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클라이버

줄여서 C.클라이버라고도 한다.

(1930-2004)

1 생애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다. 아버지 에리히는 카를로스가 태어난 무렵인 1930년경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유럽 5대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1929년 베를린은 국립오페라의 에리히 클라이버 외에도 필하모니의 푸르트벵글러, 시립오페라의 브루노 발터, 크롤 오페라의 클렘페러가 활동했던 음악의 중심지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독일식인 Karl이었다. 풀 네임은 Karl Ludwig Bonifacius Kleiber. 힌데미트 사건(1934년)의 영향으로 에리히 클라이버는 가족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게되었다.[1]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이후 Karl이라는 독일식 이름을 Carlos라는 라틴식 이름으로 고쳤다. 힘들게 지내왔던 만큼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는 데 대해서 극심한 반대를 했다고 알려진다.[2] 결국 음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명문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화학과로 진학했다(...)[3][4][5]

그래도 미련이 남아있던 탓인지 1953년에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 지휘자로 전향했다. [6] 이 때부터 지휘를 시작[7]했으며, 주로 아버지가 지휘한 레퍼토리 위주[8]로 공략을 해왔다고 알려진다.

1966년 슈투트가르트 가극장에 first Kapellmeister로 영입된 이후 6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6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보체크의 에든버러 해외공연에서 클라이버가 갑자기 공연을 취소를 하는 바람에 가극장측과 사이가 틀어졌다.[9] 가극장측은 클라이버의 처신에 대해 크게 분개하여 그와 계약을 종료하려고 했지만, 클라이버는 노동법을 들먹이면서 계약 만료일까지 버티며 자리를 지켰다.

1974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클라이버 본인이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고 싶다고 볼프강 바그너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1974년부터 76년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16회 지휘했다.[10] 이후 더이상 바이로이트 무대에 서지는 않았다.

아울러 이시기에 음반사 DG에 영입되어 마탄의 사수,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을 녹음했는데 이 음반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사실 DG에서 베토벤 교향곡이 출시되기 전에 클라이버는 해외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해외의 유명한 클래식 평론가들도 이 음반으로 클라이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끄럽지 않은 관계 속에 있었던 슈투트가르트 가극장과 계약이 종료된 이후(1973년) 클라이버는 고정된 악단 없이 자유롭게 지휘하러 다니는 프리랜서 지휘자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80년대에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했지만 뮌헨의 유서깊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가 그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이미 70년대부터 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와 자주 공연했고 80년대에는 여기서 공연하는 빈도가 늘어 사실상 클라이버의 주활동 무대가 되었다. 클라이버는 뮌헨 인근에 집을 마련하여 거주했고, 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에는 클라이버의 개인사무실과 개인용 라커도 있었다.[11]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경영진과 음악감독 볼프강 자발리쉬도 클라이버를 물심 양면으로 각별히 지원해줬다고 한다.

일본 투어에도 나서서 꽤 성공했다. 일본의 유수 음악잡지에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천문학적인 개런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 투어만큼은 정말 즐거워했다.[12][13] 클라이버의 마지막 오페라 공연인 "장미의 기사" 공연도 94년 일본에서 열렸다.[14]

1989년에는 빈 신년 음악회를 이끌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공연은 CD[15]와 DVD 둘다 구할 수 있다. 물론 클라이버가 빈 신년 음악회를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클라이버는 리허설 과정을 참 힘들어했으며 그건 단원들도 마찬가진데, 흥이다! 특히 공연 마지막에 전통적으로 연주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관습을 정말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영상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빈 신년 음악회에서 관객들을 향해 몸을 아예 돌려 박수를 지휘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클라이버는 몸을 거의 돌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90년대에는 오페라(장미의 기사나 박쥐 등 본인 장기)와 교향곡 위주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다시 한 번 빈 신년 음악회를 맡아 또다시 각광받았다.[16] 기벽도 유난했던 시기로, 콘서트 개런티와 더불어 아우디 A8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17]

90년대 중반부터는 연주회 횟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95년에는 아예 공연이 없었고, 96년에는 단 두 차례 공연만 지휘했는데 그중 하나는 클라이버 자신이 원하는 사양대로 제작한 아우디를 받는 댓가로 아우디공장 인근에서 근로자를 위한 콘서트를 지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파파라치에 의해 이것이 들통나면서 언론에 보도되고 말았다.[18]

