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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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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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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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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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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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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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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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이집트일본우루과이우크라이나
비상임이사국 (2017년 ~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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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로
이집트 아랍 공화국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Arab Republic of Egypt
국기260px-Flag_of_Egypt.svg.png
면적100만 2,452km²
관개된 지역3만 4,220km²[5]
인구94,666,993명(2016)
수도카이로
정치체제군부체제, 단일국가, 공화제,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압둘팟타흐 시시 (عبدالفتاح سعيد حسين خليل السيسي)
임기2013년 7월 3일 ~ 2013년 7월 4일
2013년 7월 4일 ~ 2014년 6월 8일
2014년 6월 8일 ~ 2018년 7월 3일 (예정)
총리샤리프 이스마일 (شريف إسماعيل)
임기2015년 9월 19일 ~
1인당 GDP명목 3,740$(2015), PPP 11,849$(2015)
GDP명목 3,307억 $(2014)
시간대한국기준 -7시간
통화이집트 파운드
공용어아랍어
종교구성이슬람 90%, 콥트 정교회 기독교 9%[6], 기타 1%

1 개요


Egypt Travel Video Guide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을 계승한 아랍세계의 주축[7]

남쪽에는 남아공, 중부에는 나이지리아 북쪽에는 이집트

이집트 아랍 공화국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곰호레예트 마스르 엘아라베야, 아랍어)[8]
Arab Republic of Egypt (영어)[9]

아프리카 북동쪽에 위치한 거대한 아랍 국가. 중동으로도 분류된다. 수도는 카이로. 공용어는 아랍어이다.[10] 장대한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 사람들도 위치는 몰라도 이름은 대부분 안다.

한글 성경에는 '애굽' 혹은 '미스라임(מצרים, Mitzráyim)'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성경의 특성상 애굽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이 애굽은 이집트의 중국어 음차 표기 '아이지'의 한자 애급(埃及)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다시 애굽으로 변형된 것이란 주장이 있지만 그리스에서 이집트를 부르던 호칭인 아이귑토스의 음차라는 설도 강하다. 한국에서는 개신교인 한정으로 이집트보다 애굽이 훨씬 친숙하다.

영어 이집트(Egypt)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이귑토스(Αἴγυπτος)의 라틴어 표기인 '아이깁투스(Aegyptus)'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랍어로는 미스르(مصر, Miṣr), 이집트 아랍어 발음으로는 마스르(Maṣr)라고 하는데 이는 '두 좁은 땅'이라는 의미와 함께 '대도시'나 '문명'같은 의미도 있다. 고대 이집트 시대의 이집트어로 검은 땅이라는 뜻의 케메트(Kemet)라고 불렀으며, 현대 콥트어로도 '케미(Ⲭⲏⲙⲓ, /kʰeːmi/)'나 '키메(Ⲕⲏⲙⲉ, /kiːme/)'라고 부른다.

2 역사

3 행정구역

이집트 아랍 공화국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

Arab Republic of Egypt
번호주도
1알렉산드리아 주알렉산드리아
2아스완 주아스완
3아시우트 주아시우트
4베헤이라 주다만후르
5베니수에프 주베니수에프
6카이로 주카이로
7다칼리야 주만수라
8다미에타 주다미에타
9파이윰 주파이윰
10가르비야 주탄타
11기자 주기자
12이스마일리아 주이스마일리아
13카프르멜셰이크 주카프르멜셰이크주
14마트루 주메르사마트루
15미니아 주미니아
16무누피아 주시빈엘콤
17알와디알자디드 주카르가
18자누브시나 주아리시
19포트사이드 주포트사이드
20칼리우비야 주바나
21케나 주케나
22홍해 주후르가다
23샤르키야 주자가지그
24소하그 주소하그
25샤말시나 주엘토르
26수에즈 주수에즈
27룩소르 주룩소르

4 군사

아프리카에서는 꽤나 군사강국이다. 이스라엘과의 계속된 전쟁은 물론, 수단이나 리비아와 국경분쟁으로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2차, 3차 중동전쟁 때와는 달리,[11] 이집트군은 매번 리비아군을 박살냈다.[12] 더불어 수단과도 국경분쟁으로 사이가 안 좋다.

