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라 브랑카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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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사이의 영유권 분쟁이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붙인 명칭은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eh, Middle Rocks and South Ledge (Malaysia v. Singapore), 페드라 브랑카/풀라으 바트 푸테, 미들락스, 사우스 렛지의 영유권에 대한 사건이다.

1979년 말레이시아 정부가 공식 지도를 발행하면서 페드라 브랑카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싱가포르가 여기에 반발하면서 시작된 분쟁이고 나머지 지역은 둘이서 치고받는 과정에서 거론된 것이기 때문에 보통 일반적으로 언급할 때는 Pedra Branca Dispute 정도로 표기한다. 페드라 브랑카 사건으로 번역하는 관례가 있으나 dispute는 사건보다는 분쟁이란 의미가 더 적절하다. 이에 나무위키에서는 분쟁으로 기재한다. 2008년 ICJ에서 영유권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려서 공식적으로는 일단락된 상태이다.

섬을 놓고 벌인 영유권 분쟁이기 때문에 독도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만약 이 문제가 ICJ로 갈 경우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되고 어떤 식으로 대응하면 망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관련 분야에서 큰 이슈가 되기도 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 분쟁의 원인

말레이시아 지역은 1512년 이후로 조호르 술탄국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 개척과 경영이 시작된 이후로 동남아시아 지역은 차츰차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고, 말레이시아 일부 지역 역시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1824년에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조약을 체결하여 싱가포르를 위시한 말레이시아 지역의 권한을 획득한 상황이었다.

한편 페드라 브랑카는 상단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싱가포르 해협과 남중국해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의 섬으로 포르투갈어로 "하얀 암초"라는 뜻이다. 포르투갈어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 지역을 탐사하고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국가가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말레이시아에서는 풀라으 바트 푸테라 불렀는데 이 역시도 "하얀 암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암초가 굉장히 많은 곳으로 좌초 및 난파사고가 자주 발생했던 까닭에 영국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이에 안전통항을 목적으로 등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페드라 브랑카 섬을 적임지로 결정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영국은 1847년에 등대 건설 작업을 시작하여 1851년 완성시켰다. 이후 페드라 브랑카는 영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등대를 관리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고,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로는 영국이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싱가포르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등대를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항은 1847년 영국이 등대를 건설할 때부터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확실하게 그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레이시아에서도 페드라 브랑카를 비롯한 싱가포르 해협에 있는 섬들이 "원래 우리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고, 영국이나 싱가포르 모두 "우리가 등대짓고 관리하던 곳이니깐 우리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말레이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영유권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자 마침내 분쟁이 촉발됐다.

1979년 말레이시아가 발행한 지도에 대하여 싱가포르는 1980년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 측의 태도 변화가 없자 자신들의 영유권임을 증빙하는 서류를 전달하여 한 번 더 수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양측의 입장은 좁히지 못했고 오히려 1993년 싱가포르가 미들락스와 사우스 렛지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하기 시작하며 갈등이 더 격화됐다. 결국 이 문제는 양국의 합의 하에 ICJ로 넘어갔다.

3 양측의 주장

3.1 terra nullius

라틴어로 terra nulius는 무주지, 즉 주인이 없는 땅을 의미한다. 국제법적으로 무주지인 땅은 선점하는 쪽에서 주권행사를 할 수 있다. 따라서 페드라 브랑카가 무주지였는가를 놓고 서로 대립했다.

말레이시아의 주장 - 페드라 브랑카를 비롯한 싱가포르 해협 끝단의 섬들이 원래부터 고유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1512년부터 말레이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조호르 술탄국이 주권을 지니고 있었고, 이 조호르 정부를 계승한 것이 말레이시아 정부이므로 당연히 영유권을 이어받았다는 점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페드라 브랑카에 대해서 조호르 술탄국의 영역으로 인지하고 있는 유럽 측 문서들을 대거 입수하여 제출했다. 특히, 1844년 해협 영국 측 관계자가 조호르 술탄과 왕실 고문에게 서신을 보내고 받은 기록이 있다. 이 때 받은 답신을 번역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등대를 짓겠다는 당신들의 의견에는 이견이 없으며 술탄께서도 상선 입출항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흡족해하셨다. 그곳이나 적당한 섬에 등대를 건설하는 것은 동인도 회사의 자유이다."란 서신이 있다. 이는 조흐르 술탄국의 동의를 구해서 등대 건설권을 승인받은 것으로 주장하였다.

싱가포르의 반론 - 페드라 브랑카가 무주지였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1847년에 등대를 건설할 때 페드라 브랑카는 어느 국가도 영유권을 지니지 않는 무주지였고, 싱가포르의 식민지 정부가 영국 본국의 승인을 얻어 페드라 브랑카에 등대를 건설했으므로 적법한 영토 취득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 조호르 술탄국에서 오간 서신을 보면 조호르 술탄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에 페드라 브랑카를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술탄의 답변이 담긴 서신 자체는 있지만 그 자체가 조호르 술탄국의 승인을 받았다는 걸로 해석할 수 없으며 영국은 등대를 건설할 때 통보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조흐르 술탄국과의 관계를 부인할 수 있다. 게다가 영국 본국의 승인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주장처럼 페드라 브랑카가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였던 적이 없다고 받아쳤다.


