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포로스 1세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이레네니케포로스 1세스타우라키우스
이사우리아 왕조니케포로스 왕조니케포로스 왕조

코이네 그리스어: 니케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현대 그리스어: 니키포로스 1세
라틴어: 니케포루스 1세(Nicephorus I)

? ~ 811, 재위기간 802 ~ 811.

동로마 제국황제. 선조는 아랍인으로 가산 왕국의 왕족이었다고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이래로 오백 년 만에 등장한 아랍인 로마 황제기도 하며, 죽어서 술잔이 된 황제로도 알려진다.(근데 선조가 아랍인이라고는 하지만 연대기에 그려진 모습을 보면 금발벽안이다.아무래도 피가 많이 섞인 것 같다.당시 로마제국.특히 6~10세기경의 로마제국은 게르만 슬라브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게 보이는데 사민정책으로 인해 근 백만의 슬라브인과 게르만인들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로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인종적으로도 당시 소아시아는 금발벽안이 굉장히 많았으며 금발벽안의 황제들도 상당수 있었다.오히려 콤네누스 시기 이후로는 굉장히 까무잡잡한 현재 터키인적인 얼굴로 변해가는데 이건 역시 만지케르트 이후 투르크-아랍인들과의 피가 많이 섞인 탓이다.)

서기 800년, 로마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서로마의 대관을 씌어주고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당시 로마 그 자체였던 동로마 제국을 엿먹였다. 게다가 자신이 보호자로서 군림하던 교황의 손에 황제라는 지위의 정통성이 휘둘리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샤를마뉴는 교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짜 로마 제국의 여제였던 이레네에게 접근하였는데, 인망과 지위를 잃어가던 이레네는 이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였다.[1]

안 그래도 동로마의 사람들은 로마 교황의 행동으로 제국의 긍지와 자존심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제였던 이레네까지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갑툭튀듣보잡 괴뢰 황제에게 정통성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결국 폭발하였으며, 802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이레네를 폐위시키고 추방하였다.[2] 그리고 당시 이레네에 의해 재무 대신으로 임명되었던 니케포루스를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에서 이사우리아 왕조가 막을 내리고 니케포루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이루어진 정책은 수도원에 대한 세금 감면 정책의 폐지였는데, 전임 황제였던 이레네가 지지기반이었던 교회에 너무 많은 특혜를 주면서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틈만 있으면 교회와 수도원을 압박하여 국가 재정 확충을 꾀하였으며, 상당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야이 막장 황제야!"라면서 수시로 디스질을 해댔다. 이 디스질은 죽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더불어 이슬람교의 세력 확장과 주변 이민족들의 위협, 샤를마뉴의 압박 등으로 인해 주변도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일단 확보한 재정을 바탕으로 자영농들을 대거 징집하여 정규군으로 편성하고 훈련을 하여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려 하였다.

일단 첫타는 압바스 왕조와의 대립이었다, 당시 칼리프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요구하였는데[3] 니케포루스 1세는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805년부터 806년까지 양측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는데, 동로마 제국군이 크게 패하는 바람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압바스 왕조에 대한 니케포루스 1세의 외교적 실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분명 사방에 불가르 족이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같은 막강한 적수들을 두고 있으면서 니케포루스는 제국 동부 지역에 위치한 이슬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하룬 알 라시드와의 평화 조약을 무려 세 번이나 본인 쪽에서 어기면서 강력한 적을 본인 손으로 더 늘렸다. 물론 이는 전대 황제인 이레네 여제 시절 맺어버린 불평등한 상하관계평화 조약을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서나, 막대한 조공 금액이 아까워서나, 제국 귀족들의 요구 때문에라도 깨뜨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4]