그리고 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아내가 먼저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 악화, 2004년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19]

2 평가

2.1 지휘 방식

그의 지휘는 개성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강력하게 몰아붙이며, 오케스트라 장악력이 뛰어나면서 유연하고 역동적인 해석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의 지휘를 개성적인 지휘로 많이 볼 것이다.[20]

지휘 전공자들 중에는 그의 지휘를 신의 기술로 추앙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악장들이 지휘의 천재로 주저하지 않고 꼽는 지휘자가 바로 클라이버일 정도로 그의 지휘역량은 가히 천재적이라고 한다.

반면 클라이버의 지휘는 지나치게 신체적 근력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 매우 역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서정적인 곡에서는 한계를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고[21],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근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는 평가[22]도 있다.

2.2 완벽주의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리허설에는 굉장히 엄격했으며[23], 거기다 녹음하기 꺼려하는 기질[24]을 더해서 정식음반으로 남긴 개수가 다른 지휘자보다 적다.[25]

클라이버는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비판적인 평을 한적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다시 연주하는 일이 없었다. 런던이 대표적인 경우다. 런던 심포니와의 첫 공연에 대해 악명 높은 런던 비평가들이 역시나 비판적인 리뷰들을 쏟아냈는데, 이에 격분한 접한 클라이버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런던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이는 런던에서도 만만찮은 파문을 일으켰는데, 좋든 나쁘든 비판적인 평론만 쏟아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던 런던의 씹선비 평론가들에 대해 자국 애호가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클라이버가 런던에서 공연을 거부하자 평론가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이 클라이버의 연주를 들을 기회를 빼앗겼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비판적인 리뷰를 썼던 평론가들 대부분이 클라이버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또 런던의 비평가들은 클라이버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클라이버에 대한 찬양 리뷰들을 양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버는 두번 다시 런던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런던의 사례가 있은 후 전세계 누구도 감히 클라이버에 대해 비판적인 공연 리뷰를 쓰지 못했다.

그리고... 무대 공포증[26]이 있었다. 극복하고 싶어서였는지,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지나친 리허설로 악단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데 능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4번 2악장 리허설 장면[27]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리허설은 기본이 3주였다. [28] 심지어는 공연 당일에 취소해버리기도 했다.이런 X발[29] 이 부분은 글렌 굴드와 비슷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클라이버는 막상 올라서면 무대를 정말 즐겼기 때문에 그저 무대가 정말 싫어서 취소했던 굴드와는 다르다. 그러나 녹음을 취소한 경우도 있기는 있었다고 한다.

클라이버의 완벽주의와 무대공포증은 기본적으로 최고를 지향하는 본인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이팅크 등에 따르면 클라이버는 세계 최고의 유일무이한 지휘자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했다고 한다. 또,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에 비해 자신이 작품의 이해도와 지휘력이 떨어진다는 일종의 컴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컴플렉스 때문에 그 수많은 무대취소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클라이버는 개런티에 있어서도 항상 세계최고의 대우를 원했는데, 베를린 필에 카라얀보다 높은 캐런티를 요구했고,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할 때는 최고수준의 개런티 이외에도 아우디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2.3 레퍼토리

그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편인데 나이가 들수록 더 좁혀진 편이다. 주요 레퍼토리로는 베토벤 교향곡 4, 5[30], 7번[31], 브람스 교향곡 2, 4번, 모차르트 교향곡 33, 36번,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마탄의 사수 서곡 등이 그의 레퍼토리의 대부분이다.[32] 특히 브람스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4&7번 등이 핵심 레퍼토리라 할 수 있다. 칼 뵘 추도 콘서트에서 실황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은 이 곡의 명반을 논할 때 항상 거론될 정도로 칭송받고 있다.

클라이버도 전통적인 독일의 오페라 지휘자 코스를 밟아왔기 때문에 오페라에 정통한 지휘자였다. 실제로 그의 전생애를 걸친 공연에서 오페라 공연 횟수가 교향악 콘서트보다 훨씬 많다. 젊은 시절에는 꽤나 다양한 오페라를 지휘하였는데[33] 오페라 쪽도 점차 레퍼토리를 줄여나갔다.[34] 디스코그라피에 남아있거나 후기에 주로 공연한 오페라는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쥐", 베버 "마탄의 사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등

2.4 다른 지휘자들과의 관계

클라이버가 음악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지휘자는 카라얀과 스토코프스키가 있다.

