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로마 제국의 황제
생애 : 1118~1180
재위 : 1143~1180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
요안니스 2세 | ← | 마누일 1세 | → | 알렉시오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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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게 대제(Megas) 칭호를 받은 황제이다. 그가 재위하던 12세기 중후반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 중의 하나이며, 마누일은 37년의 재위기간에 걸쳐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진력했다. 이 시기는 중세 성기에 들어와 역전되기 시작한 동방제국(帝國)과 서방제국(諸國)의 역학관계가 완전히 역전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국제질서하에서 마지막으로 강대국의 면모를 과시한 시기이기도 하다.
마누일 재위 중후반의 로마제국은 헝가리 왕국, 예루살렘 왕국, 조지아 왕국 등은 물론 이슬람 국가인 룸 술탄국 마저 외교력, 혹은 군사력으로 제국의 영향권 밑에 두고 프리드리히 1세의 신성 로마 제국과 유럽의 패권을 다투었다. 경제력으로는 수배의 영토를 가졌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제국과 비교할 정도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해군, 상인, 화폐 등은 해외의 이집트, 이탈리아, 러시아 지역 너머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평가는 다소 교차되는데, 외교에 치중한게 저평가되지만 오히려 서방 세력과 되도록 힘의 균형을 이루려했던 그의 정책은 높이 평가 될만하다. 지나치게 권모술수를 부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고립적인 성향이 너무 심했던 그의 조부 알렉시오스 1세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그의 큰실수는 거꾸로 내정의 실패와 후계자 안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누일 자신은 황제로서 부하들을 감시하고 지방의 민심을 살필 줄 아는 관리자였으나, 치세 말기의 군비 지출과 친서방 정책 등이 맞물린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점점 심해지는 부익부빈익빈으로 서민층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갔고 이것이 반서구 감정으로 이어졌다. 유일한 적자인 알렉시오스 2세가 지나치게 늦게 태어난 반면, 마누일 자신은 아들이 장성하기 전에 죽음으로써 지지기반이 부족한 섭정단과 야심많은 친족들 사이에 후계자를 노출시키고 말았다. 결국 이는 권력다툼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민심에 편승한 안드로니코스 1세가 집권하여 그의 외교 정책까지 모조리 파탄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1 제위 계승
마누일 1세는 요안니스 2세와 헝가리 출신의 황후 이리니 사이의 여덟째 자식으로, 넷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는 헝가리 왕국의 왕 라즐로(라디슬라우) 1세였다. 4남으로서 형이 셋이나 있던 상황이었으나, 1142년 큰형과 작은형이 죽자 제위를 가시권에 두게 되었다. 1143년 동방 원정중에 킬리키아에서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죽자, 그는 진중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누일은 즉시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그의 계승이 확실히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살펴야 했으며, 제위계승권이 있는 셋째 형 이사키오스와 삼촌 이사키오스 등의 다른 친족들을 견제해야했다. 마누일은 제국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악수흐를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로 보냈다.
악수흐는 선황의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는 신속하게 다른 제위계승권자들의 신병을 확보했으며, 마누일의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았다. 덕분에 1143년 8월 마누일이 수도에 귀환했을 때, 그는 무난히 총대주교에게 제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그 후 자신의 제위가 확고해지자 다른 계승권자들을 석방했으며,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보냈다.[1]
마누일이 요안니스 2세에게 물려받은 제국은 8세기 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반을 닦아 놓은 뒤로 많이 변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이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를 포함해 일부 수복했으나 7세기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의 상당 부분을 이슬람에게 빼앗겼다. 11세기에 시칠리아를 차지한 노르만 족은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있었으며. 룸 술탄국은 여전히 소아시아 중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발칸에서는 헝가리 왕국이 아드리아 해와 세르비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레반트에서는 십자군 국가들이 제국에 도전하고 있었다. 황제의 과업은 실로 벅찼다.