싱가포르의 주장 -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영유권 개념은 복속된 백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영토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즉, 조호르 술탄국에서 페드라 브랑카의 백성들을 복속시키거나, 그 백성들이 충성을 맹세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므로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말레이시아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유권 개념은 영토과 백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상식적이며, 게다가 영국의 크러포드가 제출한 보고서에 오랑 라오트란 이름의 싱가포르 해협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언급되고, 조호르 술탄국의 백성이라 언급했으므로 싱가포르의 주장은 틀렸다고 맞섰다. 여기에 1824년 동인도 회사와의 조약에서 싱가포르를 기준으로 10해리의 영해를 할양한다고 못박았으므로 25해리나 떨어진 페드라 브랑카는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로 인정된 것이라 주장했다.


싱가포르의 주장 - 싱가포르에서는 1953년 싱가포르 총독이 조호르 왕국과 영해의 경계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지 논의했고, 조호르 왕국의 국무장관은 "조호르 정부는 페드라 브랑카의 영유를 주장하지 않는다"란 서신을 보냈다. 따라서 페드라 브랑카는 조호르 왕국의 영토가 아니며 이를 계승한 말레이시아의 영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1948년 조호르 협정과 말레이 연방 협정에 의거하여 조호르 왕국은 공식적인 외교활동 권한을 모두 위임한 상태였기에 조호르 왕국의 국무장관이 보낸 서항은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없다. 당시 말레이 연방 대표가 이러한 문서를 보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므로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3.2 실효적 주권 문제

이 문제는 싱가포르에서는 영토에 대한 실효적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그런 대응이 없었거나 묵인하고 있었다는 점이 논쟁의 요지였다.

싱가포르의 주장 - 1920년부터 1979년까지 페드라 브랑카 인근에서 발생한 좌초 및 난파사고 문제에 대한 조사와 기록, 보고를 싱가포르에서 행하고 있었으므로 실효적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선박좌초 및 난파사고는 해양법에 의한 국제협약에 따른 활동일 뿐이지 이는 실효적 주권행사가 아니다.


싱가포르의 주장 - 싱가포르에서 등대를 관리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령 풀라으 피상(영어로는 바나나 섬)에서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싱가포르 국기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페드라 블랑카에 대해서는 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영유권은 싱가포르에 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국기는 국적을 나타내는 것이지 실효적 영토주권과는 무관하다. 싱가포르는 페드라 브랑카 섬에 국기를 걸어놓는 것 이외에 실효적 주권 행사를 보여준 적이 없다. 풀라우 피상의 사례를 페드라 브랑카에 적용할 수 없다.


싱가포르의 주장 - 페드라 브랑카에 정부의 관리들이 방문할 때도 말레이시아는 대응이 없었으며, 싱가포르군이 페드라 브랑카에 군사시설을 공개적으로 설치할 때도 말레이시아는 항의한 적이 없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군 시설 건설은 싱가포르에서 공개적인 것으로 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비밀리에 추진한 일이었다. 이는 싱가포르가 캥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싱가포르의 주장 - 1962년부터 75년까지 발행된 여섯 개의 지도에서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브랑카 밑에 (SINGAPORE)나 (SINGAPURA)라는 표기를 넣었다. 반면 말레이시아의 영토인 플라으 피상에는 이러한 표기가 없다. 따라서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브랑카를 싱가포르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페드라 브랑카에 싱가포르에서 관리하는 등대가 있기 때문에 이를 알리고자 쓴 것이지 영토주권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기입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섬 밑에 남긴 표기를 (SINGAPORE)나 (SINGAPURA)로 남긴 것으로 영토주권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국경이나 경계는 국가간의 협정 또는 협상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지도에 그려진 경계선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3.3 미들 락스와 사우스 렛지 문제

여기는 페드라 브랑카로 싸우다가 곁다리로 끌려온 문제에 가깝다. 그 영향인지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논쟁에 비하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은 편.

싱가포르의 주장 - 역사적으로 페드라 브랑카와 미들 락스, 사우스 렛지는 별개의 섬이 아닌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했다. 게다가 조호르 술탄국이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미들 락스와 사우스 렛지는 페드라 브랑카의 영해 안에 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영토가 아니다.

말레이시아의 반론 - 그 어느 역사적 문서에서도 이 세 개의 섬을 하나의 지역로 기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3개의 섬은 별개의 섬이다. 게다가 1824년 조약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에 권리를 양도한 지역이 아니고, 이후로도 말레이시아는 미들 락스 지역의 석유 채굴 및 탐사권과 어업 관련 법을 신설하여 실효적인 지배를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말레이시아의 적법한 영토이다.