카라얀[35]과 절친한 사이였으며[36], 그가 죽고난 뒤 밤에 무덤에 가서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37] 평소에 다른 음악가들에게 카라얀의 리허설 방식에 대해서도 자주 물어봤다고 한다.

스토코프스키의 사운드를 무척 좋아하여 스토코프스키와 공연한 경험이 있는 연주자를 만날 때 마다 스토코프스키가 어떤 방식으로 리허설을 했고 어떻게 그런 사운드를 낼 수 있었는지 캐물었다고 한다. 스토코프스키가 사용하던 독특한 방법 중 하나는 현파트의 자유 운궁법(Free bowing) 사용이다. 스토코프스키는 자유 운궁법을 종종 사용하는 지휘자였지만 아주 자주 사용한 것은 아니고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자유 운궁을 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때그때 달랐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이러한 자유 운궁의 사용이 스토코프스키 사운드의 중요한 요소라고 여겼는지 자주 자유 운궁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클라이버는 자유 운궁을 곡 전체에서 사용하지는 않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패시지에서만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또 스토코프스키가 연주자에게 완전히 자유롭게 보잉을 하도록 맡긴 것과는 달리 클라이버는 풀트마다 직접 보잉을 지정해 주었다. 클라이버의 자유 운궁 사용은 일부 오케스트라와 마찰을 빚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베를린 필이 클라이버의 자유 운궁 요구를 거절하자 클라이버가 연주회를 취소해 버린 경우가 있었다. 한때 클라이버가 활발히 교류했던 시카고 심포니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자유 운궁의 사용 때문이다. 클라이버가 리허설에서 자유 운궁을 지시하였는데, 첼로 수석이 단원들에게 통일된 보잉을 사용하도록 지시해서 실제 연주회에서는 단원들이 통일된 보잉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 날이 클라이버가 시카고 심포니를 마지막으로 지휘한 날이 되었다.

훗날 과거 자신이 멕시코 순회공연 때 지휘한 콜리올란 서곡 동영상을 보고 '그 땐 아직 스토코프스키의 연주를 알지 못했던 때라 (내) 연주가 썩 좋지 않았다. 지금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첼리비다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클라이버는 "토스카니니가 보내는 서한"이라는 글을 직접 작성하고 신문에 투고하여 공개적으로 첼리비다케를 까고 카라얀을 추켜 세운 적이 있다.

2.5 음반

클라이버의 정규녹음은 많지 않다. 80년대초 DG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녹음하다가 분노하여 뛰쳐나온 이후 정규음반 녹음이 별로 없다. 본인의 완벽주의 및 한번 비위에 거스르면 평생 척을 지는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듯.

일각에는 클라이버가 좋은 조건에서 녹음하지 못했다는 주장[38]이 퍼져 있기도 한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클라이버는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녹음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곡, 오케스트라, 가수를 맘대로 선택하여 녹음할 수 있는 지휘자는 클라이버를 제외하면 거의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카라얀도 만년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39][40] 클라이버의 전속사였던 DG는 클라이버에게 이례적일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는데 교향곡 데뷔 음반을 무려 빈 필과 녹음하게 해줄 정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DG에서 남긴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음반사가 오케스트라 리허설로만 열흘을 잡아줄 정도였다. 이처럼 유례없는 사전 지원을 해줬건만 클라이버는 녹음 중에 계속 음반사측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마침내 타이틀롤인 테너 르네 콜로[41]와 싸우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녹음 세션은 영구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미 한달이 넘는 녹음 세션을 진행하면서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었던 DG는 클라이버의 리허설 세션 음원을 짜집기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음반을 출시했다.[42] 음반이 출반되자 클라이버는 음반사가 자신의 동의 없이 음반을 출반했다면서 깊은 빡침을 표현했고 평생 DG를 비난하고 다녔다.[43] 이것은 클라이버의 마지막 스튜디오 정규 음반이었다.

