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리누스 미헬스 (Marinus "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
생년월일 | 1928년 2월 9일 |
사망 | 2005년 3월 3일 |
국적 | 네덜란드 |
출신지 | 암스테르담 |
포지션 | FW |
소속팀 | AFC 아약스 (1946/47 - 1957/58) |
지도자 | JOS (1960/61-1963/64) AFC 아약스 (1964/65) AFC 아약스 (1965/66 - 1970/71) FC 바르셀로나 (1971/72 - 1974/75)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4) AFC 아약스 (1975/76) FC 바르셀로나 (1976/77 - 1977/78) 로스앤젤리스 아즈텍스 (1979 - 1980) FC 쾰른 (1980/81 - 1982/83)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4-85)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6-88)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8/89)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90-92) |
FC 바르셀로나 역대 감독 | |||||||||||
빅 버킹엄 (1969~1971) | → | 리누스 미헬스 (1971~1975) | → |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1975~1976) 라우레노 루이스 (1976) | |||||||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1975~1976) 라우레노 루이스 (1976) | → | 리누스 미헬스 (1976~1978) | → | 루시앵 뮬러 (1978~1979) |
“우승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1]
네덜란드의 축구인. 1928년 2월 9일 ~ 2005년 3월 3일.
토탈 사커의 창시자. 현대 축구의 기반을 만든 전술의 혁명가.[2]
축구계 최고의 콩라인인 네덜란드를 국제 메이저 대회에서 유일하게 우승시킨 감독.
1 선수 시절
1946년 AFC 아약스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뒤 1958년 은퇴를 할때까지 쭉 아약스에서만 선수생활을 하였다.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으며 총 264경기에서 122골을 넣은 꽤 수준급의 선수였다. 네덜란드 대표팀으로도 5경기를 출장했으나 득점 기록은 없다.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등 부상으로 인하여 약간은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된다.
2 지도자 시절
그의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몇몇 아마추어팀의 감독을 맡다가 1965년 친정팀 AFC 아약스의 사령탑을 맡게 된다. 그가 감독을 맡은 6시즌 동안 아약스는 자신의 애제자이자 페르소나인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탈 풋볼을 완성하여 축구의 진보를 이끌어 리그 3연패(1966~68)를 포함 4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971년에는 유로피언 컵(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챔피언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한다.[3] 이로써 미헬스는 당시 펠레가 활약한 산투스 FC와 브라질 대표팀에 비견될 만한 네덜란드 축구의 성취를 이끌었다. 이후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1971~1975년, 1976~1978년까지 6시즌 동안 바르사를 이끌며 라리가 우승 1회와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에 그쳤지만 현재의 바르사 축구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공헌을 했다. 많은 트로피 없이도 바르사 이사회가 미헬스를 신임했던 것은 비로소 팀이 원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확립해 낸 '전체 선수단이 함께 공을 가지고 공격하는' 축구 스타일은 크루이프 감독 시절과 펩 과르디올라 체제를 거쳐 완성되었다. 첫 시즌인 1971/72 시즌은 무관으로 끝냈지만 바르사는 당시 17경기 연속 무패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엘 클라시코의 성적이 미헬스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미헬스 부임 전인 1971년 2월 14일 바르사는 홈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0-1로 패했다. 그러나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 앉은 이후 라 리가에서 치뤄진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사는 6연속 무패를 달렸고, 1974년 2월 17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역사에 남을 5-0 대승을 거두며 바르사 팬들의 지지를 얻으며 그해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1974/75 시즌에는 마드리드 원정에선 0-1 패배, 홈에서는 0-0 무승부를 기록해 더 이상 면죄부를 얻지 못하고 4년 만에 사임했다.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당대 최고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를 앞세운 네덜란드는 토탈 사커의 위력을 보여주며 결승까지 승승장구 하였으나 결국 서독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콩덜란드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월드컵 종료 후 아약스를 거쳐 다시 바르셀로나로 건너가게 되고 1978년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자신의 커리어에 추가한다. 이번엔 미국으로 건너가서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의 감독을 잠시 맡은 후, 1980년 이번에는 분데스리가의 FC 쾰른의 감독을 맡는다. 은근 저니맨 감독이다 여기서 1982년 분데스리가 준우승, 1983년 DFB-포칼 우승을 차지한다.
