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토스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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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인 감정을 요구하는 토스카니니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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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커버에도 실린 슈퍼 먼치킨.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중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위 사진에 나오는 격정을 느낄 수 있다. 이때 토스카니니의 나이는 86세.

1943년 브람스 교향곡 제 2번 리허설 음원. 리허설 중에 불같이 성을 내는 토스카니니를 들어보면 NBC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불쌍해질 지경이다(...). 노!노!노!

Arturo Toscanini

1 개요

1867년 3월 25일 ~ 1957년 1월 16일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로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생애

토스카니니는 파르마의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클라우디오 토스카니니는 젊은 시절,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 군단에서 활동하였던 열혈한 민족주의자였는데 이 같은 화끈한(...)성미의 행동주의와 적극성은 아들 토스카니니도 그대로 닮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의 토스카니니는 몸이 허약해서 항상 특별한 식이요법을 받는 등 건강에 많은 위협을 받았으나 곧 건강을 되찾고 음악에 재능을 보여 파르마 국립 음악원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부모님은 토스카니니의 음악원 입학을 꺼려했으나 토스카니니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음악원장 다치가 토스카니니를 장학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비로소 토스카니니는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1]

첼로작곡, 지휘를 배웠는데 매우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엄격한 음악원의 생활규칙 탓에 고집이 세고 완고한 성격의 토스카니니는 학교 측과 자주 충돌을 빚는다. (당시 음악원의 생활은 지금의 사관학교보다 더 빡센 정도였다...)

이 때의 유명한 일화로는 선생에게 대든 것에 대한 벌로 독방에 갇혀 첼로연습을 하던 토스카니니가 화장실 이 가고 싶었으나 (단단히 앙심을 품은) 선생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첼로를 변기대용으로 썼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또 졸업을 앞두고 교사 징계 위원회에 기소되어 교칙을 위반한 친구의 이름을 고자질하라는 학교측의 타협을 그 자리에서(!) 거부하여[2] 졸업이 취소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토스카니니의 재능을 눈여겨 보던 음악원 원장과 담당 교수가 여러 모로 힘을 써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던 일도 있다.

본디 토스카니니는 첼리스트로 데뷔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그는 고향 파르마 오페라 극장의 객원 첼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졸업 후에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하여 베르디의 명작 오페라 오텔로 (훗날 토스카니니는 이 오페라의 권위적인 해석자가 된다, 지휘자로서)의 초연에 참가하는 등 첼리스트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1886년 6월 30일, 토스카니니는 로시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서 브라질에서 <아이다>공연에 참가하였는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에서 말싸움을 벌이고 관객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는 등 연주가 잘 되지 않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공연 도중에 갑작스레 퇴장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황한 연주단원들은 <아이다>의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토스카니니를 대리지휘자로 떠밀었는데 얼떨결에 대타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는 암보(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것)로 <아이다>를 지휘하여 실패했던 공연을 순식간에 성공리에 이끌어낸다.

토스카니니가 <아이다>의 악보를 외우고 있을 수 있던 것은 토스카니니가 선천적으로 시력이 아주 안 좋아 보면대의 악보를 보고 연주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연주 전에 미리 악보를 외워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3]

파시즘 때문에 미국으로 갔으며[4] 미국 이후 생을 마감할 때 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뭐 거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로 인식되지만[5] 실제로는 토스카니니가 19살 연상으로 훨씬 윗 세대의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성기는 NBC교향악단 녹음으로 남아있는 시기보다 앞인 1920~30년대 무렵이라고 한다.[6] 그만큼 활동 시기가 길었다는 이야기.

3 그에 대한 평가와 유명한 일화들

토스카니니의 음악을 들으면 뭔가 낯익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만큼 후대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 예로 들 수 있다. 1960년대 카라얀은 토스카라얀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강인한 리듬과 굵은 골격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당당히 울려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함께 연주하였던 단원들은 그의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토스카니니는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널러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다. 토스카니니가 오페라에서 악보에서 크게 벗어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악보대로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는 한다.[7] 그러나 토스카니니가 악보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과 같이 베토벤이나 다른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악보에 가필을 해서 연주했던 지휘자다. 다만 토스카니니는 템포면에서 템포 루바토를 거의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서는 더 악보에 충실하게 지휘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악보의 가필 문제에 있어서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가필을 한 지휘자에 속한다. 거의 리-오케스트레이션 수준의 가필을 한 것으로 알려진 말러와 비교해봐도 뒤지지 않는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말러가 4관 편성으로 개작한 악보로 연주한 음반과 토스카니니의 음반을 비교해 보면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곳곳에 수시로 호른을 가필한 것은 물론이고 바이올린의 옥타브를 높이는 등의 조정한 곳도 여러 곳 있다.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멜로디 라인을 살짝 바꾼 곳도 있다. 팀파니의 가필도 눈에 띈다. 호른이나 트럼펫은 내추럴 악기의 한계 때문에 가필하는 것이 어느정도 용인되지만 이와 관련없는 다른 악기들도 개의치 않고 뜯어고쳐 연주하고 있다.