물론 80년대 이후로도 음반을 남기긴 했는데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것은 없다. 정식적인 계약으로 만들어진 녹음은 아닌 공연 갔을 때 누가 그걸 몰래 녹음하여 만들어낸 해적음반이 많다. 음질은 어느정도 들어줄 정도로 양호하지만, 정식반의 음질에 턱없는 퀄리티[44]그런 음반들 밖에 없기 때문에 팬들은 그 음반을 해적음반인 것을 알면서도 마구 질렀다고 전해진다.

가장 자신이 있어야하는 몇 곡만 녹음으로 남겼기 때문에 몇 장의 음반만으로 클라이버를 명지휘자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클라이버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이다. 이 곡은 클라이버가 거의 지휘하지 않은 곡이지만 그의 사후에 음원이 해적판으로 출시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음반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클라이버도 이 연주회 이후로 더이상 전원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클라이버는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4번, 5번, 7번 세 곡만 녹음하여 모두 찬사를 받고 있지만, 만약 클라이버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였다면 평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2.6 금전적 측면

냉장고 드립 등으로 세간에는 돈에는 초연한 듯한 이미지가 퍼져 있지만, 노먼 레브레히트 등에 따르면 실제 클라이버는 금전적인 면에 매우 밝고 철저한 사람이고 말하고 있다.

클라이버가 최고수준을 뛰어넘는 초고액의 개런티를 원한 것은 공연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에 처음 데뷔한 것은 1989년이었다. 이때문에 카라얀이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지휘를 방해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실은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데뷔가 늦어진 것도 그가 카라얀보다 높은 개런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필로서도 이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서 물러난 1989년에야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데뷔가 이루어졌다.

노먼 레브레히트가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클라이버는 89년 신년음악회의 음반판권을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팔려고 전화기 세 대를 동시에 잡고 DG, 소니, EMI와 협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클라이버는 신년음악회의 음원과 영상의 판권을 쪼개어 각기 다른 음반사에 이중으로 파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생각해냈고 이를 정말 실천에 옮겼다.[45] 클라이버는 1992년 신년음악회 때도 빈 필 측에도 초고액의 개런티는 물론 추가로 아우디A8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자신의 이런 금전욕과 물욕을 대외적으로는 숨기면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했다. 클라이버의 초고액 개런티 요구 사실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96년에 파파라치에 의해 아우디 스캔들이 터지자 클라이버는 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고 자신의 대외적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사실상 은퇴에 들어갔다.

명문대[46] 출신이었던 클라이버는 경제적 희소성의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한 지휘자였다. 공연 횟수를 줄일수록, 음반녹음을 줄일수록의 그의 공연과 음반의 가치는 치솟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80년대 이후에는 전세계에서 초청이 빗발쳤으며 특히 자금력이 풍부했던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스토커수준으로 매달렸는데, 그가 거절할때마다 더 고액의 개런티를 제안했다.

클라이버가 자신있는 소수의 레퍼토리만을 녹음하여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사후에 Orfeo에서 베토벤 전원 교향곡 실황이 발매 예고되었을 때의 센세이션한 기대감, 그리고 발매 후 실망감으로 인한 후폭풍 등을 봤을 때, 생전의 그의 전략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7 사생활

아내 스틴카가 죽은 지 불과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 애처가로 잘못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훼이크다 이놈들아 실상은 클라이버의 끊임없는 바람기와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그의 아내는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 애초에 클라이버는 결혼식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고, 결혼식 당일에도 식이 끝나자마자 리허설을 하러 가버리는 바람에 첫날부터 결혼생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전기에는 스스로 클라이버의 연인이었다고 밝힌 KD[47]라는 여성의 증언이 실려 있는데, 벤치에서 우연히 처음 만날날 바로 점심식사까지 같이 했을 정도니 작업스킬도 수준급. 환갑이 다되서도 매년 여름 휴양지에 데리고 오는 여자가 바뀌었다는 것이 지인들의 증언이다.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클라이버 본인은 지인들에게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실상은 클라이버와의 불화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 일본

