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ella Freni, 1935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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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의 프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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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할머니 되었을 때, 스페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라 트라비아타" 이중창을 부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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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최근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모데나 출신[1]의 소프라노로 처음에는 음색이 가벼운 리리코 레제로에서 시작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무거운 배역[2]에도 성공하게 되어 리리코-리리코 스핀토로 전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프레니는 전성기를 60세 후반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프레니의 발성은 카를로 베르곤지, 피에로 카푸칠리, 니콜라이 갸우로프, 마리엘라 데비아와 더불어 '모범적인 발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며, 많은 성악도들의 커다란 공감이 되고 있다.
덧붙이자면 본명은 Mirella Fregni....
허나, 출생신고를 기록한 사람이 'g'를 빼먹어서 그런지 'Mirella Freni'로 명명하게 되었지만...어쨌든 모두 '미렐라 프레니(Mirella Freni)'로 기록하고...또, 그렇게 읽는다. [3]
목차
1 동향 소꿉친구 파바로티
미렐라 프레니는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엔니오 프레니(Ennio Fregni)는 이발사의 조수[4]였고, 어머니 잔나 아르첼리(Gianna Arcelli)는 몰락 귀족 이었다.[5]
프레니가 태어났을 즈음 어머니 잔나 아르첼리는 궁핍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도 잔나가 찾은 것은 담배제조공장 이었다.그 때, 잔나와 같이 일하게 된 사람은 아델레 파바로티(Adele Pavarotti)로 훗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었다.[6] 아델레는 잔나와 금새 친분을 쌓았는지 공장에서 같이 일할 때 많이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미렐라 프레니는 모친이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유모[7]에게 맡겨지고, 그 유모의 젖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리고, 1935년 10월 12일 아델레가 아들을 출산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탄생이었다. 파바로티 역시 프레니와 같은 유모에게 맡겨졌고[8], 프레니와 함께 그 젖을 같이 먹으면서 자랐는데, 당시를 회고한 프레니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와 루치아노 중에서 누가 유모의 젖을 많이 빨아 먹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리하여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젖남매는 그렇게 탄생하였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고.....
아무튼, 미렐라 프레니와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소꿉친구로 지내게 되고, 각자 유명한 성악가가 되었다는 것과 두 사람이 무대와 레코드 회사에서 같이 호흡[9]을 맞추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10]
2 어린 시절부터 보였던 재능
다행히 프레니의 집안은 궁핍한 편에 속하긴 했어도 모친의 집안쪽 환경이 프레니가 성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프레니의 외삼촌 단테 아르첼리는 1910년대에 활약했던 명소프라노들(토티 달 몬테, 발렌티나 바르톨라마시 등...)이 녹음한 레코드를 많이 수집했는데, 겨우 다섯 살 이었던 프레니가 토티 달 몬테가 부르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를 따라 불렀다는 것. 그것도 너무나 쉽게 부르는 것 이었고, 토티가 녹음한 화려한 카덴차 E플렛 음까지 정확해 내었다는 것이다. 프레니 무서운 아이
조카딸의 노래를 듣고 감탄한 외삼촌 단테 아르첼리는 자신의 형 로돌포 아르첼리[11]를 불러 프레니의 재능을 알아보게되고, 조카딸이 성악을 배울 수 있도록 협조해준다.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4년. 아홉 살이 된 미렐라 프레니는 이탈리아에서 펼쳐진 ENAL 콩쿠르에서 '변성기 전의 목소리' 부문으로 입상하게 된다. 이 당시 콩쿠르에서 프레니가 불렀던 곡은 나비부인의 "어느 개인 날(Un bal di vedremo)". 어린 프레니가 고난이도의 노래를 열창했던 장면은 RAI 방송을 타게 될 정도로 심사위원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콩쿠르가 끝난 후 프레니와 모친 잔나 아르첼리는 1910년부터 1930년대에 크게 활동했던 테너이자 당시 콩쿠르의 심사위원 이었던 베냐미노 질리를 만나게 된다.[12] 질리 역시 어린 프레니의 노래를 듣고 감탄했지만 "아직은 변성기 전입니다. 아이에게 변성기 전에 너무 노래를 시키면 목에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니 열여섯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를 시키지 마십시오."라고 충고까지 해주었다고...[13]
3 성악 교육과정
질리의 충고대로 미렐라 프레니는 16살이 될 때까지 노래 부르는 것을 참았고, 일정한 나이가 되자 본격적으로 성악 공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삼촌인 단테 아르첼리한테 음악적 감각은 미리 배워둔 상태였다.
