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으로 만들어진 갑옷.
1 왜 천으로 갑옷을 만들었을까?
천은 재질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금속제 도검 등에는 쉽게 절단당하고, 심지어는 날카로운 돌뿌리에도 쉽게 찢어져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물건으로, 도저히 창날과 도끼날이 번쩍이는 전장에서 쓰이기는 힘들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갑옷이 의복의 연장임을 고려할 때, 최초의 갑옷이 더 단단한 무엇으로 이곳저곳을 보강한 일반 의복이었음을 유추해내기는 어렵지 않다. 선사시대에 동물 가죽을 좀 더 둘러쓴 수준의 갑옷이 있었듯이, 천옷이 등장한 이후에도 같은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건조시킨 풀에서 추출한 섬유질이나, 혹은 기르는 가축의 털을 모아 짠 모직 재질은 한 겹으로는 흐느적거리는 천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몇 번이고 접히고 겹쳐져 일정 이상의 두께가 되면 돌칼이나 무딘 청동검을 휘두르는 것으로는 도저히 관통시킬 수 없는 튼튼한 방어구로 변한다. 곤봉 등의 타격에는 나중에 등장한 사슬갑옷보다도 더 잘 버틴다.
그러나 단점도 당연히 존재하는데,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일단 오염에 취약하다. 전장에서 땀과 피, 진흙, 분뇨(전장에 끌려간 각종 동물들의 것이나, 혹은 착용자 자신의 것)을 한껏 뒤집어쓴 천 갑옷은 오래지 않아 썩은내를 풍기며 부패하기 시작한다. 여러 겹으로 되어 있으므로 세탁도 거의 불가능. 가죽이나 금속 재질의 갑옷에 비해 불에도 훨씬 약하며, 날카롭고 튼튼한 철제 무기들이 전장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면 더 이상은 겹친 천조각 따위로는 방어해낼 수 없는 강력한 찌르기가 천 갑옷 착용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에 따라 천 갑옷이 완전히 사라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예 천으로만 방어하고자 한 갑옷들은 거의 쇠퇴했지만, 가죽 갑옷이나 금속 갑옷의 속에 받쳐입거나, 혹은 천으로 만들되 그 속에 각종 방어재를 넣어 공격을 막는 갑옷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금속과 천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훌륭히 보강해줄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 문제도 있었는데, 우선 천을 구하는 것은 동물 가죽을 구해 무두질하는 것이나 땅 속의 광석을 캐내어 정련하고 단조하는데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쉬웠으며, 따라서 가격도 비교할 수 없이 쌌다. 전장에 참여하는, 혹은 끌려가는 사람들 중 돈이 없는 자들은 제대로 된 갑옷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천 갑옷이라도 장만해 입어야만 했으며 수요가 존재하는 한, 항상 공급도 존재했다.
천 갑옷이라는 개념은 강철 갑옷마저도 손쉽게 뚫어버리는 근대식 총의 등장 이래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 했지만, 오히려 21세기 전장에서 도자기와 함께 방탄복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전장으로 되돌아왔다. 튼튼한 합성 유리섬유로 된 천을 여러 겹 겹치고, 경화수지를 부어 굳힌 방탄모는 2015년 현재도 예비군 훈련에서 지겹도록 볼 수 있으며 이런 합성섬유와 세라믹 재질의 방탄판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수많은 미군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2 역사적 천 갑옷들
리넨 갑옷 : 천의 일종인 린넨으로 만든 갑옷. 고대 지중해-소아시아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퀼티드 아머 : 천을 누벼 만든 옷. 갑옷 수준으로 튼튼하게 만든 것이 있는가 하면, 조금 두터운 실외복 정도의 간단한 물건까지 다양하다.
면제배갑 : 조선 말에 만들어진 방탄갑옷. 면제 외피 속에 12겹의 삼베를 넣어 만들었다. 총탄을 막을 수 있는 만큼, 웬만한 도검으로는 뚫을 수 없다.
두정갑 : 실질적 방어력은 겉감의 면과 안감의 비단 사이에 든 종이,가죽,철판 등이 담당하지만, 일단은 천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