일본을 무척 좋아했다. 일본에서 공연도 여러차례했는데 관현악 콘서트는 물론 오페라 원정공연도 했다. 물론 일본의 막강한 자금력 때문에 가능했던 일. 일본에서 클라이버에게 지급한 개런티는 역대최고로 알려져 있다. 클라이버는 일본에서 초청할 때마다 또 개런티가 올랐다고 자신이 받은 막대한 개런티를 주변에 자랑하기도 했다. 때문에 클라이버의 방일 공연의 티켓값은 엄청난 고액이었는데, 1994년 도쿄에서 빈 국립가극장과 공연한 장미의 기사 공연의 티켓값은 당시 한화로 64만원에 달하는 기록적인 액수여서 각국 해외 토픽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클라이버는 공연이 아니더라도 사적으로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갔는데 직접 차를 렌트해 일본 시골까지 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마침 일본 공연을 마치고 오던 뮌헨 필과 첼리비다케와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등석에 첼리비다케와 클라이버 둘만 있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뮌헨 필 단원들이 독촉해서 첼리비다케가 클라이버에게 가서 몇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별로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3 끝없는 논쟁

그의 연주는 최고의 찬사와 동시에 까임을 동시에 받고있다..(사실 까임이라기보다는, 청취를 꺼린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시에도 논쟁거리고 지금까지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현재 대다수의 견해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공개되지 말았어야 할 녹음인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48]처럼 클라이버의 단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연주도 있다.