14년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뮌헨의 '올림피아슈타디온' 에서 네덜란드를 정상으로 이끌다
유로 1988에서는 다시 한 번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참가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은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이른바 오렌지 삼총사가 버티고 있는 유럽 최강팀이었다. 조별예선에서 소련에게 일격을 당해 패하기는 하였으나 결승에서 소련을 다시 만나 2-0으로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4] 이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을 맡고 다시 한 번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하였으나 큰 족적은 없었고 1992년 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하며 그의 커리어는 끝을 맺는다. 감독 은퇴 이후에도 네덜란드 축구대표팀과 UEFA에 여러 컨설팅을 해주다가 2005년 3월 3일에 심장 수술의 후유증으로 벨기에 알스트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차범근이 레버쿠젠 시절 미헬스의 지도를 받았다. 미헬스의 축구철학과 지도방식에 큰 감명을 받은 차범근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미헬스를 꼽는다. 선수 은퇴 이후에도 문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3 평가
FIFA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감독.
2008년 타임지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순위 1위.
우승경력만을 놓고 보면 그를 뛰어넘는 감독은 꽤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리누스 미헬스를 역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는 이유는 그가 축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의 축구는 공격수는 말 그대로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맡아서 하는 축구였다. 모든 선수들은 자기가 맡은 일정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여기에 반해 '토탈 사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5] 쉽게 설명하면 공격을 할 때는 10명의 모든 필드플레이어가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를 할 때는 10명이 모두 수비에 가담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전술이 완성되려면 선수 개개인의 체력이 좋아야 하고, 전술 이해도가 높아야 하며, 서로간의 호흡이 매우 뛰어나야 했다. 그리고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에는 그의 축구를 완벽하게 구현해 줄 수 있는 요한 크루이프라는 희대의 천재가 있었다. 미헬스는 크루이프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전술을 다듬고 하나의 유기체적인 팀을 완성하였고, 아약스를 유럽 정상의 구단으로 만들었다.
토탈 사커 초창기 네덜란드 대표팀의 축구를 아래 움짤로 직접 보자. 개떼축구가 따로 없다.
이것이 월드컵 준우승팀 클래스
첨언이지만 위의 짤방을 보다시피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 사커는 말 그대로 '토탈' 그 자체였다. 공격권을 쥐고 있으면 전원 공격, 공격권을 넘겨줬으면 바로 수비로 전환한다는 생각보다 간단한 개념이지만, 실행은 녹록치 않았다.
