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이트

Hittites

고대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에 존재했던 국가.

아나톨리아의 역사 - 상고대 / 고대 / 중세 / 근현대
ANADOLU TARİHİ
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상고대고대
미탄니 제국히타이트신 히타이트아시리아메디아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헬레니즘
국가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아탈로스,
비티니아, 갈라티아,
폰토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등등)
로마 제국
프리지아리디아
히타이트[[리디아|리디아, 리키아, 카리아, ]]
미케네
문명
그리스 (이오니아 / 도리아 / 에올리아)

1 개요

인류 최초의 철기 사용 국가
이집트바빌로니아와 같은 인류사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고대왕국이었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모르던 미지의 국가.

하티인들까지 계산하면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기지만, 우리가 보통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종족이나 국가는 고왕국이라고 불리는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680년)부터 시작된다. 이후 기원전 1170년대 후반 바다 민족에 의해 파괴된 이후, 그 잔재가 기원전 717년까지 소아시아 동부 지역에 잔존하였다. 수도는 하투샤.

오랫동안 성경에 '헷'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 그리고 이집트의 조각에 ht라는 표기로 등장하였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모음을 거의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h와 t라는 자음만 남은 것. 이집트학 학자들은 이를 헤테(Hete)라고 읽었지만, 나중에 밝혀진 올바른 이름은 하티(Hati)였다. 문제는 위에 언급한 사례 외는 별달리 그들과 관련된 자료가 없어 그 실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지만, 1870년 시리아의 하마라는 지역에서 그들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발견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1907년 터키의 보아즈칼레(Boğazkale) 마을 근처에서 수도 하투샤(Hattuşas)가 발굴되었으며, 히타이트라는 이름은 '하투샤인'을 의미하는 '하티'라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이므로 일대에서 유물이 방대하게 발굴되어 그 실체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이를테면 요리책까지 발굴되어서 히타이트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 다만 이 발굴된 유물들이 대부분 도서관에 있는 '문서'였으며,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 제사 기구 등은 일체 발굴되지 않았다. 국가가 멸망할 때 도시를 전소하고 값나가는 물건은 죄다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히타이트=철기라고 외우면 된다. "오리엔트 지역에 철기를 널리 보급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에 이집트에게 격퇴당했다" 정도가 서술의 전부. 저 격퇴당했다는 표현은 아마 이집트와의 전쟁을 얘기하는 것 같다.

트로이의 발굴 결과 트로이가 바로 히타이트 문명권의 도시였던 윌루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로이 항목 참조.

터키에서는 지금 살아가는 민족인 튀르크족과 그다지 상관없는 역사이지만,[1] 자신들이 살아가는 땅에 살던 이들 역사라고 꽤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국유럽 고고학자들과 히타이트 유적 발굴 및 조사에도 꽤 열정을 가지며, 미국과 합작으로 히타이트 고대사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까지도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히타이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강 하류에 존재했던 구 바빌로니아 문명과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2]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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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성문, 라이온 게이트

원래부터 소아시아에 있었던 민족은 아니며, 어딘가에서 이동해 와서 소아시아 동부에서부터 정복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발상지는 알 수 없다. 히타이트어가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히타이트 연구 초기에는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20세기 이후로는 오늘날의 동북아시아의 동투르키스탄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히타이트인들은 그 역사의 초기에 이미 장거리 원정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이는 당시의 히타이트의 국력으로는 무리한 것이었고 이후 히타이트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인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히타이트는 소아시아를 안정시킨 후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을 위해 수필룰리우마는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결혼했다. 이 왕녀는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에서 '나키아'라는 이름의 악역으로 등장한다. 신전의 재물을 축내는 등, 악랄한 만화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탐욕스런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무르시리 2세의 황후를 저주해 병사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신전에 감금되었다. 물론 동맹의 효과는 확실하여, 당시 중동 지역의 최강자였던 미탄니를 정복하며 일약 오리엔트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이후 미탄니는 하니갈바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아케나톤으로 개명한 아멘호테프 4세가 종교개혁을 했다가 어린 투탕카멘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종교개혁이 취소되고, 또 투탕카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80대의 사제인 아이가 왕위에 올랐다가 1년만에 사망하는 등의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필룰리우마는 이집트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었는데, 아들인 잔난자가 투탕카멘의 누이이자 아내인 안케세나멘의 요청으로 파라오[3]가 되기 위해여 이집트에 가는 도중 국경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이집트와 본격적으로 적대관계에 들어섰고, 히타이트는 이집트령 시리아에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전염병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히타이트 역시 전염병으로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 뒤를 이른 아르누완다 2세 등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전쟁은 흐지부지 끝났다. 이 전염병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이후에도 20년 이상 히타이트를 괴롭힌 것은 확실하다.