토스카니니의 암기력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일화가 다 전설수준이다.

1.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라고 불같이 호령을 하여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 있었다 한다.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는 별명을 불렀다 한다(출처: 위키페디아) <Art of Conducting : Great Conductors of the Past>의 토스카니니 파트를 보면 지휘하다 말고 불같이 성을 내는 그의 육성 녹음을 들을 수 있다. 현존하는 동영상들을 보면 연주가 틀릴 경우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해 단원을 쏴죽일 듯하다는 평도 있다. 흠좀무

2.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노 프란체스카티도 한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뒤 사임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스카니니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주관과 열정이 마력처럼 자신을 사로잡아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출처: 고클래식 웹진)

3. 그는 남들이 은퇴할 나이에 NBC교향악단을 새로 맡았고, 그 이후 엄청난 양의 레코드를 남겼다, 그것도 모자라 90세부터 10년동안 녹음할 계획도 짰다고 전해진다.(출처: 고클래식 웹진)

4. 파티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60대 후반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저 늙은이들이 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신나게 놀아보자" 라고 했다는데 이때 토스카니니의 나이가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출처: 고클래식 웹진)

5. 툭하면 지휘봉을 부러뜨리고 던지고 할 정도로 심하게 다혈질 적이라서 재수없을 때는 단원의 눈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한번은 그의 지시를 거부하던 단원의 바이올린활을 강하게 내리쳐 부러진 활이 단원에게 맞기도 하였다. 분개한 단원과 몸싸움이 일어날뻔 하기도.

6. 연주 중 화가 나면 시계나 집기를 던지는 일이 있었으므로 토스카니니의 한 팬은 그에게 연습때 차는 시계와 연주때 차는 금시계를 함께 선물하면서 연습용과 연주용이라는 표시를 했다 한다. 좋게말하면 열혈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 그 자체다. (출처: 위키페디아)

이와 비슷한 일화로 자신도 본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끼는 금장 시계의 복제품 시계를 가지고 연습에 임한 적이 있었다. 역시 연습 중에 성질을 이기지 못한 그는 시계를 내던졌고 당연히 박살났다. 겁에 질린 연주단원들은 이후 실수 없이 연습을 끝냈는데, 마치고 나오면서 그는 읊조렸다. "진짜 시계인지 가짜 시계인지도 못 알아보는 놈들에게 잘 하기를 바라는 내가 멍청이지!"

7. 하루는 집에서 라디오 음악을 듣고 있다가 연주에 화가 난 나머지 "당장 저 지휘자를 끌어내라고 연락해야겠어!"라고 날뛰는 것을 가족들이 애써 뜯어말렸다. 이유는 연주 시작 전에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라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

8. 1954년 4월 4일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을 연주 도중 갑자기 지휘를 멈추고 30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태가 일어났다.[8] 나이는 못속인다.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실신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다행히 정신을 차려서 나머지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그는 박수를 뒤로 하고 비틀거리며 사라졌고 그 이후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점이, 토스가니니는 이미 이 연주회를 열기 몇 일 전에 슬슬 은퇴를 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아도(물론 은퇴를 하게되는 결정적인 헤드샷이긴 했지만.) 이 시기쯤해서 토스가니니는 은퇴했을 것이다. 이 날 연주회는 통째로 녹음되어서 최근 마이너 레이블에서 찾아볼 수 있다.

9. 그가 죽은 뒤 NBC교향악단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휘자 없이 연주하다 그와 운명을 같이했다는 일화는 거의 전설급이다.[9] (다만 그들의 연주홀인 NBC홀도 그렇게 구렸다지… 덕분에 NBC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들은 잔향이 극도로 적고 소리가 메마른 느낌을 준다).

10. 본인이 생각할때 그날 공연이 시원찮았으면 실의에 차서 힘없이 집으로 들어가는데, 만약 가족들이 식사 준비를 하면 '이런 공연을 하고 밥을 먹을수 있다니!'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가족들까지 굶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고 한다.

11.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적극적으로 이탈리아에 소개한 사람이다. 바그너의 경우는 그 아들인 지그프리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잘츠부르그에서도 지휘를 했었는데, 이것이 파토난 이유는 히틀러 때문. 독재를 혐오했던 그는 지그프리드 사후 바이로이트가 히틀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자 지휘를 거부하였다.

1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중 일부를 작곡가 본인의 허락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공연 시기와 거의 같은 때 근처에서 슈트라우스 본인이 바로 그 곡을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믿고 있다 뒤통수를 맞은셈. 토스카니니는 그날 새벽 기차를 타고 슈트라우스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슈트라우스! 난 작곡가로서의 당신에게는 (경의의 표시로)기꺼이 모자를 벗습니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당신에게는 모자를 열개라도 쓰겠소!'

