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tle of Kleidion
1 개요
1014년 7월 29일, 테살로니키 북쪽에 위치한 캄발롱구스 협곡의 클레이디온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엘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 이 전투로 681년 불가리아 제국 건국 이래 300년 넘게 이어져 온 불가리아-비잔티움 제국의 전쟁이 끝나고, 1차 불가리아 제국이 망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배경
681년 불가리아 제국 건국 이후로 지속 되어온 불가리아- 비잔티움의 전쟁에 양국 모두 상당한 국력을 허비했다.
811년 크룸 칸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니케포로스 1세를 죽여 그 해골에 은을 발라 술잔으로 썼다(...)
813년 레오 5세는 협상을 빌미로 크룸 칸을 죽이려 했고, 이에 분노한 크룸은 트라키아 전역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시메온 치세 때 불가리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 앞까지 갔으나 함락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971년, 요안네스 치미스케스 황제가 스뱌토슬라프의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동부 불가리아가 비잔티움 제국에 합병되었다. 이때 일시적으로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강제 폐위되었다.
976년, 요한네스 치미스케스가 죽자 바실리우스 2세가 제위에 올랐다.[1]
986년, 내부 아나톨리아 귀족의 반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바실리우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불가리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소피아 부근에서 참패한다.[2] 이때부터 그는 불가리아에 천추의 한을 품게 되었다.
989년 2월,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반란이 모두 제압되었다. 내부의 적이 없어진 황제는 이제 불가리아로 창끝을 돌렸다.
997년, 불가리아군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기세 좋게 쳐들어갔으나 테르모필레 부근의 스페르키오스 강에서 궤멸당한다.(...)
1005년,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불가리아군이 집요한 비잔티움군의 공격에 대패함.
1014년 5월, 불가리아군은 다시 한번 크레타에서 박살나고,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 국경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014년 7월, 바실리우스 2세가 직접 군을 지휘하고 불가리아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차르 사무엘이 불가리아군을 이끌고 캄발롱구스 협곡에 성벽을 쌓아 진을 쳤다.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 본토로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캄발롱구스에 있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해야 했다.
3 그 날
1014년 7월 19일에 불가리아의 짜르 사무엘이 이끄는 불가리아군과 비잔티움의 바실레스 바실리우스 2세가 이끄는 비잔티움군이 캄발롱구스 협곡의 클레이디온에서 격돌했다. 초전에는 불가리아군이 협곡을 끼고 로마군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그러자 바실리우스 2세는 니케포루스 크시피아스에게 명령을 내려 벨라시차 산을 우회하여 불가리아군의 배후를 찌를 것을 명령했다. 니케포루스 크시피아스는 험로를 따라 불가리아군의 배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7월 29일 바실리우스 2세와 크시피아스는 불가리아군을 협공하여 방어선을 돌파한다. 사무엘과 그 아들 가브리엘 라도미르는 근처에 있는 스트루미차로 후퇴하려고 했지만 로마군은 신속하게 추격에 나섰다. 악전고투 끝에 사무엘은 가브리엘의 용맹스러운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혈로를 뚫고 도망쳤지만 주력 부대는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혔다.
4 결과
전투는 비잔티움의 대승으로 끝났다. 비잔티움군은 불가리아군 포로를 15,000명이나 포획했으며, 이로써 불가리아군의 주력은 대부분 와해되었다. 다만 이 전투로 불가리아가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한 바실리우스 2세는,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테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은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리엘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리엘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손실은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우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한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명백했다. 후속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일격을 가해 비잔티움 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불가리아의 피해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포로가 1만 5천명이라면 전사자와 사상자, 도주 병력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며, 사실상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적 역량은 사실 클레이디온에서 거의 박살이 났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야사에서는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군 포로 15,000명을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로 바실리우스 2세에게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실제로는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불가리아군이 15,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잃은 것은 사실이다. 불가리아가 전투에 투입한 병력은 35,000명으로, 전체 병력의 최소 1/3을 넘는 병력을 잃은 불가리아군은... 그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며 병력만 남겨두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불가리아의 사무엘은 전투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는데, 사실은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쓰러져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인 가브리엘 라도미르도 내분에 휩싸여 암살당했고, 바실리우스 2세는 느긋하게 소모전으로 나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