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보 음베키

1 소개

역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8대9대10대
넬슨 만델라타보 음베키칼레마 모틀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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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8일 ~

타보 음부옐롸 음베키(Thabo Mbeki)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정치인이며, 넬슨 만델라 다음으로 취임한 남아공을 통치한 제 9대 대통령으로[1], 넬슨 만델라의 동지인 고반 음베키의 아들이다. 타보 음베키는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학생회의 간부로 일했으며 이후 런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남아공 당국으로부터 찍힌 이후로부터는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해외에서 망명활동을 하였고 소련에서 군사훈련도 받기도 하였다.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 해외간부로 일했고 외교적으로도 남아공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ANC에 대한 해외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했고 국제재제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0년에 남아공 당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단계적으로 해체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남아공으로 귀국했으며 남아공 당국과 협의하여 정치범을 석방시키는데 기여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공로로 1994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1996년에 국민당(NP)이 연립정권에서 탈퇴한 이후에 부통령이 되었다. 1999년에 넬슨 만델라에 뒤 이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타보 음베키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 해외로부터 투자를 대거끌여들어서 남아공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외교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아프리카 각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국가가 되었고[2] 인종화합정책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시행하기는 했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다수 흑인들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부정부패 사건도 여러건 터지고 전력발전소 건설미비로 임기말에 전력부족 사태가 터지는 등 어수선한 일이 많이 터졌다.

특히 재임초기에 에이즈가 확산되어 남아공이 망하네 마네소리가 나왔을때 비용좀 아끼겠다고+유사과학에 빠져서 국가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걸린 병은 HIV 바이러스때문이 아닌 굶주림에 의한 면역체계의 약화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따위의 허위루머 가득한 주장으로 공공병원에서의 항바이러스제 불법화(...)를 추진시키고 그 대체제로 레몬주스(...)같은 민간요법을 쓰라는 켐페인을 벌이는 병크를 저지르며 에이즈를 사실상 방치, 병의 실체가 알려지고 나서도 초기 대응을 엉망으로 진행한 덕택에[3] 넬슨 만델라와도 관계가 멀어졌고, 그 자신도 톡톡히 망신을 샀다. 에이즈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이나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료계쪽 인물들이나 사회학자들에게 이쪽 지역의 에이즈 확산의 가장 큰 이유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의 이름이 아파르트헤이드, 남녀차별, 그리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시절 당한 수탈과 그로 인해 생겨난 비정상적인 사회, 정치 구조 등등의 국가적 실책들과 동급에서 언급되는 단골 소재일 정도.

그나마 사태가 걷잡을수없이 확산되면서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는 커녕 그 불이 전신으로 퍼지자(...) 남아공 정부는 그제서야 주장을 조용히 바꿔 약품과 관련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지급하긴 했지만 그 전에 에이즈 환자 수십만이 대통령 개인의 신념에 따라 전혀 엉뚱한 처방을 받으며 방치되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욕을 얻어먹고있다. 심지어 이것조차도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이 대통령의 명령을 기각하며 실행했다는 설도 있다(...) 현대 의학으로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다는 사실, 즉 가장 좋은 에이즈 대처법은 사전예방과 주기적이고 대대적인 인구 전체의 검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병크도 이런 병크가 없다.

심지어 나중에 그의 평전 작가가 음베키가 "그때 내 의견이 내각 앞에서 꺾였던것을 후회한다"식의 말을 했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무릅쓰며 고통받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일하는 AIDS 관련 의료진들을 나치 수용소의 군의관, 즉 사람을 생체 실험도구로 여기는 천하의 개쌍놈들과 비교했으며 HIV와 AID의 관계를 설명하는 정설, 사실상의 "진실"을 "서구 사회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는 인종차별주의적 학설"이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살기 위해서 현실을 인지하고 국가에서 보급한 약품들과 혜택들을 받아들인 국민들을 "노예 근성에 찌든 사람들"이라고까지 칭했다는게 알려졌다. AIDS와 HIV의 관계, 그리고 알려진 HIV의 감염경로에 의거한 의료, 예방 방법과 "칵테일 치료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항바이러스제 기술의 보급으로 감염자 증가율과 감염자 사망률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사실상 이정도면 서구 사회에 대한 피해망상증까지 의심될 정도. 어떻게 귀가 되먹었길래 "섹스 위험하니까 조심히 하세요"를 "니들은 하등한 짐승들이라 섹스만 해대니까 이딴 병에 걸리는거얔ㅋㅋㅋㅋ"로 들어먹는건지 이해가 안간다

여러 인물들의 노력과 국제 사회의 관심 덕택에 에이즈 증가율은 현재 크게 감소한 상태이긴 하지만 오늘날 남아프리카는 변함없이 세계 최대의 HIV감염자 보유국가이며 성인 국민 다섯명중 한명, 전체 인구에서는 열명에 한명꼴의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있다. 보통 감염인원수가 인구의 1%를 돌파했을 경우 "유행병"으로 분류되며 각 나라들도 더욱더 이를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본다면 이 감염인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숫자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감염자가 가장 높은 나잇대는 거의 25%의 감염률을 보이고 있는 15~30의 청년층. 현대와 근미래를 이끌어나가야할 청년층의 1/4이 HIV에 감염되어 에이즈의 위협에 노출되어있거나 이미 죽은 상황에서 이들이 남기고 갈 에이즈 고아, 그 고아들을 돌볼 힘이 없고 얼마 살 날도 안남은 노년층,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워줄 부모세대의 전멸 등등의 사회 문제까지 더해져 이 하나의 허물만으로 이뤄놓은 업적을 다 가릴정도이다.

그래도 경제는 그럭저럭 성장했으며 또한 일부 컬러드층의 지지를 흡수했기에 200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재임말기에 권력다툼에 휘말렸고 2009년 총선을 7개월 앞두고 결국 중도사퇴하게된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 2009년 총선에서 인민회의를 후원하기도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이후로부터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있는 중이다. 독재자에게 너무 관대하다며 비판도 사지만 그럼에도 내전을 중재하는 등 남아공의 얼굴마담으로써의 역할은 둔독히 맡고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통령으로써는 명과 암이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외교관으로써의 능력자체는 괜찮은 편.

2 같이 보기

  1. 재임 기간 1999년 6월 14일 ~ 2008년 9월 24일.
  2. 2010년 월드컵 개최권을 딴 것도 타보 음베키의 공이다,
  3. 경제학 학위를 따고 나라를 이끌 정도의 엘리트라고는 해도 생물학을 전공한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