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 ~ 1469. 12. 2)
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병악한 체질이라 소년 시절부터 통풍에 걸려 고생해 통풍에 걸린 자라는 뜻인 일 고토소(Il Gottoso)라 불렸다.
2 피에로에 대한 묘사
두꺼운 눈꺼풀과 비대한 목선 때문에 다소 졸려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동생 조반니 디 코지모 데 메디치보다 미남이었다고 하며, 단호한 턱과 얇지만 굳게 다문 입에는 평생을 괴롭힌 관절염과 습진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 엿보였다고 한다. 오랜 지병에도 불구하고 신경질적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인내심이 있으며, 예의가 바르면서 냉담한 편이라 아버지 코지모처럼 권위를 가지면서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 우려하는 이도 있었지만 피에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피에로를 존경했다고 한다.
은행가로서의 재간은 없었지만 방법론적이라 아버지 코지모의 장례식 비용을 예비 비용, 가족들과 시종, 노예의 상복에 든 검은 천 비용, 양초 수, 밀랍의 무게까지 세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었다.
3 언덕파와의 대립과 권력 장악
젊은 시절에는 열 명으로 구성된 아코피아토리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토르나퀸치라는 성씨를 가졌던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식들을 낳았다. 나이 40세가 돼서도 병악했기 때문에 오래 살 가망이 없어 아버지 코지모의 기대를 받지 못해 관심을 못했으며, 허약해서 은행 업무나 피렌체 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1448년에는 프리오레로 일하면서 밀라노, 베네치아, 파리의 대사 역할을 수행하거나 1461년에는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었다.
1463년에 동생 조반니가 죽으면서 1464년에 아버지 코지모가 죽자 계승했으며, 그의 세심한 성격에 탄복한 루이 11세로부터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 있는 원 가운데에 발루아 가의 백합 세 송이를 장식할 수 있도록 특권을 줬다고 하며, 재산 목록을 조사해 아버지 코지모가 손대지 않았던 오래된 채무 관계를 벗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파산시켜 타격이 큰 사람들으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파산한 상인층의 비난을 받았다.
아버지 코지모에 이어서 특권과 존경을 누렸지만 코지모가 사망한 이후 루카 피티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에 대한 비판으로 공격했으며, 베네치아 영주 대사 디오티살비 네로니와 힘을 합쳐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평원당을 반대하는 언덕당을 형성해 파산된 상인층과 결탁하자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언덕당의 니콜로 소데리니가 곤팔로니에레가 되었다가 개혁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다시 복귀했으며, 1466년 3월 8일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자가 죽자 밀라노와의 지속적인 동맹을 주장했으며, 언덕당은 베네치아와의 동맹으로 복귀하자고 주장해 대립한다.
8월이 되어 병 때문에 카레지 별장으로 실려갔으며, 이 틈을 이용해 언덕당이 베네치아와 페라라의 원조를 요청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시도하자 아들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로 보내 도착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가 피렌체에 간 로렌초로부터 외딴 길로 오라는 전언을 받았다. 8월 27일에 피렌체에 도착해 상황을 통제하면서 밀라노에 원조 요청을 했으며, 9월 2일에 열릴 선거에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시뇨리아를 선출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소데리니, 네로니,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 등 반대하던 자들을 추방하고, 피티는 뒤늦게 항복한 대가로 사면했으며, 네로니와 소데리니 등이 쿠데타를 획책해 1467년 5월에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이 이끄는 용병을 토스카나 국경 지대로 진격하자 밀라노, 나폴리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피렌체 군대를 모집해 이몰리아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4 예술가 지원
산 미니아토 알 몬테 교회에 십자가상을 안치할 벽감과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교회에 대리석 비용만 4000플로린이 드는 벽감을 기부했으며, 고대 주화를 수집하면서 메디치 도서관을 위해 희귀본들을 구입해 많은 장서들을 필사해 채색했다. 안토니오 아베를리노 필라레테에 따르면 이런 책들을 몇 시간 동안 보면서 금덩어리처럼 애지중지해 책을 넘겼다고 하며, 루카 델라 로비아에게 메디치 궁의 피에로의 서재 벽에 타원형의 테라코타 양각 세공을 제작해 마루에 타일 장식을 한 것을 의뢰했다.
파올로 디 도니에게는 1432년에 피렌체 가문이 산 로마노에서 알비찌 가문에게 승리한 것을 자축하는 그림 세 폭을 그릴 것을 위탁했으며, 안토니오 디 자코보벤치에게는 메디치 궁을 장식할 대형화 세 점과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중 두 가지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도나텔로의 노후를 보살피면서 산드로 보티첼리와 베노초 고쫄리를 후원해 보티첼리에게서 자신을 칭송하는 용기라는 작품을 봉헌받았으며, 고쫄리에게서는 메디치 궁 1층의 예배실에 프레스코화를 의뢰했다.
5 최후
1469년에 병석에 누우면서 시민들이 대리인을 행세하여 도시를 약탈해 행인들을 반 메디치 주의자들이라 매도하면서 돈을 갈취하자 이들을 방에 불러 책망하면서 이런 일이 계속 생긴다면 추방한 가문들을 피렌체로 불러 그들을 통제하겠다고 하여 이들의 폭력과 약탈 행위를 중지하게 만들었으며, 사후 산 로렌초의 옛 성구실에 동생 조반니 옆에 묻혀 반암 석관에 안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