4 ICJ 의 판단

  1. 말레이시아에서 제출한 공식 문서들을 토대로 볼 때 유럽 제국들은 싱가포르 해협의 섬들을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므로, 따라서 페드라 브랑카와 그 인근 섬은 조호르 술탄국의 고유 영토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싱가포르가 주장한 terra nullius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2. 논쟁거리가 되는 1824년 협정문 2항에서는 싱가포르와 그 주변 10마일 이내의 도서로 제약되어 있으나 나머지 영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반면 협정문 12항의 "no British Establishment shall be made on the Carimon Isles, or on the Island of Bantam, Bintang, Lingin, or on any of the other Islands South of the Straits of Singapore"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 해협까지의 권리를 취득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1825년 영국에서 작성된 문서에도 "싱가포르 해협 북쪽에서 남쪽 끝까지의 권리를 부여했다"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가 제시한 2항 만으로는 1825년 이후의 영유권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3. 페드라 브랑카에 건설한 등대에 관련된 협정서나 계약서가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말레이시아가 제시한 1844년의 서신은 등대를 건설하고, 운영하고, 관리권한을 요청하고 허가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1849년 등대를 건설할 때 영국이 통보를 하지않은 것도 이미 허가를 받아서로 볼 수도 있고 조호르가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850년 조호르 술탄국의 고문과 그 일행이 페드라 브릉카에 방문을 했으나 그들의 방문 목적은 등대 프로젝트와 무관했다. 따라서 ICJ는 19세기 중엽의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4. 싱가포르 식민정부와 조호르 정부가 주고받은 1953년의 영해획정 서신을 보면 영국도 페드라 브랑카의 영유권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조호르 정부 역시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라 한 점에서 조호르가 해당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 조호르는 1914년 이후로 영국의 보호령이었기 때문에 1948년 조흐르 협정에서 영국 대표가 영국과 조흐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호르 정부가 위임을 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말레이 연방 협정 역시 말레이시아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 더불어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싱가포르와 협상을 한 적도 없고, ICJ의 심리가 시작된 이후 주장한 내용이므로 1953년 당시 조호르는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주권을 보유하지 못했음과, 페드라 브랑카는 영국령 싱가포르의 섬이란 점이 명백하다.
6. 1923년에서 1993년까지 싱가포르에서 행한 선박난파 및 좌초에 관한 사건 조사는 적법한 실효적 주권을 행사한 것이다.
7. 국기가 영토주권 및 실효적 주권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말레이시아의 주장은 맞다. 하지만 풀라으 피상에서의 대응과 페드라 브랑카에서의 대응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 지도에 그어진 경계선에 관한 말레이시아의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지도는 지리적인 사실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SINGAPORE)나 (SINGAPURA)로 기재한 것은 말레이시아가 페드라 브랑카를 싱가포르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9. 미들 락스는 페드라 브랑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부터 말레이시아의 땅이었고, 영국과 싱가포르에서 미들 락스에 대한 어떠한 행위가 없었으므로 싱가포르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상의 판단에 따라 ICJ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1. 1980년을 기점으로 페드라 브랑카의 주권은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가 적법한 주권자이다.
2. 미들 락스는 말레이시아의 영토이다.
3. 페드라 브랑카와 미들 락스의 주권이 정해졌으니 사우스 렛지는 양국 사이의 영해획정에 따라 알아서 분할한다.

5 이후 이야기

ICJ의 판단에 따라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브랑카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단 아직 영해획정 문제를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이다. 더불어 말레이시아, 특히 조호르 지역의 불만이 대단한다. 조흐르의 수장이 "페드라 브랑카는 원래부터 우리의 섬이다. 언젠가는 되찾아 올 것이다"라 말할 정도. 더불어 1844년 주고받은 서한의 원본 및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계약서를 찾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ICJ가 판결을 내렸어도 10년 이내에 새로운 증거를 확보하면 언제라도 재심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말레이시아 측의 마지막 남은 희망. 하지만 20세기에 관련된 증거들이 워낙 처절하게 박살나버려서 효용이 있을지는 미지수.

싱가포르 측은 국제법적으로 페드라 브랑카의 주권을 인정받았다는 점에 대해서 환영 의사를 밝혔다. 다만 아직 배타적 경제 수역 설정 및 영해획정 문제가 남아 있어 한동안 골머리를 썩어야 될 판이다.

더불어 독도 문제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판결이었다. 일단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무주지(terra nullius)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싱가포르에서 이와 똑같은 짓을 하다가 말레이시아가 제출한 역사적 증거에 그냥 박살났다. 특히 한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독도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기록이 많기 때문에 손쉽게 논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은 역사적 영토를 인정받았지만 현재 영토 문제에서는 말레이시아가 일방적으로 박살났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실효 지배를 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증거배틀로 돌입했을 때 일본을 압도적으로 쳐바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이 생겼다. 일본의 경우 1910년대 영유권 주장을 선언한 이래로 독도에 관한 입법, 행정, 사법 3권을 행사하여 적법한 주권 행사중이라는 기록을 철저하게 모아놓은 반면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란 흑역사도 있고 그 이후에 남긴 기록이 일본에 비하면 부실하다는 점이다. ICJ가 문서화된 증거를 선호한다는 점에서 진짜로 맞붙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