5 자연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농지를 자랑했지만 급격한 산업 성장과 홍수통제로 인해 나일강 연안의 농토는 날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아스완 댐 대공사를 통하여 반전을 노렸으나 결국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대신 정기적인 홍수라는 이집트의 특징도 사라지고, 비료 사용량은 늘게 되고…경제 성장에 공헌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견이 다수다. 중국의 쓰촨댐 반대론자들도 아스완 댐을 실패의 선례로 든다. 기후변화 탓도 있다. 사하라 사막이 고대로부터 꾸준히 확장해 오면서 이집트도 점점 건조해지고 있는 것. 이미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적 상당수는 사막 가운데에 있다. 물론 피라미드는 처음부터 나일강 서쪽 너머의 사막에 세운 것이다.

동물상의 경우 문명이 시작할 당시 하마나 사자, 심지어는 아프리카코끼리같은 거대 동물이 많았지만 세월이 지나 현재는 멸종한 상태다. 육식포유류로는 표범이나 줄무늬하이에나, 자칼, 늑대[13], 몽구스등이 있으며 날쥐나 곰쥐, 박쥐등 소형 포유류, 바바리양이나 가젤, 영양등 우제류가 서식하는 편이다. 새로는 이집트독수리나 대머리수리등 맹금류이 있으며 그 밖에도 펠리컨이나 각종 물새가 산다. 그 밖에도 코브라나 각종 도마뱀이 있으며 사막에는 전갈이나 각종 곤충들이 산다. 나일악어는 매체마다 이집트에 현재도 서식하는지 전멸했는지 말이 나뉘는데 정확히 아시는 분이 수정바람.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현재도 생존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카르카로돈토사우루스스피노사우루스, 아이깁토사우루스, 파랄리티탄 같은 공룡들도 이곳에서 출토되었기에 가끔 이집토마니아를 겸하는 공룡덕후들에게 엮이기도 한다. 이외에 사르코수쿠스, 아르시노이테리움 등이 유명한 편.

6 경제

7 사회

이슬람 아랍연맹 나라에선 그럭저럭 개방적인 편이다.[14]

사실 예전에는 여자들이 히잡이나 차도르같은 것을 안 입고 다니는 게 더 많았는데, 치한 짓 하는 남성들 덕에 히잡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집트가 워낙 더운 사막성 나라라는 거 생각하면 히잡이나 차도르같은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사막성 기후에선 되려 이렇게 살을 가리는 게 많은 옷이 몸 수분을 덜 마르게 하여 더 오래 견딜 수 있으니까. 이집트에 오랫동안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가 쓰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히잡을 쓰고 터번을 두른다. '갈라베야'라는 남녀공용의 긴 통짜옷도 굉장히 싸고, 얇고, 바람이 잘 통하기때문에 사막여행에 매우 효율적이다.

그리고 맥주도 있다! 스텔라 맥주(벨기에 산과 다른 라거 맥주) 가 바로 이집트 산 맥주. 이집트 사회는 이웃의 꽉 막힌 이슬람교 극보수주의 국가들인 수단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심지어 같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보다도 개방적이라는 평이다.[15]

이러한 개방적인 사회는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한 2012년 엎어질 뻔했다. 그러나 2013년 1년 만에 광속으로 쿠데타 크리가 터지면서 무슬림 형제단이 나가리 되는 바람에 원상복구. 그러나 이집트의 악명높은 인권 탄압은 여전해서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7.1 치안

치안이 허술한데도 처벌이 인정사정 없다. 관광객 안전을 위하여 범죄자가 거리 곳곳에 깔린 제복경찰이나 사복형사들에게 적발되면 사람을 때려서 반죽이거나 불구로 만들려는 걸 생생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집트 여행자들 가운데 일행이 여자인데 치한짓당해서 소리치고 그랬더니, 갑자기 나타난 제복경찰과 웬 사람들이 그 치한을 잡아 죽도록 패는 걸 목격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외국 여성들이 잘한다고 응원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는 치한을 보고 기겁을 하여 오히려 경찰을 뜯어말릴 지경이라고. 이집트 경찰의 이런 과도한 정의실천(?)은 상부의 지시도 있거니와[16], 이런 치한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라 별로 거슬릴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바라크가 사임한 이후인 2011년부터는 바뀔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정치 불안이 계속되면서[17] 치안에 신경쓸 행정력은 줄어든 상태에서 천하의 개쌍놈 집단인 ISIL까지 등장하여 상황은...

