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

파일:/img/img link7/814/813408 1.jpg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파바로티의 모습

500px
아저씨의 리즈시절.

1 개요

Luciano Pavarotti[1], 1935년 10월 12일 ~ 2007년 9월 6일

하이 C의 제왕[2]
천상의 목소리, 역사상 최고의 테너[3]

이탈리아 모데나 출생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 3대 테너(The Three Tenors)라고 불렸다. 파바로티 사후엔 도밍고와 카레라스 모두 이 칭호가 없어졌지만...
덧붙이자면, 남녀 성부(part, 聲部) 통틀어 국내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성악가라 하겠다. 그가 불렀던 '네순 도르마'[4]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있고, 워낙 목청도 크고 빼어난 고음으로 유명했던 데다가 특유의 친근한 인간미도 한몫 했기 때문에.

음반도 많이 남겼으며, 대부분 데카에서 녹음[5]했다. 미렐라 프레니, 조앤 서덜랜드, 몽셰라 카바예와 커플로 이뤄진 것이 많고, 대부분 좋은 평을 받는다.

2 생애

2.1 소꿉친구 미렐라 프레니

미렐라 프레니 문서에서도 얘기했지만,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프레니와 같은 모데나 출신이며, 둘은 소꿉친구 관계에,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자란 젖남매간 이다.[6]

후에 프레니의 모친이 되는 잔나 아르첼리(Gianna Arcelli)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고, 부친 엔니오 프레니(Ennio Fregni)는 이발사의 조수라는 별볼일 없는 직업을 가진 남자였다. 잔나 아르첼리가 프레니를 낳게된 것은 1935년 2월 27일. 아이를 낳은 잔나 아르첼리는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으려다 우연히 담배공장에서 겨우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공장에서 아르첼리는 아델레 파바로티(Adele Pavarotti)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저절로 친해졌다.

하지만, 아르첼리는 일 때문에 너무 바쁜 나머지 딸내미 프레니에게 젖을 먹여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유모에게 갓난아기였던 프레니를 맡기게 되고, 프레니는 그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게된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면서 아이를 보육원이나 동네에 사는 유모에게 맡기는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흔한 현상이었는데, 이는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추구했던 복지 정책 중 하나였다.

그리고, 프레니가 태어난 같은 해에 아델레 파바로티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때는 10월 12일.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탄생이었다. 파바로티 역시 프레니와 같은 유모에게 맡겨졌고, 둘은 그 유모의 젖을 먹고 같이 자라게 된다. 이로써 젖남매 성립(...)

어린 시절 같은 스승에게 성악을 입문한 둘은 훗날 세계적인 성악가로 거듭난 뒤에도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라보엠에서의 호흡은 역대 최고의 미미와 로돌포라는 찬사를 받는다. 라보엠은 프레니와 파바로티가 가장 선호하는 레퍼토리[7]인데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였으니 환상이 조합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카라얀의 지휘하고 파바로티와 프레니가 출연한 음반은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파일:/img/img link7/816/815697 1.jpg
친구 프리츠에서 프리츠로 분한 파바로티와 스젤역의 프레니

파일:/mypi/gup/48/1755 1.jpg
1989년 샌프란시스코 극장에서 열린 라 보엠 공연에서 로돌포역을 맡은 파바로티와 미미역을 맡은 프레니

파일:/img/img link7/816/815677 1.jpg
연대의 딸 공연에서 토니오로 분한 파바로티와 마리역의 프레니

파일:/img/img link7/816/815682 1.jpg
듀엣 연습하고 있는 젖남매. 풋풋했던 리즈 시절

2.2 데뷔

파일:/img/img link7/816/815700 1.jpg
1966년 당시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연대의 딸의 토니오역을 맡았던 파사마의 사진. 수염이 없으니 영 적응이 안 된다.