아르누완다 2세의 사망 이후 그 동생이면서 위의 형들이 모두 태수 자리를 담당하여 히타이트의 법령상 왕위를 이을 수 없기에 아직 어린 무르시리 2세가 왕위에 오르자 히타이트의 속국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이집트군도 히타이트에 위협을 가해 왔으며, 전염병으로 각지의 태수 자리에 있던 무르시리 2세의 형들이 잇달아 사망하는 등 일시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지만, 무르시리 2세가 이 혼란을 수습하고 전 영역을 안정시키면서 히타이트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히타이트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출해 있었다.

무르시리 2세의 후계자인 무와탈리스 2세는 기원전 1274년에 이집트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의 조각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히타이트 측의 승리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실제 전투의 경과를 보면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전투 초반에 이집트군의 절반은 궤멸당했고, 나머지 절반은 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국 마지막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보면 히타이트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이집트 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상태에서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으로 변신해서 혼자서 히타이트군을 전멸시키고 승리했다고 한다(...) 실제 전투의 경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카데시 전투의 결과로 히타이트는 우피(현재의 다마스커스 부근) 등의 이집트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고, 이집트의 동맹국이었던 아무루가 히타이트에 종속하게 되었으며,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세력은 가나안(Canaan)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에도 이집트와 긴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며, 소규모의 지역적 다툼만이 몇 번 있었을 뿐이었고, 이후 하투실리 3세의 딸이 람세스 2세와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무와탈리 2세 시대를 기점으로 히타이트는 점차 약체화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기후 변동으로 오리엔트가 점차 건조화되어 현재의 기후로 변했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인 하투샤 근처에도 쿠줄이르마크 강이 흐르지만 이 정도 수준의 수자원으로는 건조화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고, 히타이트가 약체화되면서 나일 강이라는 대하천을 끼고 있는 이집트와 역시 대하천인 유프라테스 강을 보유한 아시리아 등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지만, 이런 나라들도 점차 망조가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청동기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유럽 대륙에서 대규모 민족이동이 시작되면서 히타이트는 미케네와 윌루사 등과 함께 멸망했다. 다만 수도 하투샤에 도시 전체를 불태운 화재의 흔적은 있어도 대규모 외침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몇몇 바다 민족들의 침략으로 망했다기 보다는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상태였던 걸로 추정된다. 물론 유 럽대륙의 대규모 민족이동이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히타이트만 때린 것은 아니라서 아시리아와 이집트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위축된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히타이트가 멸망한 이후, 하투사 부근에서 히타이트인들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의 도기 양식들이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후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 강 어귀의 카르케미쉬에서 부활했지만, 이전과 같은 왕국이 아닌 몇몇 도시국가들이 잔존했을 뿐이며 군사적인 정복보다는 상업 등에 주력한 것 같다. 기원전 717년 완전히 멸망한다.

3 히타이트의 철기

비록 히타이트인들이 최초로 철기를 만들었다고는 해도, 당시에는 아직 의 이용은 초보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히타이트도 철기를 마구마구 찍어낼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는데 필요한 풀무가 없었고, 풀무가 없으면 용광로의 온도를 필요한 만큼 올리지 못했다.

히타이트 문명은 풀무의 역할을 자연의 바람으로 대체하였다. 특정한 시기에 하투사 부근의 황야에는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히타이트 인은 바로 이 시기에 황야에 용광로를 설치하고 맹렬한 황야의 바람을 풀무 대용으로 써서, 용광로가 철을 녹일 수 있는 높은 온도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히타이트는 멸망하는 날까지 하투사를 버릴 수 없었고, 그들에게 철기를 선사하는 히타이트의 신(神)들은 곧 바람과 동일시되어 표현되었다.

히타이트인들이 어느 정도 품질의 철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 특히 히타이트인들이 강철로 된 무기를 제조할 수 있었는지, 제조할 수 있었다면 언제부터였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히타이트의 유물 중에 청동기보다 우수한 품질의 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히타이트가 강철을 만들 수 있었다는 주장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기록을 보면 왕의 말을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철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부분 등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청동기보다 강한 철기를 만들 수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히타이트 인의 철기 제조 수준과는 별개로,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기술은 그 특성상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갈 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나마도 히타이트의 용광로 아니 자연풍으로는 오직 황야에 바람이 거세게 부는 얼마 안 되는 때에만 쇠를 만들 수 있었으니 생산량이 아주 적고 공급도 일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생산 시기, 생산지는 물론 제조에 필요한 기술도 아주 특수한 것으로서, 천시(天時. 황야에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는 때)와 지리(地理. 하투샤 부근의 황야)와 인화(人和.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히타이트인)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이유로 히타이트에선 바람의 신이 최고신이었기도 해서 당시 히타이트 문명에서는 철기 자체가 초자연적인 신성한 재료로 대우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히타이트는 철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청동기 시대에 속하며 철기는 매우 드물게 사용하는 특수한 물품에 불과했다.