팀에 A라는 한 선수가 있다. A가 수비 진영에 있었는데 같은 팀 선수가 볼을 끊어내서 우리팀이 공격으로 나가게 되면 A 선수도 공격에 가담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볼이 끊겨 공격권이 상대에게 넘어가는 순간 A선수는 다시 수비진영으로 죽어라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무한 반복(...). 이 뺑뺑이가 정규 경기에서는 90+@분, 만약 연장까지 가면 120+@분(...) 내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똥개 훈련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리누스 미헬스의 축구가 말그대로 '혁명'이었던 이유는 이러한 행위가 과거에도 특수한 경우에 한해 분명히 있었지만, 이것을 팀의 전체 기조로 삼고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은 리누스 미헬스가 이끌던 아약스, 네덜란드밖에 없었다는 것. 그래서 미헬스가 맡았던 팀들의 선수는 상상도 못할 훈련량을 부담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담배 피고 훈련 농땡이 치면서도 공간을 가지고 놀며 토탈 사커를 완벽하게 구현하며 이끌었던 '크루이프'가 역사에 남을 천재라고 불렸던 거다. 그나마 이것을 틀어막을 수 있었던 것 역시 토탈 사커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리베로 시스템을 운영했던 헬무트 쇤 감독과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끌었던 독일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예를 들어 1970년 월드컵의, 펠레의 브라질이나 발키레지 감독이 이끌던 이탈리아 등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리누스 미헬스는 그것을 완벽하게 다듬어 구현했고, 그 모습은 세계 축구의 페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축구는 골을 넣는 것이 제1 절대 명제다. 그것은 축구가 생긴 이후에 변함 없는 진리다. 그리고 제2 절대 명제는 실점을 안 하는 것이다. 그리고 리누스 미헬스는 그 제 1, 2 절대 명제를 뒷받침하는 제3 절대 명제인, 공격에서는 공격가담 선수가 많아야 하고, 수비에는 수비 가담 선수가 많아야 한다는 명제를 확립했다. 이제 와서 보면 이게 무슨 개떼 축구인가 싶겠지만, 현대 축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수비에는 공격수도 수비로 가담하여 수비에 참여하는 선수가 많고, 공격일때는 수비수도 공격에 가담하여 공격에 참여하는 선수가 많아야 한다는, 이 간단한 절대 명제를 최초로 증명하신 감독이 되겠다.
지금이야 풀백의 공격가담, 혹은 좌우 윙백의 오버래핑, 최전방 공격수의 2선 수비가담 등의 개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성공을 보며 다른 팀들도 토탈 사커를 받아들여 나갔고 머지 않아 세계 축구의 대세가 된다. 토탈 사커는 1980년대 말 등장한 또 한 명의 혁명가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와 함께 현대 축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 굳건히 자리잡았고, 이는 2016년 현재까지도 계속 유효하다.
또 다른 혁명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미헬스와 사키의 축구를 하게 될 것이다.
4 기록
4.1 선수 기록
- 아약스 (1946/47 - 1957/58)
- 네덜란드 에리디비지 (2) : 1946/47 , 1956/57
4.2 감독 기록
- 아약스 (1965/66 - 1970/71, 1975/76)
-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4) : 1965/66, 1966/67, 1967/68, 1969/70
- KNVB 컵 (3) : 1966/67, 1969/70, 1970/71
- 유러피언 컵 (1) : 1970/71
-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1974, 1984-85, 1986-88, 1990-92)
- FIFA 1974 서독 월드컵 준우승
- 유로 1988 우승
4.3 수상 기록
- Named Knight in the Order of Orange-Nassau: 1974
- Named Officer in the Order of Orange-Nassau: 1988
- Named Dutch manager of the century: 1999
- Named Knight of the KNVB: 2002
- UEFA Lifetime Award: 2002
- Best Manager in 50 years of professional football in the Netherlands: 2004
- ↑ 네덜란드를 유럽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리고 한 말로서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정진해야 함'을 뜻한다. 어제 내린 눈은 오늘의 해가 뜨면 녹아 사라질 뿐이니까. 감독들의 잠언이 된 명언.
- ↑ 보편적으로 축구팬들의 토탈서커 전략의 창시자는 요한 크라이프 라고 생각되어 지지만 그가 선수시절에도 존재하던 즉 그의 스승인 이 문서의 주인공이 직접 아이디어를 만들어서 선보이던 전략이며 크루이프는 그 당시 이러한 전략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선수이기에 잘못된 축구사 상식이다.
- ↑ 아약스의 트레블은 후임인 코바치가 이뤘다.
- ↑ 이것은 현재 네덜란드의 국제 메이저 대회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우승이다.
- ↑ 이 개념을 맨 처음에 제시한 사람은 잉글랜드인인 잭 레이놀스 감독이다. 그의 제자인 미헬스가 이를 다듬어 하나의 매력적인 전술로써 완성시킨 것. 청출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