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제국건국사의 주요 사건
- 실제 사건이 아니다.
목차
1 개요
1870년 1월 15일 톈진에서 발생한 폭동사건. 서양을 우습게보기 시작한 중국인들이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톈진 내 외국인거류지와 현지기독교인 마을을 습격한 사건. 이 사건으로 조선정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서양세력은 본격적인 조선침공을 준비한다.
실제 1870년 6월에 있었던 천진 교안(敎案, 기독교와 관련된 사건을 의미)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원인
2.1 사건의 배경
1866년 프랑스군이 조선에서 제대로 박살나면서 중국민중들 사이에서 서양세력을 깔보는듯한 시선들이 생겨났다. 이를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는[1] 중국 내에서 벌어진 서양인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무리한 과잉진압을 시도했다[2]. 하지만 이는 현지 중국인들의 적개심만 자극했을 뿐 서양인들이 원하던 효과는 얻지 못했다. 거기다 사건이 터진 톈진의 경우 평소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괴담이 돌고 있었으므로 서양세력을 향한 민심이 굉장히 흉흉했다.
이 때 아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2.2 직접적인 발단
1870년 1월 14일 저녁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 첫 번째는 14일 저녁 영국군 수병, 부사관, 장교 네 명이 항구 바깥지역에서 중국인들의 습격을 받은 것. 이것은 그리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 두 번째가 사실상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
- 15일 새벽. 톈진 성당 잡역부가 성당에서 도둑질을 하던 아이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이에 여자아이 하나가 사망하게 된다. 성당을 운영하던 신부는 그 아이를 병원에 보내려 했으나 몰려든 군중에게 구타당하게 되고 총격을 가했던 중국인 잡역부 역시 군중들의 구타로 사망하게 된다.
이 때 폭도로 돌변한 군중들이 근처 현지 기독교인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한다.
3 전개
3.1 새벽 ~ 오전
- 톈진 성당근처에서 일어난 폭동 가담자들의 숫자가 수천 이상으로 불어났고 이들은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톈진 내 중국인 기독교도 마을과 수녀원, 고아원을 급습, 다른 무리들은 톈진 내 외국인 거류지역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3.2 오전 11시
외국인 거류지역 내 영, 프, 미 총영사관이 폭도들의 습격으로 불에 탐.
항구의 영국함대 제독근무실에 영, 프 해군 장교들이 찾아와 합류할 의사를 밝힘.
3.3 오후 12시(정오)
미, 프의 지원군을 받은 영국군이 수병과 해병으로 구성된 진압군을 이끌고 시가지로 들어가기 시작. 때마침 톈진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이 도착. 진압군은 크게 두 갈래로 시가지에 진입.
- 영국 해병대 1개 중대, 수병 4개 중대, 미국과 프랑스 지원 병력, 중국군: 외국인 거류지.
- 영국 해병대 1개 중대, 수병 1개 중대: 성당 근처 기독교도 마을.
3.4 오후 12시 이후 ~ 오후 4시
중국군은 비교적 협조적인 주민들 덕에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서양 연합군은 치열한 폭도들의 저항 때문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공사관 근처에서 총격을 받음.
기독교도 마을로 향한 영국군은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폭도들이 쓸고 간 수녀원과 고아원의 참상을 목격[3]. 이 고아원이 영국군에게 점령된 오후 4시경 사실상 폭동은 거의 종결.
3.5 사건의 완전 종결
영국군과 청국군에 의해 19일이 되어서야 치안이 회복되었다.
4 통계
4.1 동원 인력
4.1.1 폭동 세력
대략 4천 명 정도로 추정. 지도자는 없었다.
4.1.2 진압군
- 중국군 500명.
- 톈진 포국(경찰) 500명.[4]
- 영국군 수병 1000여명, 해병 2개 중대.
- 미국, 프랑스 지원군 350명.
4.2 피해
4.2.1 중국
- 폭도 300명 사살됨. 체포 1150명[5]
- 민간인 100여명. 대개 중국인 기독교도, 서양 공사관 근무 인원. 폭도들에게 사망.
4.2.2 서양
- 민간인: 사망, 실종 60~70
- 군인: 전사 20, 부상 55
- 재산피해 미화 10만달러 이상.
4.2.2.1 영국
- 민간인 사망 29명. 그 중 부녀자와 어린아이 6명.
- 군인 6명.
- 재산피해 20만 파운드 이상.
4.2.2.2 미국
- 군, 민 합계 15명.
4.3 압수된 무기
- 15일 조선제 갑식보총 51정.
- 19일 조선, 미국, 영국제 무기 1천여정.
5 사후처리 및 조선에 끼친 영향
상해에 주재하던 서양 공사관들에게 커다란 고민거리를 제공했다. 청국 민중들이 더 이상 서양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상, 이들에게 심리를 위축시키고 중국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상대는 조선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이러한 결정에는 청국 국민들이 서양을 가볍게 보게 된 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를 박살낸 조선을 제압하면 청국 국민들에게 다시금 서양세력의 위엄을 세울 수 있다는 논지였다.[6]
이 분위기를 주도한 영국은, 사건 당시 쓰였던 무기들 중 조선제 소총이 섞여있던 것을 핑계삼아[7] 톈진사건의 배후를 조선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1870년 3월 영,프,미 3국의 높으신 분들은 조선과의 전쟁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 그 중에서도 상해 주재 영국 공사 웨이드는 이 사건을 예견한 듯 미국에게 조선침공에 대해 넌지시 물어본다
- ↑ 1868년 장쑤성 영국인 선교사 폭행사건, 톈진 프랑스인 투석사건
- ↑ 수녀와 아이들 모두 처참히 살해됨. 특히 수녀와 여자아이들은 강간을 당했다.
- ↑ 이들은 폭동 초기에 무력화
- ↑ 포국에 체포된 인원 400, 후에 영국군에게 체포된 인원 750명
- ↑ 물론 조선이 무너진다 해서 청국 국민들이 서양세력에게 위축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되려 조선을 이기고 청과도 일전을 치뤄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 ↑ 사실 조선제 무기는 얼마 없었고 되려 미국, 영국제 무기가 다수를 이루었다. 또한 체포된 불법무기상들도 전부 미국, 영국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