  1. 이 때문에 에리히 클라이버가 유태인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그는 유태인은 아니다. 다만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내 Ruth가 유태인의 피가 섞인 미국인이었다. 때문에 에리히 클라이버가 유태인 혈통이 섞인 아내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는 식으로 많이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Ruth는 미국시민권자기 때문에 유태인이어도 박해대상이 아니었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유태인이 아니었는데도 전쟁 기간 동안 해외에 피신했기 때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에리히 클라이버를 조국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2. 지인에게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원 우리 애가 음악적 소질을 타고났지 뭔가"하며 한탄했다고 한다.(고도의 자식자랑?)
  3. 명문 취리히 ETH Zurich 바로 그곳 맞다. 유럽 최고의 명문 공대로,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지금도 세계대학평가에서 미국, 영국을 제외한 나라의 대학 중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카라얀도 유럽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인 빈대학 공대를 들어갔지만 학벌에서는 클라이버가 한 수 위.
  4. 졸업여부는 알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했을거라 본다. 이 분도 공부 잘했을 것 같다(...)
  5. wiki:"칼 뵘" 은 아버지께서 음악공부에 대해서는 기본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만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 박사학위를 따고 목적은 달성했다는 생각에 그대로 지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wiki:"먼치킨" 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칼 뵘이 받은 것은 phD.는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의사나 법학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계적으로 일반적으로 doctor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해 준다.(한국에서 의사면허를 따면 바로 미국에서 생물학 박사후 과정을 밟을 수 있다.)
  6. 아버지께서 음악공부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동안 독학으로 버텨왔다고 한다(...)
  7. 데뷔는 가명으로 했다. 아버지 후광 덕을 볼 생각조차 안했다고. 데뷔이름은 Karl Keller로, Keller는 독어로 지하실이라는 뜻이다. 이때 아버지는 어케 알았는진 몰라도 전보를 쳐 축하해줬다고(...)
  8.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9. 클라이버의 첫 공연 취소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됐건 아직 30대에 불과한 애송이 지휘자가 공연취소를 한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해외공연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더 컸다. 슈투트가극장의 지휘자였던 라이트너는 클라이버가 공연시작 40분 전에 전화만 줬어도 자신이 대타로 지휘해서 전액 환불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아무튼 슈투트가극장측은 객석을 채운 청중들에게 전액환불을 해줬을 뿐만아니라 애든버러 페스티벌 측에도 위자료를 물어야 했다. 클라이버는 이 스캔들 이후에 오히려 자신을 발탁해주었던 극장경영진들을 비난했고 심지어 그들이 자기를 해고하고 싶어도 노동법상 그럴 수 없었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10. 이 공연의 해적판 실황음반이 열악한 음질로 남아있다.
  11. 클라이버는 사실상 은퇴에 접어들 무렵인 95년까지 이곳의 개인사무실과 라커를 사용했다.
  12. 유튜브에있는 영상에서 보면 유럽 등지에서 지휘할 때보다 정말 행복해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3. 클라이버는 일본에 받은 엄청난 개런티를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14. 이것은 동년의 빈 국립가극장의 프로덕션을 그대로 일본으로 공수해서 공연한 것이었다. 천조국 미국에서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기획인데 당시 버블호황 끝자락에 있던 잽머니의 위력을 보여준 공연으로 국내를 비롯한 전세계의 화제를 모았던 공연이었다. 티켓값도 엄청나서 당시 한화로 약64만원에 달했다.
  15. Carlos Kleiber conducts Strauss
  16. 반응이 정말 좋아서 다시 한 번 해보지 그러냐는 매니저의 말에 "정말 싫다"고 했다(...)
  17. 여가 시간에는 자기 집에 있는 뮌헨과 연결된 아우토반에서 자신이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틀고 달리는게 취미였다고(...간지 작렬)
  18. 클라이버 본인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19. 건강했다면 지금까지 생존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녹음을 꺼려했기 때문에 음반을 많이 남겼을 것 같지는 않다.
  20. 개성적이기 때문에 연주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처음에 듣기 좋았다가 나중에 잡기 꺼려진다고 하는 부류가 가장 많았다.. 아니 의외로 그렇게 된 사람이 절반.. 지금까지 계속 듣는 사람이 전체 청취자의 절반이라고 알려져있다.
  21. 클라이버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역동적인 곡이 많으며 서정적인 곡을 거의 지휘하지 않았지만, 일생에 단 한번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6번 녹음에서 그의 단점이 잘 나타난다. 그 밖에도 베토벤 교향곡 5번의 2악장을 비롯해 느린 악장의 연주만 떼어놓고 보면 의외로 경직되어 있는 편이다.
  22. 여러 녹음이 남아있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나 4번을 보면 가장 젊은 시절의 녹음이 퀄리티가 좋고 나이가 들수록 퀄러티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23. 칼 뵘도 무대위에선 호랑이 밖에선 아버지였다지만.. 근데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그렇지 못했다.
  24. 관객없이 마이크만 있는 무대를 정말 싫어했다
  25. 음반은 적지만 명반이 많다. DG 디오리지날에서 몇개 안올라오긴 했지만 아마 그가 녹음한 음반 개수의 절반 이상은 올라왔으리라 본다. 카라얀을 제치고 5&7번이 명반 대열에 오른 것만해도.. 뭐 평가는 자유다.
  26.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실황이 라디오로 중계된다고 하자 지휘자실에서 나오지 않은 유명한 사건 뒤로는 맘에 안들면 밑도끝도없이 공연 안한다고 퇴짜놓는 고질병이 되었다.