참고로 이 국가는 전설적인(?) 특수부대777부대의 업적(?) 덕분에 절대로 테러리스트 표적이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시나이 반도 지역에선 과거 테러로 수십명이 그냥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이집트도 테러에 안심할 수 없는 국가이며 시나이 반도쪽은 특히! 조심할 것. 수도 카이로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소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지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고 있다.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이 이집트 외교관을 잡았을 때조차 인질로 삼지는 않았다. 그냥 죽였다.

1997년 11월 17일 관광지로 유명한 룩소르에서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관광객들에게 무차별로 사격을 가해 65명이 죽은 것도 이러한 테러 중 하나. 이 중 관광객만 58명이나 죽은 참극이라 이 일로 이집트 관광이 크게 타격을 받은 바 있다. 뭐 이 일로 관광지 치안이 더 엄격해지긴 했으나 역시 2011년 아랍의 봄 이후에는...

2014년 2월 17일(한국 시간) 이스라엘과 맞닿은 국경지역인 타바 지역에서 버스 폭탄테러가 일어나 버스에 타고 있던 진천 중앙장로교회 성지순례 관광객 35명(한국인 33명, 이집트인 2명) 중 이집트인 운전사 1명과 한국인 3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며 "이집트 경제와 관광 산업, 군사령관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지속하겠다"고도 밝혔다. 테러가 발생한 이유는 종교적 갈등이 아닌 현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서였으며 모함마드 이브라힘 내무장관을 대상으로 한 차량 폭탄 테러와 파이프라인 폭발 사건도 자신들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이번 테러로 인해 이집트는 여행제한지역이 되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관광업이 타격을 받은 이집트 경제는 더더욱 타격을 받고 있다.

2015년 6월 12일 룩소르에서 또 테러 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경찰 2명과 상인 2명이 조금 다쳤을 뿐이고 범인 3명 중 1명은 자폭, 1명은 사살, 1명은 중상입은 채로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 일로 이집트 여행객이 뚝 줄어버렸다.

2015년 8월 20일 기자 지역[18]에 폭탄 테러가 있었다. 테러 당한 곳은 자그마치 이집트 국가보안부(!). 범인들은 폭탄을 설치해둔 건물 앞에 차량을 세우고 뒤따르던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면서 차량을 폭파시켰다고 한다. 이로인해 경찰관 6명을 포함해 29명이 부상을 당했다. 테러를 저지른 세력은 IS의 이집트지부를 자처하는 '시나이지방' 이다.

2015년 8월 24일 카이로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집트 현지 경찰관들의 출근 버스가 폭발하여 경찰관들 중 2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7.2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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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인구밀도 지도. 나일강 유역에만 대부분 인구가 가늘고 길게 집중되어 있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사막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이나 칠레처럼 길쭉한 나라나 마찬가지인 인구분포를 보인다. 경지면적당 인구밀도는 일본에 이어 2위이나 인구증가율이 정체, 감소세인 일본과 달리 이집트는 꾸준히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조만간 일본을 제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는 인구가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게[19] 19세기부터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들어 인구 1,000만명을 돌파하게 되었고 1950년에 2,000만명을 돌파했으며 1963년에 인구가 3,0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1975년에 인구 4,000만 명을 돌파한 시기때부터 식량 수출국에서 식량 수입국으로 돌아섰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2014년 기준으로 8,600만 명을 기록하여 독일보다 인구수가 많아졌다. 이슬람 아랍 동맹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반년만에 인구가 100만명이상을 넘겼다.#