4 전남편 레오네 마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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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네 마제라 (Leone Magiera,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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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미카엘라와 미렐라 프레니
5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만남
성악가 발굴에 일가견이 있던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만남은 프레니의 커리어를 단숨에 뒤집는다. 1963년, 프레니는 스칼라좌에서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하고 카라얀이 지휘하는 라보엠에 미미로 캐스팅된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을 극도로 몰아붙여 최상의 기량을 뽑아내는 리허설 스타일로 유명했는데, 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카라얀은 프레니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요구했으나, 프레니는 단칼에 거절한다. 당연히 엄청나게 옥신각신하게 되었는데 공연이 얼마 남지가 않아 카라얀은 '알아서 해라, 그대신 망하면 네가 책임져아한다.'라는 식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공연에서 프레니가 부르는 '내 이름은 미미'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공연이 끝난 뒤 카라얀은 프레니에게 다가가 포옹하며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내가 울어본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이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카라얀은 자신이 지휘하는 모든 공연에 프레니를 캐스팅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거장인 카라얀이 발탁한 젊은 디바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고, 프레니는 단숨에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로 프레니는 레퍼토리 성애자 카라얀의 지도 아래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하는데 오텔로, 운명의 힘, 나비부인 , 토스카, 마농 레스코등등 수많은 레퍼토리를 부르는 가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레퍼토리 확장은 프레니에게 매너리즘[14]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프레니가 스스로와 맞지 않는 배역이라고 생각했던 레퍼토리까지 흡수하라는 요구로 카라얀과 갈등을 빚는다. 이후 프레니는 투란도트에 출연하기를 요구한 카라얀과 갈등을 빚어 결별하게 된다.[15] 그러나 프레니는 카랴얀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프레니가 세계적인 성악가로 거듭난 것은 이른바 카라얀 마크가 찍힌 것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좌에서 프리마 돈나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6 라 트라비아타에서 쓴맛을 느낀 실패
미렐라 프레니 커리어의 흑역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원 아래 전폭적으로 성장하던 30대의 프레니는 1960년대 중반 스칼라좌에서 연주되는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할 것을 요구받는다. 프레니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라 트라비아타가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레퍼토리라고 생각한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냉혹하게 비판하고 야유를 쏟아붓는 스칼라좌관객들의 성향 역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 관객들의 주세페 베르디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데다, 1950년대에 스칼라좌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연기한 성악가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였다. 게다가 칼라스가 스칼라좌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라 트라비아타라서 비교가 될 것이 뻔했기에 30대의 젊은 프레니에겐 더욱 부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프레니는 무대에 오르지만 공연은 '축배의 노래'가 나올 때 부터 야유 일색이었다. 애써 무시하고 부르던 프레니는 나중엔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공연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설상가상으로 캐스팅에 반발한 레나타 스코토가 스칼라좌를 고소하기까이 이르며 더욱 막장으로 접어든다. 젊고 재능있는 성악가로 승승장구하던 프레니는 이후 극도의 슬럼프에 빠졌고 결국 첫 남편 레오니 마제라와 이혼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고 말았다.[16] 이 공연 이후 스칼라좌의 시즌 프로그램에서 라 트라비아타는 종적을 감추게 되고, 1992년에 이르러서야 리카르도 무티의 지휘로 성공적으로 연주되며 비로소 시즌 프로그램에 추가된다.
허나 프레니가 스칼라 공연을 계기로 무대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지 않았지만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67년에는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라 트리바아타 공연을 했을때는 스칼라좌에서 맛본 실패를 성공으로 만회할 수 있었고 1968년에 첫 남편 레오니 마제라의 지휘로 비올레타의 아리아 두 곡을 불러서 스튜디오 녹음에 수록한 적이 있으며 1972년에는 프랑코 보니솔리와 세스토 브루스칸티니와 함께 TV영화버젼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출연한 바 있다.[17] 이 영화판 OST도 마이너 레이블에서 출시되기도 하였다.[18] 허나 프레니가 스칼라 좌에서 느꼈던 흑역사의 탓인지 1972년 영화판을 끝으로 프레니가 라 트라비아타를 자신의 주 레퍼토리로 만들지 않은것은 사실이다.
7 니콜라이 갸우로프와의 재혼
프레니는 사생활에선 큰 스캔들은 없었으나, 재혼은 했다. 1977년[19]지휘자 레오니 마제라와 이혼하고, 불가리아의 베이스 니콜라이 갸우로프와 재혼한 것은 프레니를 거론할때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더군데나, 두 사람은 기혼자의 몸으로 만났다고 한다.(...)[20] 재혼했지만 주위에선 큰 스캔들로 보지 않았던듯. 당시 프레니의 친딸 미카엘라가 이미 성인이 되었을때라서 언론에 큰 가십거리로 잡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동갑내기 누구처럼 되지는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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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우로프와 프레니 부부
프레니는 갸우로프를 1965년에 만났는데, 당시 둘이 EMI에서 오토 클램페러의 지휘로 이뤄진 돈 조반니 녹음을 했을때였다. 그 뒤로 둘은 레코드사와 오페라 무대에서 같이 출연하기도 했고[21], 그 와중에 사랑에 빠져 결국 1979년에 들어서 재혼하게 되었으니 프레니가 마제라와 이혼한지 2년만이다.