  27. 이 곡이 씌어질 당시 베토벤 애인이 테레스였다면서 2악장 시작부 바이올린 선율이 마치 "테레스, 테레스"같이 들리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수시로 연주를 중단시키며 "테레스 테레스"가 아니라 "마리 마리"같이 들린다고 지적한다. 당연히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빡쳤고, 지휘자에게 대드는 음성도 나온다.
  28. 3주 내내 "마리 마리" "테레스 테레스" 해대다가 그마저도 맘에 안들면 공연을 없었던 일로 해 버리기도 했다.
  29.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초 비제의 wiki:"카르멘"을 지휘하기로 되어있었다. 당빠 취소했다. 제기랄
  30. 5번은 용두사미라는 평가가 있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을 잃는다는 혹평이 있는데, 1악장은 리듬감이 죽이기 때문에 1악장만 듣고 치운다는 사람이 제법 많다. 4악장이 많이 까여서 상대적으로 가려있지만 2악장도 사실 상당히 별로다. 빈 필이 이렇게 뻣뻣하게 2악장을 연주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을 정도.
  31. 7번은 일부 클라이버빠들이 DG녹음 탓으로 매도하고 있지만 금관이 많이 약한 탓에 하이브리드 SACD로 발매된 오르페오의 80년대 실황을 많이 찾는다.
  32. 이외에도 초창기 하이든 등 지휘한 녹음은 일부 있으나 만년으로 갈수록 베토벤과 모차르트, 브람스의 교향곡만 자주 지휘했다.
  33. 60년대만 하더라도 지휘할 수 있는 오페라가 120여개였다고 한다.
  34. 리허설 과정이 너무 힘들다 보니 본인 스스로가 지쳐 레퍼토리를 줄여버렸다.
  35. 하도 카를로스가 공연을 자주 안하자 "쟤는 꼭 냉장고가 빌 때만 포디엄에 서는 군"하며 빈정댔다고 한다. 사실 이 드립은 클라이버가 카라얀에게 직접한 말이다. - 냉장고 드립은 첼리비다케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드립이 유명해져서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 같다.
  36. 카라얀과 서로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 사이였다.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음악에 관한 토론을 자주 나눴다.
  37. 참고로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라얀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사실 에리히 클라이버의 성격이 지랄맞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음악계에 적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에리히 클라이버는 유태인이 아닌데도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에 피신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대중들은 에리히 클라이버가 전쟁이 두려워 조국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여겨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종전 후에 빈에 복귀했을 때, 빈 여론은 싸늘했고, 당시 연주 금지 상태에 있었던 다수의 독일 지휘자들도 에리히 클라이버를 좋지 않은 얘기를 했다. 카라얀조차도 이때 에리히 클라이버를 비난했는데, 리처드 오스본에 따르면 카라얀이 다른 지휘자를 비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38. 클라이버의 지휘를 신의 기술이라고 칭송한 한 지휘전공자의 주장이다.
  39. 카라얀은 1975년 폴리도어와 포괄적 재계약을 채결하기 이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곡을 마음대로 녹음할 수는 없었다. 카라얀은 50세가 될때까지 EMI에서 월터 레그가 원하는 곡을 녹음해야 했기 때문에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장난감 교향곡, 발라키레프 교향곡 등 자신의 레퍼토리 밖에 있는 곡들도 다수 녹음할 수 밖에 없었다. 카라얀이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 대해 '녹음전에는 이곡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연주하다 보니 괜찮더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녹음은 그라모폰의 리코맨디드 레코딩으로 추천받고 있다.흠좀무 DG로 이적하고 난 후에도 오페라, 브루크너 교향곡,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비롯한 일부 레퍼토리의 재녹음 등을 원했지만 DG측의 거절로 녹음할 수 없었다
  40. 뒤트와는 자신이 프랑스 전문 지휘자로 알려진 것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프랑스 곡만 녹음한 것은 음반사가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며, 자신은 베토벤을 가장 녹음하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41. 르네 콜로는 76년 카라얀과 EMI에서 로엔그린을 녹음할 때도 카라얀과 격렬한 언쟁을 벌여 결국 녹음이 중단된 전례가 있다. 이때 콜로가 카라얀에게 "로엔그린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전세계에 다섯명이 안되지만, 로엔그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도 1000명(500명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은 된다."라고 한 드립은 유명하다. 중단된 이 녹음은 5년 후인 81년에야 가까스로 재개되어 완성되었다.
  42. 녹음 세션 전에 열흘이나 사전 연습 세션을 할당한 덕분에 가능했다.
  43. 클라이버는 이후 DG사를 X같은 회사라고 불렀는데, 슈투트가르트 가극장 스캔들과 더불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예라 할 수 있다.
  44. 가끔씩은 마이크 주변에 뭐가 부딪혔는지 틱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45. 그 결과 89년 신년음악회는 음반은 소니, 영상물은 DG에서 발매되게 되었다. 때문에 이 두 회사는 높은 판권료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에서 동일한 신년음악회의 음반/영상물이 발매되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음반사에게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 두 회사의 마케팅 경쟁 덕분에 89년 신년음악회 음반과 영상은 예년에 비해 큰 판매고를 올리게 되었고 클라이버도 예상보다 더 많은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다.
  46. 취리히연방공대 출신, 유럽 최고의 공대로 아인슈타인 등을 배출했다.
  47. 서로 배우자에게는 비밀로 붙이고 평생 관계를 지속해왔다고 한다. 브람스 교향곡 4번 레코딩의 한 패시지의 해석이 바순 연주자였던 그녀와의 잠자리 중에 결정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클라이버가 자주한 말은 '내 숨소리 어때'
  48. 클라이버의 평전을 쓴 찰스 바버 조차도 전원 연주는 끝내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