아시리아와 사이가 나빠졌을 때는 아시리아에 대해서 청동의 원료인 주석 수출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당시에 주로 사용한 금속은 여전히 청동이었다. 히타이트인들은 농업에 대한 고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문명보다 앞선 채광기술을 바탕으로 상당량의 , 구리, 등을 채광하여 주변 국가들과 교류했다.

후에 당시의 기록에 '바다의 사람들'이라고 나와 있던 해양 민족의 등장으로 철기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넓게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서 무역로가 끊기고 문명이 파괴되어 비싼 청동기는 만들기 힘들고 값싼 철기가 널리 퍼져나갔으리라고 보는 입장. 이들은 미케네와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아시리아를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이집트까지 침공하다가 람세스 3세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그 후에도 계속 이집트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이 민족은 한동안 오리엔트 전역을 석권한 후 거짓말처럼 그 모습을 감추기 때문에 지금도 정확한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고. #

이 때문에 바다 민족의 등장으로 무역로가 끊겨서 주석과 구리를 혼합해야 만들 수 있는 청동기를 만들기 힘들어져 철기가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즉 철기가 널리 퍼진 건 바다 민족의 침공 때문에 청동기를 만들기 힘들어진 히타이트 사람들이 철기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퍼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가능성조차 최근 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되는 추세이다. 애초에 사료가 부족해 바다 민족이 철기를 사용했는지 아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Accordingly, the invading Sea Peoples were responsible for spreading the knowledge through that region. This theory is no longer held in the common current thought of the majority of scholarship"
(출처 'Metalworking/Mining in the Levant' 174-183p 저자:James D. Muhly)

현재 히타이트인들이 철기를 퍼트리는데 공헌했다는 점은 학계의 통설이다. 참고 1[4], 참고 2.[5] 사실 히타이트에 관한 논문에서 철기에 관한 글이 없는 경우가 더 드물다.

그 외에도 이집트 등에서도 극히 소량이지만 철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나, 히타이트 이전의 철기는 운철[6]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철광석을 캐서 제련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문명이 히타이트라는 뜻. 철은 비교적 흔한 광물이므로, 철광석을 제련해서 철기를 만들 기술이 있는데 히타이트처럼 철기를 사용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운철로 된 유물만을 남겼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4 히타이트의 정치와 문화

히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럽어족 아나톨리아어파에 해당하는 히타이트어를 사용했는데, 다른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언어이며 원시인구어를 재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한다. 이들의 언어는 제1차 세계대전체코의 학자 호로즈니에 의해 해독되었다. 덕분에 히타이트인들의 삶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

다소 기이한 점은, 다른 민족들은 오늘날 우리가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민족을 하티(Hati)인, 즉 히타이트인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히타이트인들 스스로는 그들이 소아시아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았던 민족이나 그들의 언어를 하티라고 지칭했다는 점이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언어를 카네스어라고 불렀는데, 카네스는 하투사 동쪽에 있는 더 오래된 도시이다. 하투사 지역을 정복하기 전에는 카네스가 히타이트인들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히타이트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그들의 정치체계와 법률이다. 히타이트의 정치체계는 타바르나(왕), 타와난나, 판쿠(귀족회의)의 세 주체에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삼권분립?) 상호 견제하게 되어 있다. 이 중에서 타바르나의 여성형인 타와난나는 대왕비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왕비와 타와난나는 별개의 지위였고 왕의 정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와난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타와난나는 여제사장의 지위도 함께 맡았으며, 왕비일 때는 왕의 배우자로서, 왕위가 계승되고 나면 왕의 어머니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왕'과 '여왕'이 별도로 계승되는 일종의 '이중왕' 제도로 보면 이해가 간편하다.

텔레피누의 칙령으로 판쿠는 왕위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왕이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해서 그가 자동적으로 다음 왕이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판쿠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는 왕위를 둘러싼 지나친 권력다툼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며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요소가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쿠와 왕 사이에 특별한 권력다툼이 일어난 흔적은 없다.