1.2 제2차 십자군 원정
마누일 1세의 치세에서 첫 번째 시험은 1144년에 찾아왔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 레몽이 킬리키아의 이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말, 이웃의 에데사 백국의 십자군은 이마드 앗딘 장기 1세 아래 다시 일어난 이슬람 성전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레몽은 서방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티오키아의 동쪽 측면 역시 이 새로운 위협에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선택 사항은 없었고, 결국 레몽은 굴욕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할 준비를 해야 했다. 자존심을 가라앉히고 레몽은 황제에게 보호해달라고 하기 위해 북쪽으로 여정을 떠났다. 마누일 1세에게 굴복한 뒤에, 레몽은 그가 요청하면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제국에 대한 레몽의 충성심은 보장되었다.
1146년에 마누일은 군대를 집결시켰고 룸 술탄국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당시 룸 술탄국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제국의 국경을 반복적으로 침략하고 있었다. 영토에 대한 체계적인 정복에 대한 어떤 시도도 없었으나, 마누일의 군대는 아피온카라히사르에서 투르크를 이겼다. 필로멜리온의 요새화한 도시가 무너지고 점령되기 전에, 그리고 그곳에 남아있는 기독교도들이 사라지기 전이었다.
제국군은 이코니온에 이르렀고 외벽의 상당부분을 파괴했으나 도시를 최종적으로 공략할 수는 없었다. 이 침공을 시작하기 위한 마누일의 동기 중에는 십자군의 견해를 활발히 옹호해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었다. 킨나모스는 이것을 마누일이 새 신부에게 전쟁에 대한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욕구로 보았다. 이 군사 작전 동안에 마누일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에게 편지를 받았다. 루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십자군 영토의 구제를 위한 군대를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알리는 것이었다.
1.3 이탈리아 원정
1147년, 마누일은 시칠리아의 국왕 로지에르 2세와 대치했다. 로지에르 2세는 제국의 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한 적이 있었다. 발칸 반도가 쿠만족의 침공을 받아 산만해졌으나, 1148년 마누일 1세는 콘라트 3세와의 동맹과 로지에르와 그의 강력한 함대를 패배시킨 베네치아의 협조를 요청했다.
1.4 동방 원정
1.5 對 헝가리 전쟁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동쪽의 전선이 크게 후퇴하고 그 종심을 차지하고 있는 룸 술탄국과의 전쟁이 1161년 투르크 측의 굴복으로 끝남에 따라, 제국의 유럽 영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조와 후일의 니케아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기반으로 삼아 부흥한 반면 앙겔로스 왕조와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확고한 기반을 가지지 못하여 몰락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한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헝가리 왕국은 마누일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미 헝가리는 1148년의 이탈리아 원정 시도와 이후의 세르비아의 후방교란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었으며, 동로마 측은 헝가리와의 1155년 평화조약 이후에도 십자군 국가들과 룸 술탄국 등의 동방문제에 집중하던 와중에도 여전히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는 상업이 발달한 달마티아 해안과 비옥한 도나우 분지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헝가리 왕국 또한 동로마 측을 위협적인 상대로 보았다. 서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동남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접하던 헝가리는 신성 로마 측과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으나 가톨릭계가 아닌데다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발칸 서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동로마 측과는 갈등의 여지가 많았다. 때문에 자연히 신성 로마 측과 연대하였고, 이미 1128년에는 요안니스 2세와 하람 전투를 치렀으며 이후에는 세르비아를 사이에 두고 물밑으로 동로마 측과 힘겨루기를 벌였다. 다만, 전면전으로 격화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기에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1162년, 20여년을 통치하던 게자 2세가 죽자 마누일은 헝가리의 왕위계승에 개입했다. 당시 유력한 왕위계승권자로 게자 2세의 아들인 이스트반 3세와 벨라 3세, 그리고 게자 2세의 형제인 라즐로 2세와 이스트반 4세가 있었는데 게자 2세의 동생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누일 황제의 모후 이리니는 게자 2세의 증조부인 게자 1세의 동생 라즐로 1세의 딸이었다. 즉, 마누일 1세에게는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이자 왕위 계승권자들의 보호자로서 나름대로 개입명분이 있었다.