갸우로프와 재혼한 프레니는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러시아 오페라에도 관심을 보였다. 두 번째 남편 갸우로프가 러시아 오페라에서 많이 참여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프레니의 첫 러시아 오페라는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티아나. 프레니가 타티아나역을 처음 맡은것은 1988년 세이지 오자와의 지휘로 이뤄진 빈 국립 가극장 오네긴 공연에서 였고, 당시 이탈리아 소프라노가 러시아 오페라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것도 이탈리아 번역 가사로 부른것이 아닌, 러시아 원어로 불렀다는 점에서였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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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빈 국립 가극장에서 열린 예브게니 오네긴 공연에 출연한 프레니와 갸우로프[23]
1988년 빈 국립 가극장에서 열린 오네긴 공연에서 러브레터 아리아를 부르는 타티아나역의 미렐라 프레니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1989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오네긴 전곡반도 녹음도 하게 되었으며[24], 이후 프레니는 더욱 러시아 오페라에 관심을 보이게되고,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프로코키예프의 전쟁과 평화 중 나타샤역도 맡게되었다.[25]
갸우로프와의 재혼은 프레니가 전남편 레오니 마제라랑 같이 살았을때만큼 음악적 영향은 많이 받진 못했지만, 대신 러시아 오페라를 자신의 또다른 레퍼토리로 적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선 커다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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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중 리자역의 미렐라 프레니와 게르만 장교로 분한 블라디미르 알틀란토프
이후 두 사람은 러시아 오페라 뿐만 아니라 콘서트에도 함께 출연했고, 별탈없이 부부로써 금실좋게 지냈으며, 갸우로프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내의 고향 모데나에서 함께 살았던것으로 전해진다.
8 가벼운 역할에서 무거운 배역으로 전환 성공
그녀가 무거운 역으로 전환 성공한 사례는 시몬 보카네그라의 아멜리아, 페도라의 타이틀롤,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티아나, 아드리아나 르크브뢰르,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마농 레스코, 돈 카를로스의 엘리자베타 드 발루아 였다.
특히, 시몬 보카네그라의 아멜리아 그리말디와 페도라는 그녀의 무거운 배역 중에서 찬사를 가장 많이 받았고, 또, 프레니 이전과 이후에 아멜리아 그리말디나 페도라를 성공적으로 그린 소프라노가 거의 없다는 호평을 주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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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시몬 보카네그라 공연에서 아멜리아 그리말디로 분한 프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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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열린 페도라 공연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미렐라 프레니와 로리스역의 플라시도 도밍고
9 근황
프레니는 2004년 이후로 모든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한 상태이다. 이는 프레니의 세월의 흐름도 있지만, 두 번째 남편 니콜라이 갸우로프의 부고[27]도 크다. 은퇴 후에는 고향 모데나로 돌아가서 미렐라 프레니 아카데미아(Mirella Freni Academia)를 세운 후 많은 성악도들을 가르치는 지도교수 겸 마스터 클래스 쪽으로 주력하는 편. 다행히도 건강에는 별이상 없이 잘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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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렐라 프레니 아카데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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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녀도 젊은 성악도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10 음악적 성향과 평가
- ↑ 같은 동네 살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젖남매간 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설명을 참조.
- ↑ 단, 투란도트같은 역할은 레퍼토리에 포함하지 않았다. 역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 ↑ 이탈리아어 발음에서 'gni'나 'ni'나 똑같이 '니'로 발음되니까 상관없을 듯....
- ↑ 프레니의 전남편 이었던 레오네 마제라의 저서 발성과 테크닉(원제 : Metodo e Mito)에 적혀있는 내용에 의하면 이발사의 조수 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 ↑ 프레니의 모친 잔나 아르첼리의 집안은 원래 모데나의 이름난 귀족 가문이었지만, 그 가세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고 한다.
- ↑ 노파심에 말하자면, 파바로티는 프레니 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다.
- ↑ 프레니와 파바로티를 맡아둔 유모의 이름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 ↑ 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흔한 현상이었다. 프레니나 파바로티 뿐만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가 일터로 나가면 유모나 놀이방에 맡겨지는 것이 대부분 이었는데, 이는 당시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사회 복지 제도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 ↑ 프레니와 파바로티가 호흡을 맞춘 오페라는 대표적으로 푸치니의 라 보엠,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마스카니의 친구 프리츠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친구 프리츠(EMI)와 라 보엠(Decca)은 녹음도 했다. 레코드에서만 호흡을 맡춘 것은 나비부인. 이 작품 역시 둘이 맞추는 호흡은 가히 절창이다.