2.3 조앤 서덜랜드와의 만남

파일:/img/img link7/816/815705 1.jpg
조앤 서덜랜드 (Joan Sutherland, 1926년 11월 7일 ~ 2010년 10월 10일)

파일:/img/img link7/816/815704 2.jpg
1966년 연대의 딸 공연에서 토니오역의 파바로티와 마리역의 서덜랜드, 호르텐시우스역의 쥘 브뤼에르

파일:/img/img link7/816/815706 2.jpg
파바로티와 서덜랜드

파일:/img/img link7/816/815707 1.jpg
1970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열린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서 알프레도역의 파바로티와 비올레타를 맡은 서덜랜드

2.4 쓰리테너 콘서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에게 세계 3대 테너라는 별명을 준 콘서트이다. 1988년 백혈병을 완치한 카레라스가 자신이 설립한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좋은 호응을 얻었다. 도밍고와 파바로티는 카레라스의 재기를 기념하는 목적으로 다시 공연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전야제날,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 유적에서 주빈 메타의 지휘로 공연을 갖는다. 세계 최정상의 테너 셋이 모인 이 공연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데카에서 출시한 공연 음반은 클래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다. 주빈 메타의 지휘로 월드컵 전야제마다 공연을 열게 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보다 이벤트 성향이 강해지며 인기를 얻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파리에서 월드컵 전야제를 기념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공동개최를 기념하여 2001년에 서울에서, 2002년 전야제날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연을 갖는다. 다시 의기투합하여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공연을 열 것임을 선언했지만, 파바로티의 사망으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 쓰리테너 콘서트는 2005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있었다.

수많은 비평가들에게 쓰리테너 콘서트는 하나의 성대한 쇼에 불과하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지만, 쓰리테너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쓰리테너 콘서트를 통해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쓰리테너 콘서트는 하락세를 타던 클래식 음반 판매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쓰리테너 콘서트를 모방한 공연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성이 증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쓰리테너 콘서트가 비록 성대한 쇼에 불과한 콘서트라는 평은 있을 지언정 많은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인 '일부 계층만이 향유하는 고상한 취미'라는 인식으로 인한 진입 장벽을 허물고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사랑 받는 음악으로 되돌렸다는 데 큰 공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2.5 스캔들

파일:/img/img link7/816/815699 1.jpg
파일:/img/img link7/816/815699 2.jpg

3 평가

파바로티의 일생이 상세히 정리된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인물 파바로티편

4 음악적 성향

흔히 파바로티 하면 1990년 로마에서의 첫 시작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공연이 있었던 일명 '쓰리 테너 콘서트'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뒤에 무대에 섰던 거대한 자선 콘서트, '파바로티와 친구들 시리즈'의 각종 영상물 속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그의 진가는 최고로 목소리가 싱싱했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에 녹음한 도니체티와 벨리니, 그리고 로시니와 베르디의 몇몇 작품이 속하는 벨칸토 오페라 음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당시 함께했던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그녀의 남편인 지휘자 리처드 보닝, 이 세 멤버의 드림팀이 결성된 뒤 오페라 음반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다.클래식, 특히 오페라 팬들은 그저 감사할 따름.

이후로 목소리에 원숙미가 더해지고, 벨칸토 오페라의 영역에서 벗어나 베르디의 중후반기 오페라와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도 몇몇 작품에선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다. 파바로티의 라이벌 격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워낙 목소리 관리를 잘 한 것으로 유명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비교를 받는 측면이 있었지만, 생전에 파바로티도 이미 전성기가 지났을 나이에도 꽤나 좋은 목소릴 들려줬다고 평가 받는다.[8] 그를 대표하는 오페라로는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베르디의 <리골레토>,<가면무도회>, 푸치니의 <라 보엠> 등을 들 수 있겠다. 커리어 초기의 파바로티는 밝고 낭랑한 음색과 함께 고음을 훌륭히 소화했기 때문에 높고 어려운 음역과 기교가 난무하는 도니체티나 벨리니의 오페라가 그의 기량을 펼치기에 적합했다. 보다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표현과 가창력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들을 섭렵하게 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사실 파바로티는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 중 '사랑의 묘약 中 남몰래 흘리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라 보엠 中 그대의 찬손 (Che gelida manina)' 등으로 더 유명한데 확실히 여러 리사이틀에서 자주 불렀던 '네순 도르마'가 남긴 인상이 대중들에게는 더 컸었던 모양이다. 리릭 테너였던(Tenore Lirico/테노레 리리코) 파바로티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바로 대중들이 그의 노래를 들었을 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부르기 까다로운 고음이든 음악적인 표현을 살리기 어려운 프레이즈든 워낙 수월하게 부르는 가창력을 선보였기 때문인데 오죽하면 이것이 몇몇 성악 팬들 간의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슨 노래든 너무나 쉽게, 마치 기계마냥 부르는 것 같다고(...) 파바로티 이전까진 보통 리릭 테너, 리리코라 하면 물론 그냥 듣기엔 좋으나 여리여리하고 예쁘기만 한 미성의 테너라는 이미지가 강했다.[9] 파바로티 역시 천부적인 미성의 소유자였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만의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쳐 노래할 때 있어 힘 있고 우렁찬 성량과 남성다운 선과 표현력을 가진, 보통의 리리코 규격 외의 테너가 될 수 있었다.[10] 덕분에 그의 목소리엔 웅장함과 더불어 아름다운 울림과 서정적인 표현력이 공존할 수 있었고, 단순히 리릭 테너의 배역에서 그치는 게 아닌 더 무겁고 많은 힘이 요구되는 스핀토와 드라마티코의 배역도 소화할 수 있었다. 소릴 여리게 내야 하는 부분은 여리게 표현하고, 강하게 내야 하는 부분은 강하게 표현 해주는 그런 것에 있어서 그는 일가견이 있었다.