하룬 알 라시드 입장에서도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이 국경을 넘어 호라산 일대를 약탈하려고 들고 하마단 총독의 반란 획책 소문 등으로 제대로 된 침공을 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압바스 왕조 최대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사방에 적을 둔 니케포루스는 이 때 잘못했으면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번째로 평화 조약을 파기했을 때에는 당시 하마단 총독을 추궁하려 병력을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라시드가 매우 딥빡쳐서분노하여 약 14만여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어버렸다. 라시드가 만약 좀 무리를 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성하려고 들었다면 어떤 사태로 이어졌을 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니케포루스는 결국 다시금 조공을 바치겠다고 허리를 굽혔으며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동의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한편 806년에는 여전히 동방제국의 제위를 탐내던 샤를마뉴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여 맞서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샤를마뉴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을 놓고 벌어진 분쟁은 훗날 니케포루스 1세가 죽고 난 후 맺어진 조약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니케포루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최대의 골치거리는 불가르족이었다. 크룸으로 등장하면서 하나로 통일된 불가르족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위협하였으며, 제국의 영토에도 자주 침입하였다. 특히 초창기에는 불가르족에게 밀려난 슬라브족들이 제국 영토로 대거 침입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니케포루스 1세는 그리스인들을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주시키고, 제국에 침입한 슬라브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정착을 도우면서 안정을 꾀하였다. 사실 이레네부터 추진하던 정책이긴 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밀어붙여 콘스탄티누스 5세가 거둔 귀중한 발칸에서의 군사적 성과 토대를 정치적, 경제적 성과로 굳힌 것인 니케포루스 1세다.

다음으로 불가르족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대응하려 하였다. 불가르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809년에 불가르족의 수도였던 플라스카를 털어버렸으며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하여 811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였다. 1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던 덕분에 초반에는 크룸의 불가르족들들 개발살냈는데 이 때 크룸이 당황하여 사절을 보내 화평을 애걸할 정도로 위세를 날렸다. 하지만 이 참에 불가르족의 위협을 뿌리채 뽑아버릴 심산이었기에 화평을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하지만 811년 7월 24일, 도망가는 불가르족을 추격하여 좁은 협곡으로 들어갔다가 그만 함정에 빠져서 갇혀버리고 말았다. 유리한 고지를 장악한 불가르족은 니케포루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을 포위하여 맹공격을 가했고 결국 동로마 제국군은 완전히 괴멸당했다. 황제 니케포루스 1세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시신은 불가르족들이 수습하여 참수하였고 몸 부분은 승전의 상징으로 전시되었다가 버려졌다. 그의 두개골은 으로 도금하여 크룸이 죽을 때까지 술잔으로 사용하였다. 여담으로 한참 전인 기원전 452년,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양자가 숙적 지백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칠하여 술잔으로 만든 적이 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 황제 이후 두 번째로 전선에서 전사한 동방제국의 황제로 기록되었으며 최후가 상당히 비참한 황제이다.

아들 스타우라키우스가 그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역시 이 전투에서 척수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만 건진 상태였고 당연히 제대로 황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3개월 만에 죽었는데 차기 황제로 황후 테오파노를 임명하려 했으나, 궁정에서는 스타우라키오스의 매형[5]미카일 1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1. 이레네 딴에는 샤를마뉴를 적당히 공동 황제로 격상시켜 외세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와 세력을 보조하게 할 속셈이었겠지만, 샤를마뉴 딴에는 공동 황제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살라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국왕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위가 공석이나 다름없이 보였을 것이다. 둘 다 이 어마어마한 혼사의 결과를 자기 나라 관습대로만 안일하게 내다봤던 것.
  2. 백년 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의전서에 동로마 황실이 외국인에게 결코 넘겨 주어선 안 될 세가지를 명시하는데, 첫째가 로마인의 최종병기 그리스의 불 제조법이었고, 둘째가 황실에서 나고 자란 공주였으며, 셋째가 황제의 머리 위에 씌어지는 자줏빛 제관이었다.
  3.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전 황제인 이레네 여제 시절에는 싸움을 피하고자 바쳤던 조공을 니케포루스가 즉위하고 바치지 않자 하룬 알 라시드가 "너희들 조공 바치기로 해놓고 왜 안 바치냐."고 추궁해온 것에 가깝다.
  4. 이슬람 압바스 조 시기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레네 여제 시절에는 비잔티움 제국 측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자처하며 압바스 조 쪽을 우대하는 문맥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었는데 니케포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압바스 조 쪽을 로마 황제에게 통보를 받는 지방 군주 쯤으로 격하시키는 표현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었다고 한다. 이러한 외교문을 통보받고 하룬 알 라시드가 너무나 격분하여 당시 궁정에 있던 대소신료들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5. 니케포루스 1세의 딸 프로코피아의 남편으로 니케포루스 1세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