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ttusili III
(? ~ B. C. 1237)
히타이트 신왕국의 제11대 왕. 영락제, 조선 세조, 리처드 3세 등의 조카 왕위 뺏기에 수천 년 전 선배격 되는 인물이다.
무르실리 2세의 막내 아들이자 무와탈리 2세의 동생으로 하투샤의 총독으로서 히타이트의 군사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무와탈리 2세의 아들인 무르실리 3세 우르히-테슈브가 왕위에 오르고 난 후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을 격파하였으며, 이후에도 네릭을 정벌하여 이를 기념하여 장남에게 네리카일리(네릭의 카일)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궁 소생이라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무르실리 3세에게 하투실리의 계속되는 성공은 정치적으로 위협으로 다가왔다. 무르실리 3세는 아버지가 타르훈타사로 옮겼던 히타이트의 수도를 다시 하투샤로 원위치시키는 등 삼촌 하투실리를 견제했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하투실리는 무르실리 3세가 즉위한 지 7년차에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에서 이긴 하투실리는 조카를 이집트로 쫓아내고[1] 기원전 1267년에 히타이트의 5번째 왕의 자리에 오른다.
하투실리 3세의 시대는 히타이트 제국의 전성기로 왕이 되기 전에도 군사적인 업적으로 외침을 막아냈으며, 카데시 전투에서 15년 정도가 지난 후 후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 조약[2]을 체결하여 우호관계를 맺고 하투실리 3세는 람세스 2세에게 두 명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외교적으로도 업적을 쌓았으며, 내정도 안정되어 하투샤에 매우 큰 궁궐과 신전들을 지어 히타이트의 국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하투실리 3세의 치세는 제국의 황혼이 드리워진 시기이기도 했다. 히타이트는 현대와 비교해도 매우 발전되고 치밀한 법 체계를 가진 국가였다. 당연히 왕위 계승에 관한 법률도 마련되어 있었으며, 왕위 계승에 대한 원칙도 어쨌든 계속 지켜져 온 상태였다. 또한 히타이트 문화에서는 가족간의 신뢰를 매우 중요시하게 여겼기 때문에 하투실리 3세의 왕위 찬탈은 기존 히타이트 사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한 행위였다.
하투실리 3세도 이를 염려해 왕권을 강화하고 하투샤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였으나, 그가 죽자마자 히타이트는 내분과 외침에 시달린 것으로 보이며 그가 죽은 지 30여년도 안 돼서 제국은 내전으로 분열되었고 수도인 하투샤는 버려지고 불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