다만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계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프랑스어로 된 오페라 전곡 녹음으로는 연대의 딸이 유일하고, 독일 쪽 오페라는 아예 전멸이다.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 이도메네오란 작품을 연주한 적이 있긴 한데, 이태리어로 작곡된 오페라다.(...) 도밍고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등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과는 대조적이랄까...

이태리어 외에 다른 언어로 쓰여진 오페라 아리아나 그 밖의 성악곡들은 간혹 리사이틀 때 몇 곡 부르는 정도였다.

그래도 웬만한 이태리 작곡가들의 오페라나 가곡, 칸초네[11] 등은 전부 레퍼토리에 섭렵해 놓았다. 언어의 제약이 없었더라면 레퍼토리가 얼마나 늘어났을 진 모르는 일.물론 그런 제약마저 뛰어넘어 각기 다른 언어로 된 오페라 배역들을 섭렵한 도밍고가 있기에 통하진 않는 변명이다. 대신 도밍고는 고음의 한계 탓 인지, 확실히 벨칸토 오페라에는 취약했다.

또한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노래를 부를 때도 상당히 밝고 경쾌한 곡들을 불렀으며, 3테너 공연 중 'O Sole Mio'에서도 실수를 만회하는 아주 재치있는 기교를 사용. 청중들은 물론 같이 공연을 했던 2명의 테너들마저 즐겁게 만들었다. (물론 영상을 찾아 본다면 도밍고와 카레라스도 그에 화답한다.) 유튜브 영상[12] 하지만 이러한 찬사 속에 그늘진 면 또한 존재하고 있긴 한데, 일단 오페라 가수에게 있어 가창력과 음악성 못지 않게 중요한 연기력이 좋지 못했다. 연기력을 따지자면 플라시도 도밍고가 훨씬 돋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파바로티의 뚱뚱한 체구와 그에 따른 몸짓에서 나오는 연기는 뭔가 어설픈 면이 있었다. 가창이야 물론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확실히 무대를 통해 객석에서 보이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그가 노래하는 멋진 오페라 속 남주인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는 것, 그리고 상기했던 단점을 압도적인 가창력 하나로 커버할 수 있었을 만큼 그의 노래가 최고라는 점은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이견이 있기 힘들 것이다.

5 명반과 영상물

말년의 대표적인 앨범은 바로 <파바로티와 친구들>. 크로스오버 장르의 앨범으로 3번째부터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자선 공연이 되었다. 라이브 무대의 실황을 그대로 녹음한 앨범. 세계유명 가수들이 참가한 만큼 환상적인 들을거리를 제공. 토리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기도 했었다. 함께한 가수들의 면면만 살펴 봐도 하나같이 쟁쟁한 멤버들인데, 대표적인 인물들 몇몇만 꼽아 봐도 스팅, 본 조비,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 보노, 마이클 볼튼, 보이존, 스파이스 걸스, 스티비 원더, 안드레아 보첼리, 주캐로, 비비 킹 등 하나같이 초호화 출연진이다. 주케로는 이 공연의 개근 출연자. 파바로티와 매우 친하다고. 출연 가수들이 모두 파바로티의 출연 제안을 반겼던 것은 아니다. 거장 파바로티와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 가수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보스니아편 앨범의 미니 책자에 적혀있다. 치프턴스의 리더 패디 몰로니는 3주간 파바로티의 스토킹성 추적에 결국 백기를 들고 모데나 콘서트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마이클 볼튼은 파바로티와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못하고>(흔히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라는 제목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를 열창하는데 클라이맥스인 '빈체로~!(Vincero/승리하리라!)'부분에서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 주어 파바로티가 놀랐다고. 미트로프 또한 파바로티와 <Torna a Surriento/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르는게 공포스러웠다고 회고. 그렇지만 무대는 최고였다.

