제작된 루니 툰 단편들을 그림체로 잘 살펴보면 그가 감독해낸 단편들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
- 미국의 거물급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도서 Chuck Amuck: The Life and Times of an Animated Cartoonist에서 척 존스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 "If Walt Disney was the first animator who taught me how to fly in my dreams, Chuck Jones was the first animator who made me laugh at them."
- 미국 애니메이터 중에서 척 존스는 드문 90대의 연령으로 세상을 떠난 감독이기도 한데, 월트 디즈니나 텍스 에이버리가 각각 60대와 70대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교해 보면 장수한 셈.[7] 또한 루니 툰 감독들 중 유일하게 오스카상을 수상받은 애니메이터이다.(1996년 수상)
- 195~60년대 당시 막 태동하고 있던 미국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대해 척 존스는 'illustrated radio'(편집된 라디오)라 말하며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chuck jones conversation 64페이지 사실 척 존스가 작업해왔던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에 비하면 동화수도 적고 작붕도 심하며 퀄리티가 떨어지는지라 어쩔 수 없긴 하다.
- 척 존스에 대한 관련 정보를 수록한 공식 사이트가 존재한다.홈페이지
5 관련 영상
Chuck Jones: Extremes and In-Betweens - A Life in Animation 바이오그래피 영상.
생전 인터뷰 영상 중 하나.
유튜브 유저 Every Frame a Painting의 영상. 한글자막이 지원된다.
6 작품 목록
- 등등
자세한 목록은 [1] 참조 바람.
- ↑ 1906~1995. 애니메이터 경력 초창기엔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1930년 워너브라더스로 이직해 활동하기 시작, 1933년 감독으로 승진하여 1938년 잠시 mgm으로 이직했으나 얼마 못가 복귀했으며 이후 1962년까지 루니 툰 단편 제작에 참여했다. 이듬해 데파티-프렐랑 설립자 중 1명으로 참여해 애니메이션 생산자로 근무하였으며 1986년까지 현역으로 일했다.
- ↑ 이들은 이후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톰과 제리 단편 카툰 제작에 참여한다.
- ↑ 얼마 못가 다음해에 워너 브라더스 내부 카툰 스튜디오는 폐쇄되어 이후 6년간 루니 툰 제작은 외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담당하게 된다.
- ↑ 1996년에 발표된 루니 툰 단편 From Hare to Eternity에선 상영 전년에 사망한 선배 애니메이터 프리츠 프렐랑의 이름이 배 갑판에 새겨져 있다.
- ↑ 이런 개그 슬랩스틱을 구분하는 방법은 해나 바베라, 텍스 에이버리, 월트 디즈니, 월터 란츠 등이 감독한 단편 애니들(UPA 애니는 예외.)과 척 존스가 연출한 루니 툰, 톰과 제리 단편의 개그를 비교해보면 간단히 알아챌 수 있는데, 전자의 개그 씬이 우스꽝스런 분위기에 작화가 자연스러운 반면 척 존스의 개그 씬은 프레임이 제한된 장면도 나오고 우스꽝스런 슬랩스틱도 나오긴 하나 다른 감독들과 대비된 코미디 구성도 연출시켜낸 차이점이 존재한다.
- ↑ 이는 훗날의 미국 애니메이션 코미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 ↑ 다른 감독들은 윌리엄 해나와 조셉 바베라로, 각각 91세와 95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