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tro Mascagni
(1863년 12월 7일 ~ 1945년 8월 2일)
목차
▲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 中 간주곡(Intermezzo).
1 생애
이탈리아 중부지역인 토스카나주의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들을 법조계로 나가게 해서 성공하게 하려 했지만 마스카니 본인은 오히려 음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와 다툰끝에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미 10대에 교향곡 C단조와 아베 마리아같은 종교음악을 작곡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881년, 제사장(In Filanda)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해 밀라노에서 상을 받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폰키엘리 밑에서 배웠는데 이때 자코모 푸치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1년만에 밀라노 음악원을 그만두고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자겸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이후 체리뇰라라는 곳에서 음악교사 일을 하며 정착한다.
마스카니 인생에 가장 중대한 시점은 1889년으로,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이끌던 음악 출판사가 신춘문예같은 식으로 단막 오페라를 공모하는 대회를 열자 한편의 오페라를 작곡해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이듬해 초연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적으로 마스카니의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 하게도 마스카니는 이 한번의 성공 이후로 인상적인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1] 물론,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 외에도 여러편의 오페라와 각종 음악들을 작곡했지만 친구 프리츠(L'amico Fritz)나 일본을 배경으로한 이리스(Iris) 외에는 자국 이탈리아내에서 밖에 모르는 작품들이 많다.[2]
게다가 말년에는 무솔리니를 지지하고[3]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바람에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면서 시망크리를 탔다(...) 무솔리니 지지자라는 이유로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암울하게 살다가 1945년 8월 2일, 로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친구라고 할수 있는 자코모 푸치니가 워낙 넘사벽이라 묻힌 느낌도 있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대히트 이후로 이 히트를 뒤있는 작품을 쓰지 못해서 이래저래 안습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수 있을듯.
2 마스카니의 작품들
- 교향곡 C단조 (1879)
- 바이올린을 위한 멜로디 (1880)
- 교향곡 F장조 (1881)
- 플루트,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를 위한 사랑의 노래 (1882)
- 피아노곡 '농부의 노래' (1882)
- 4중주를 위한 왈츠 (1887)
- 첫번째 교향곡 F장조(1890)
- 가곡 '해학' (1890)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
- 친구 프리츠(1891)
- 이리스(1898)
- 관현악곡 '가보트 인형' (1900)
- 네로네 (1935) 흑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