히타이트에서 시행된 200개 이상의 칙령이 발견되어 이들이 비교적 도시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타이트 이외의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법률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원칙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복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즉 눈에는 눈 하나만을 받아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재보복도 금지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히타이트의 법률은 이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우선 법률조항 자체도 이전이나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문명과 달리 매우 너그러운 편이었으며, 민법적인 문제를 형법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민법적인 문제에는 체벌보다는 배상을 규정하고, 형법적인 문제에서는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는 등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대 초기까지도 달성하지 못한 개념에 도달했다. 단, 로마는 제외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는 8가지로 한정하고 아시리아 문명권의 법률에서 흔히 보이는 가죽 벗기기, 거세, 말뚝에 꿰찌르기 같은 ㅎㄷㄷ한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아예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전에 사형에 처하는 범죄에 대해서 사형시키지 않도록 법이 바뀌었다는 언급을 바탕으로 하며, 정말로 사형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히타이트 법률에서 또다른 독특한 점은 피자유민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자유민은 상류층, 비자유민은 하류층으로 생각하며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비자유민에 대한 범죄는 배상액이 절반이다. 즉 자유민이 농노 같은 비자유민에게 범죄를 가했을 경우에 그에 대한 처벌/배상액이 비유민에 대한 범죄 처벌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비자유민이 내야 할 배상액 역시 절반이라는 것이다. 권리가 절반이면 의무도 절반인 셈이다. 상류층은 당연히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의무가 주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바빌로니아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노예의 범죄는 더 심하게 처벌하는 동시에 노예에 대한 범죄는 가볍게 처벌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지위도 다른 국가에 비해 비교적 높게 인정되어,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주어지며 이 때 자식들은 남편에게 귀속되지만 아내는 자신이 데리고 갈 자식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다른 민족을 정복하면 그들에게 히타이트의 종교를 전파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신을 하투사로 옮겨와서 숭배했다. 이 때 원래의 기도문 등을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 역시 하투사에 도입되었고, 이 때문에 수도인 하투사에서만 8개의 언어가 확인되었다. 예술이나 철학 쪽은 독자적인 발전은 크게 이루지 않은 듯하며, 구바빌로니아인들이나 다른 주변 문명의 것을 차용한 모습을 보여준다.

발굴된 히타이트의 요리책을 보면 식사로는 우유을 자주 쓰는 유제품 위주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

5 각종 매체에서의 히타이트

시노하라 치에의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는 상술된 최전성기의 히타이트를 배경으로 한다. 참고로 하투사 부근을 흐르고 있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 강의 이름이 바로 '붉은 냇물'이라는 뜻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에서도 선택 가능한 문명으로 등장. 철기의 이미지 때문인지 궁사 공격력 +1과 투석기 체력 2배[7] 라는 무지막지한 보너스가 있다.

왕가의 문장에선 이집트의 강력한 라이벌 나라로 나온다. 이즈밀 왕자라는 강력한 후계자가 있기에 주인공 멤피스에게 골칫거리이다.

Fate 시리즈에서는 맞수인 람세스 2세가 무지막지하게 강해지며 덩달아 파워업. 이런 람세스도 고전시킨 강국이다. 라메세움 텐티리스 중 주신전 외벽은 히타이트의 신철로 덮혀있는데, 범상한 대군보구는 상처없이 튕겨내는 강도를 자랑한다.
  1. 현재 터키인 같은 경우 아나톨리아 반도에 원래 살고 있던 민족에서 튀르크족으로 대체되었다기 보다는 아나톨리아 지역 내 다양한 민족들이 11세기 이후 서서히 투르크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유전자 조사를 해 보면 그리스인과 터키인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터키인이 히타이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2. 이처럼 한 국가 현재 그 국가의 거주 민족과 별 상관없는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꽤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우즈베키스탄티무르를 영웅시하고 연구하는 것, 그리고 요르단이 자국 학자들을 우대하며 페트라를 만든 나미테아인들을 조상으로 받들며 연구하는 것 등이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오로지 이슬람교무함마드에 대한 역사만 연구하고 그 이전 역사는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되려 외국인 학자들이 연구하지만 비이슬람 학자들 출입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실정인지라, 사우디아라비아 고대사 연구는 그저 주변 나라들 기록이나 자료들을 참고로 알려진 정도이다. 같은 이슬람 나라인 위의 요르단과 대조적. 더불어 사우디아바리아 고대사 연구를 아쉬워하는 학자들이 한국인 학자에게 터키의 히타이트에 대한 애정을 견주며 탄식한 적도 있을 정도이다.
  3. 이집트는 모계사회였기에 사위가 파라오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In the empire period the Hittites developed iron-working technology, helping to initiate the Iron Age. 이 글을 쓴 Robert Anthony Guisepi는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이집트-중동 관련 역사학의 권위자이다.
  5. The new knowledge thus spread across Asia, Africa, and Europe, ushering in the Iron Age.
  6. 철 성분이 많은 운석.
  7. 풀업시 300이라는 상당한 체력을 자랑한다. 탱딜 겸용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