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 최후의 중세인이자 동시에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다. 소네트 시의 대가이며 여러 편의 소네트를 집필하면서 이 형식을 확립시켰다. 130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도시 아레초(Arezzo)에서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 페트라코(Ser Petracco, 1267~1326)는 본래 피렌체 출신이었으나 교황파(구엘프) 중에서도 백당 성향이었기에 피렌체를 흑당이 장악하자 아레초로 망명해 프란체스코를 낳게 된다. 1309년 가톨릭이 대분열되어버리는 아비뇽 유수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대립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편에 섰던 페트라르카의 가족은 대립 교황이 머무르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후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몽펠리에대학교와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라틴어 문학에 더 많은 흥미를 보였던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천직을 문학가로 여기게 된다. 1326년 아버지가 타계하자 아비뇽으로 돌아온 페트라르카는 대립 교황청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선다. 1327년 아비뇽에서 평생의 연인 라우라 드 노베(Laura de Noves, 1310~1348)를 만나 그녀와의 연애 경험을 소네트로 집필하던 그는 1337년 대사 임무를 수행하러 로마를 방문하던 중 영감을 얻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을 소재로 한 첫번째 대작이자 걸작인 아프리카(Africa)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같은 명성은 1341년 4월 8일 그가 로마 시에서 최초로 계관 시인의 영예를 얻게 됨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그에게 또 한번 불후의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은 1342년에 발표된 서정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였는데 이는 기존 라틴어 위주의 문학 활동에서 벗어나 속어인 이탈리아로 집필되어 신 중심의 중세 정신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르네상스적 새로운 시대 정신의 탄생을 의미했다. 1348년 평생의 연인 라우라 드 노베가 38세를 일기로 요절하자 페트라르카는 정치 활동에서 은퇴하고 이후 30여년 가까이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며 보카치오 등과 교류했고 70세 생일을 하루 앞둔 1374년 7월 19일 이탈리아 아르쿠아(Arquà)의 자택에서 타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