일단 헝가리 인들은 동로마에 이권을 주고 조카인 이스트반 3세의 대립왕이 된 라즐로 2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채 1년을 못 가서 죽자, 마누일의 질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이스트반 4세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결국 왕위를 유지하지 못한 이스트반 4세가 신성 로마 측의 지원을 받은 이스트반 3세에게 1163년에 쫓겨나자 마누일은 대신 이스트반 3세의 동생 벨라 3세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달마티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이 있던 그에게 황제는 헝가리 왕국을 압박하여 맺은 조약으로 시르미움 지역을 얹어 주었으며 수도로 데려와 교육시켰고 자신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시켜 친왕(Despotes) 칭호까지 부여했다. 아직 마누일의 적장자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의 후계자가 된 셈이었다.
이를 지켜본 헝가리인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안 좋던 국가의, 이미 왕위 계승에 개입했었으며 망명한 이스트반 4세를 보호하고 있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황제가 1순위 왕위 계승권자를 사위이자 제위 계승권자로 삼고는 그의 영지에 보호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국 전쟁을 위한 조건들이 하나하나 쌓인 끝에 이스트반 3세는 벨라 3세의 영지인 달마티아와 이스트반 4세가 머무르던 시르미움을 향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후 시르미움 전투 참조.
1.6 베네치아를 격퇴하다
1.7 동방 십자군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었을 때, 유럽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2차 십자군 원정 기간동안 친분을 쌓은 콘라트와 마누일 1세의 협력관계가 종식되자, 야심많은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여 양 로마 제국간의 갈등이 시작 된 것이었다. 1155년~1156년간 동로마의 이탈리아 원정을 지켜본 프리드리히는 곧 남하할 의향을 드러내었고 이를 감지한 마누일은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멈췄다. 1158년 프리드리히가 남하하여 이탈리아의 반항적인 도시들을 공격하자 동방원정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마누일은 돈을 뿌려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지원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하는 북 이탈리아의 도시 연합과 이를 후원하는 동로마 제국, 교황청,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저지 되어버렸다. 이후 1160년대 신성 로마의 남하는 동로마 측이 예루살렘 왕국을 끌어들이고 마지막으로 1167년 헝가리 왕국을 시르미움 전투를 통해 복속하자 좌절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169년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측이 연합한 다미에타 원정이 실패하고 1171년 동로마-베네치아 전쟁이 발발하자 서서히 남하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로마를 공통의 적으로 두는 국가들 -베네치아, 장기왕조 등-과 연대를 꾀한 프리드리히는 1173년 동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안코나를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공격하였고 동년 장기왕조와 협조하여 당시 동로마의 통제를 벗어나는 중이던 룸 술탄국을 장기 왕조와 연대시켜주려 하였다. 비록 두 시도 모두 동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1174년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보두앵 4세가 즉위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동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반면 신성 로마와 비교적 가까워지자 프리드리히는 성지 예루살렘을 돕기위해 남하한다는 명분을 쥐게되었다.
이를 지켜본 마누일은 불안했다. 재위 초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겪은 그는 제국령을 대규모의 십자군이 지나가는 것은 물론 신성 로마 측이 남하할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싫었고 이를 위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마침 1161년 제국에 복속 되었던 룸 술탄국이 1170년대 들어 다니슈멘드를 공격하며 세를 불리고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이를 징벌한다는 외교적 이유가 생겼으며, 제국의 고토를 수복한다는 역사적 이유와 아나톨리아 반도라는 긴 종심을 확보하는 군사적 이유 및 기독교 국가의 황제로서 이슬람 국가를 공격한다는 종교적 이유까지 확보한다는 계산까지 생기게 되었다. 애초에 도중에 중지했던 1146년의 이코니온 공성도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도 서방에 대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프리드리히가 남하할 조짐을 보이던 1175년, 마누일은 성전을 선포하였고 제국군은 물론 봉신국, 동맹국 등의 주변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이었다.
이후 미리오케팔론 전투 참조.
1.8 말년
미리오케팔론 전투로 인해 '성전'이 싱겁게 종료되자, 지중해 세계는 크게 흔들렸다. 비록 신성 로마 측의 남하는 동년 저지되었지만, 교황청은 동로마 측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평가도 떨어지게 되었다. 룸 술탄국은 통제를 벗어나 응징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언제 서쪽으로부터 새로운 십자군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황제는 여전히 분주해야만 했다.
1.9 평가
2 트레비존드 제국의 황제
생애 : 1218~1263
재위 : 1238~1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