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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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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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습)

이름페트루스 '피에트' 요하네스 카이제르
(Petrus 'Piet' Johannes Keizer)
생년월일1943년 6월 14일
국적네덜란드
출신지암스테르담
포지션레프트 윙
신체조건183cm
소속팀AFC 아약스 (1961~1974)
국가대표34경기 11골

1 소개

아약스의 독불장군

70년대 아약스의 주전 레프트 윙. 당대 최고의 레프트 윙어로, 드리블 돌파 능력, 크로스 능력이 대단했다. 아약스의 돌격대장 격의 선수로 수비진을 뒤흔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혹자들은 카이저를 크루이프가 무수히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게 도와준 열쇠라 평하기도 한다.

2 클럽

아약스의 유스팀 출진으로 1961년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1974년까지 아약스에서만 활약했으며 3차례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비롯해 6회의 에레비디지 우승 등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66-67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122골을 득점한 공격진의 일원이었고 요한 크루이프에게 무수한 패스를 찔러 득점하는 것을 도왔다.

1974년 상당히 빠르게 은퇴했는데, 이는 말년에 그의 기량이 급격하게 저하된 탓이다. 측면이 아닌 중앙으로 포지션을 옮겼지만 카이저는 적응에 실패했고 은퇴했다.

3 국가대표

1962년 네덜란드령 안틸러스 제도[1]를 상대로 데뷔했다. 1974년 월드컵에 참여했으나 롭 렌센브링크에 밀려 몇경기 나서지 못했다.

12년이나 국가대표 생활을 했으나 출장이 34경기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카이저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다기보다는 클럽을 우선시한 네덜란드의 경향도 있다. 요한 크루이프도 마찬가지. 아약스, 페예노르트가 유럽 무대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70년대 초반부터였으나 정작 70년 월드컵에 네덜란드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카이저의 성격과 페예노르트의 전설적인 윙어인 코엔 물라인의 존재도 있었다. 카이저의 성격은 상당히 괴랄했고 실수로 주심의 얼굴을 가격해 1년 출장정지 당한다던가(...)하는 일도 있었다.

4 트리비아

아약스의 최전성기의 일원이지만 리누스 미헬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헬스가 카이저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카이저만한 선수가 없어서였다. 미헬스와 카이저의 사이가 얼마나 안좋았나면 둘 사이에 2년 동안이나 대화가 없었다는 말이 이를 방증한다.

1971년 미헬스가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을때 카이저는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췄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들의 신뢰를 받았는데, 1973년에는 동료들의 투표로 주장에 뽑히기도 했다.

은퇴할때 "공식석상에서 다시는 축구를 안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흘러 유소년팀 경기를 관전하는 도중 공이 카이저에게 굴러오자 다시 보내주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는 흠좀무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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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은퇴 이후 크루이프와 함께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1. 현재는 퀴라소, 아루바 등의 국가로 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