- ↑ 이로인해 프레니와 파바로티가 노래를 잘 하게 된 것은 그 들을 돌봤던 유모의 젖이 아니냐는 농담도 존재한다.(...)
- ↑ 프레니의 큰 외삼촌으로, 그 역시 성악가이며 코랄레 로시니(Corale Rossini) 협회의 바리톤 가수였다.
- ↑ 베냐미노 질리는 티토 스키파, 조반니 마르티넬리, 자코모 라울리 볼피와 더불어 1910년대 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테너로, 이 당시 질리는 이미 무대에서 은퇴한 상태였다.
- ↑ 질리는 어린 파바로티에게도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라는 충고를 해준 바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루치아노 파바로티 항목 참조.
- ↑ 목소리가 급격히 무거워지고 연기에서도 목석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 ↑ 결별하게 된 이유는 투란도트에서가 아니라 아이다 빈 공연때였다. 이 당시
똥고집도 컸던카라얀이 아이다 역을 맡는 프레니한테 무리한 연기 동작까지 시키려고 했고, 제 남편 갸우로프가 맡으려고 했던 람피스 배역을 루제로 라이몬디랑 바꾸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레니나 갸우로프나 카라얀한테 크게 반발심을 두게 만드는 상황이나 마찬가지 였다. 결국 1986년 빈 공연 아이다를 계기로 프레니와 갸우로프는 카라얀과 결별하게 된다. - ↑ 이 당시 프레니가 스칼라 관객들한테 야유를 많이 받자 마제라한테 불만을 토로하고, 말다툼도 했다고 한다.(...)
- ↑ 이 영화는 일본에서 DVD로 출시 된 적은 있는데 음질과 화질이 그리 좋지 못하다.
- ↑ 이 전곡반을 들어본 대부분의 평가는 프레니의 비올레타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평과 스칼라좌 관객들이 너무 까다롭게 굴었다라는 평가도 꽤 있다.
- ↑ 어느 매체에서는 1978년이나 1979년에 이혼했다는 기록도 있다.
- ↑ 갸우로프의 전부인은 피아니스트 겸 반주자 였다.
- ↑ 프레니와 갸우로프가 같이 나온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라 보엠, 시몬 보카네그라, 돈 카를로, 에르나니,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이다. 이 중 라 보엠과 돈 카를로, 시몬 보카네그라는 녹음도 같이했다.
- ↑ 이탈리아 소프라노 중에서 타티아나역을 맡은 사람은 미렐라 프레니와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와 함께 필립스 오네긴 전곡반에 참여했던 누치아 포칠레가 유일하다. 그 전에 레나타 테발디가 오네긴 공연에서 타티아나역을 맡은 적이 있지만, 이쪽은 이탈리아 번역가사로 불렀기에 예외로 쳐두는 경우가 많다.
- ↑ 저 당시 프레니는 타티아나를, 갸우로프는 그레민 공을 연기했었다.
- ↑ 이 오네긴 전곡반은 제임스 러바인(James Levine)이 지휘한 것으로 나오기전에 프레니가 타티아나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은 음반으로 알려져있다. 프레니의 타티아나는 괜찮은데, 러바인의 지휘와 토마스 알렌의 오네긴이 차도남이 아닌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 같은 음색을 들려주기에 전체적 평가는 "영 아니올시다."라는 평이 상당수. 결론은 프레니만 불쌍하기로도 유명한 오네긴 음반이다. 지못미 프레니(...)
- ↑ 스페이드의 여왕 역시 프레니가 RCA에서 녹음도 했다. 지휘는 세이지 오자와. 덧붙이자면, 당시 신예였던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의 예레츠키를 들을 수 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 ↑ 실제로 아멜리아 그리말디의 경우 다른 성악가들(예 : 카티아 리치아렐리, 키리 테 카나와)은 외유내강한 캐릭터를 연약하게만 표현하는 소프라노가 많은데 비해, 프레니는 그 배역의 성격에 정말 싱크로율 높은 열연을 보여주었다.
프레니 이후의 최고의 아멜리아를 보지 못해서 슬프다. 엉엉...페도라의 경우 두 실황물(라 스칼라판, 메트판) 보신분들은 알겠지만, 프레니의 카리스마는 정말 뛰어나다. DG 전곡반의 안젤라 게오르규 저리가라고 느껴질 정도다. - ↑ 니콜라이 갸우로프는 2004년 6월 2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