6 트리비아

배우 이제훈의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인 파파로티에서 극중 이제훈의 역할인 주인공 장호에게 개명당한다성악을 하고 싶게 만든 계기가 된 인물이다. 물론 극중에서 그 계기가 되는 노래는 역시 네순 도르마.

개그콘서트에서 윤성호가 파바로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를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이름은 빠박노티(....).
  1. 국립국어원의 이탈리아어 표기세칙에 따르면 '루노 파바로티'로 표기되어야 하지만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관용을 존중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로 표기가 규정되어 있다.
  2. '하이 C'란 오페라에서 테너들이 반드시 정복해야 할 산이자, 일반적으로 테너 성부의 음역대에서 거의 최고음이라 할 수 있는 '3 옥타브 도(C5)' 음을 뜻한다. 테너로서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부담되는 음이 아닐 수 없으며, 무대에서 하이 C가 나오는 아리아를 성공적으로 잘 소화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주역 테너에 대한 평가가 결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뿐더러 공연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전성기 때 파바로티는 특히 이 음을 잘 내기로 유명했었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3. 생전 그의 활동 기간 동안은 물론이요, 아직까지도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영역을 넘볼만 한 수준의 테너는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파바로티 이전에 같은 이태리 태생으로 20세기 초 레코드 산업의 태동기에 명성을 쌓으면서 테너들의 왕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 레퍼토리의 광범위함과 나이 들어서 바리톤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심지어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병행하는 전방위적 커리어를 자랑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등이 역사상 최고의 테너 자리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 한다지만, 남녀노소, 인종, 계층, 클래식과 비클래식 팬층 등의 장벽을 넘어 세계구급 인기를 구가하며 아예 남성 성악가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의 전형을 만들어낸 것은 파바로티였다. 게다가 같은 노래라도 파바로티가 부른 곡들을 듣고 다른 테너들이 부른걸 들으면 성악에 무지한 사람이어도 체감이 가능할 정도의 차이가 난다.
  4.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에 나오는 남주인공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로 이탈리아어 표기는 'Nessun dorma'. 해석하면 '아무도 잠들지 못하고'가 되겠다. 국내에선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5. 물론, EMI에서 녹음한 전곡반이 하나 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친구 프리츠. 상대역은 미렐라 프레니 였다.
  6. 정확히는 젖동생이다. 파바로티가 프레니 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으므로...
  7. 자존심이 강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프레니의 미미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8. 사실 파바로티는 1935년생, 도밍고는 41년생으로 둘은 6살 차이가 난다. 세상 어떤 직업이 나이의 영향을 안 받겠냐만은 특히나 몸이 악기인 성악가는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질수록 점점 노래하는데 무리가 가고, 쇠퇴기가 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동세대를 살았던 그들의 경우 똑같이 좋은 목소릴 유지하기에는 파바로티가 좀 더 불리한 조건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도밍고가 사실은 1934년생으로, 오히려 파바로티보다도 1살이 더 많다는 얘기가 있다. 클래식 팬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긴 한데, 이게 정말이라면 아직까지도 오페라 가수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도밍고가 정말 존경스러우면서도 불가사의할 지경이다.흠좀무(...)오페라계의 미스테리?
  9. 물론 파바로티 이전에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한 독일의 전설적인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처럼 리릭 테너로서의 파워풀함을 보여준 예외도 있긴 했지만.
  10. 이 과정에 있어서는 최고의 황금 콤비였던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11. 보통 나폴리 민요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성악곡의 한 분류. 우리말로 딱 '이거다' 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노래인데 마치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 불려지는 유행가 같은 느낌이라면 좀 비슷할지도? 가곡과 민요의 미묘한 경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12. 36초 정도에 파바로티가 실수를 하고 다음 파트에서 재치를 부리는데 곧바로 두 테너들이 화답을 한다. 같은 곡을 2번 불러서 바로 눈치 챘겠지만 도밍고 파트를 부르는 실수를 했고 자기 파트에서 일부러 길게 끄는 재치를 날려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