13. 독재를 혐오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도 대립하였는데, 당시 공연전에 필수적으로 강요되던 파시스트 당가(조비네차) 연주를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무솔리니가 참석한 공연에서도 연주하지 않아 무솔리니가 화를 내며 돌아간 적도 있다. 그 뒤 공연을 하기 위해 극장에 가던 그를 파시스트 당원들이 둘러싸고 '조비네차를 연주하시오'라고 협박했다. 토스카니니의 대답은 그답게 조까'싫어'였고 파시스트 당원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으로 망명. 아이러니한건 위에도 나온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토스카니니 본인도 '독재자'란 별명이 있었다는 것......

14. 당대에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제랄딘 파러와의 입씨름도 유명하다. 파러가 '전 스타(별)라구요'라고 하자 토스카니니는 '하지만 태양앞에선 모든 별들이 빛을 잃는답니다'라고 응수한 것. 토스카니니는 당시 유명 오페라 스타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곡에 변형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지휘자의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때문에 파러와 입씨름을 벌인것. 그런데 정작 그 뒤에 둘 사이에 염문이 있었다(...).

15. 토스카니니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이 라디오 중계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방송을 듣던 한 가정의 카나리아들이 합창 부분에 맞춰 일제히 지저귄 일이 신문 기사로 나왔다. 토스카니니는 NBC방송국의 교향악단 결성 제의 당시 이를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하였다. 단원들의 대우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나 정확한 내막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설득을 위해 찾아간 지인 초트치노프가 이 신문 기사를 보여주자 마음이 바뀌어 승낙하였다고 한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기분이 아주 좋은 날 술이 몇잔 들어가고 나서..)

16. 토스카니니는 자코모 푸치니와 친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그 만큼 서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하루는 둘이 엄청 싸워서 아예 말도 걸지 않았고, 편지조차 주고 받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즈음에 푸치니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빵을 보내다가 그만 토스카니니한테도 그 빵이 보내졌다고 한다. 토스카니니는 그것이 푸치니가 보낸 줄도 모르고 그 빵을 당연히 먹어 버렸다. 이에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보내버렸음."이라는 전보를 보냈고, 토스카니니는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어버렸음."라는 내용으로 답변을 보냈다고한다. 이후로도 둘은 서로 티격대격 거리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현실판 츤데레 훗날 푸치니가 남긴 미완성 유작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후배인 알파노가 푸치니의 노트를 참고하여 완성시키는데 토스카니니는 초연에서 완성본의 연주를 거부하고 푸치니가 작곡한 마지막 부분인 <류의 죽음>까지만 공연하였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 '이 오페라는 여기서 끝납니다. 원작자가 사망하여 뒷부분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퇴장해버렸다.
  1. 이는 라이벌로 여겨지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는 무척 대조되는 점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집안이 매우 유복하여 사비를 들여 가정교육을 받을 정도였다. 이전까지 토스카니니가 받은 정규교육은 동네교회에서 주선하는 학교와 더불어 아버지와 같이 오페라 극장의 공연을 보러가는 정도였다. 물론 당시 이태리에서 오페라극장은 지금 한국의 영화관과 비슷한 오락거리였다.
  2. 대화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3. 기억력도 좋은 편이어서 아무리 복잡한 악보도 두 세번 훑어보면 완벽하게 외워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악보를 외워서 지휘하는 지휘자는 이전, 이후에도 있긴 했지만 토스카니니는 각 악기 파트별로 다시 외워서 옮겨 적을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암기력도 좋았지만 한 악보를 자기가 만족할때까지 지독할 정도로 반복해서 연구했기 때문.
  4. 완전 영주를 일컫는말. 물론 그전에도 미국에서 상당히 활동했었다. 젊은 시절에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그를 영입했는데 문제는 그때 이미 그곳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있었다는 점. 병이 나기 전의 말러는 토스카니니 못지 않은 성질머리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만 이때는 말러가 병이 난 이후였기 때문인지 토스카니니에게 밀렸어도 맞설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대신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에 집중하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윈윈? 토스카니니 본인은 사석에서 '지휘자로서의' 말러를 극찬한 적도 있었다. (말러는 당대에 지휘자로 더 유명했기 때문)
  5.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
  6. 하지만 음질은 열약하여, 그의 전성기를 만끽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7. 그러나 사실 다카포 양식의 아리아에서는 악보에서 변화를 주어 부르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이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곤란한 부분이다.
  8. 순간적으로 브람스 교향곡이 땜방으로 나갔다고 한다.
  9. 이 시기에 DG라든지 RCA등 수많은 녹음을 남겼고, 우리나라에도 내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