이집트 땅 크기는 남한 면적 10배가 넘으니 큰 걱정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이집트 땅 대다수(98% 이상)가 사람이 살수없는 무더운 사막이라는 것이다. 그 사막성 기후를 뺀 곳은 다 합쳐도 남한 면적보다 훨씬 작아 오스트리아 땅 면적(8만 km²)과 비슷하다. 통계로만 1,000만명이 넘게 모여사는 카이로의 인구밀도는 서울보다도 높다! 사실 사막을 개간하려는 계획도 있기는 하고 진짜로 개간을 해서 녹지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그 인구수가 어디로 가는건 아니고 인프라도 나름대로 갖추어져 있어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상당한 경제대국이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이자 헬레니즘 제국까지 거슬러가는 오랜 고도이며, 북부 최고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400만명이 거주한다.

이런 나일강 유역에 인구 85% 이상이 모여살고 있다 보니, 온갖 오염과 여러 개발에 얽힌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인구조절하고자 콘돔을 무상으로 주는 정책을 취했다가 되려 종교적인 엄청난 비난 속에 전면 철폐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출산율이 괄목할 정도로 떨어져서 인구대체선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닌 데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베이비 붐이 일기시작하면서 다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중이다. 이집트는 2020년경이면 인구가 1억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 인구가 넘쳐난다. 2016년에는 인구가 9500만에 육박해 1억 인구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카타르 등의 부자 나라로 인력이 수출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인구를 잘 이용하면 상당한 경제대국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인구 많은 게 마냥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문제. 특히 이집트 경제는 여전히 빈곤하기만 해서 인구가 많아봤자 국가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카이로라든지 대도시들이 죄다 바닷가를 가까이 둔 지역이라 다수 지방의 개발이 아주 엉망인 것도 문제. 게다가 대도시들을 가보면 항상 짓다가 만 건물들이 가득하다. 폐건물? 단순히 계획만의 문제는 아니고, 건물 지붕에는 항상 벽돌이 가득 쌓여있는 게 자주 보이는데, 이게 건물을 다 지으면 세금이 나오기에 일부러 공사를 하는 척하여 저렇게 놔두는 게 많다고 한다. 과거 카이로 시장이 미관상 안 좋다고 이런 건물도 세금먹인다고 하려다가 엄청난 반발에 데꿀멍하여 없던 일로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이 도저히 살기 어려워서 대도시로 오면서 형성되는 빈민가 문제와 치안 문제도 고민이라고 한다.

7.3 종교

흔히 이집트 하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이집트 신화파라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특이하게도 현대에도 일부 신이교주의자들이나 흑인 우월주의자들 중 이집트 신화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들이야말로 아랍, 이슬람과는 무관한 순수한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믿는다고 자부한다. 왜 뜬금없이 흑인 우월주의자들 중 이집트 전통 신앙을 믿는 이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집트인 항목을 볼 것. 근데 사실 이들은 이집트인도 아닐 뿐더러 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튀어나온 집단이다. 이집트에서 파라오 신앙은 아무리 늦어도 서기 395년에 이르러 동로마 시대에 완전히 기독교화[20]되어 절멸하기 때문[21]이어서 우마르 칼리프 시대에 이르러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게 정복당하면서 이슬람되는 바람에 기존의 이집트 신화는 대중에게 미신으로 치부되어 신전과 신상들은 파괴되었고, 이러한 반달리즘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민족주의가 눈을 뜨고 문화재의 중요성이 확인될 때까지 꾸준히 이뤄졌다.

공식적으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명시해놓았지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실질적으로 세속국가에 속한다. 독재자무바라크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라서 이슬람 강경파들에게 미움을 받던 인물. 이스라엘과 우호 관계를 맺었던 점도 이가 갈릴 법하지만, 1992년 무니라(Mounira)라는 강경파들 소굴을 불바다로 만들어가면서까지 철저하게 강경파들을 뭉갰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지난 1997년 룩소르에서 기어코 강경파들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테러를 가해 60명이 넘는 외국관광객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일로 외국 관광객이 여행을 안 오면서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기에 강경파들을 잡아 족치고 치안은 더 강화되었고 이후로 외국관광객 테러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긴 했지만 무바라크가 2011 이집트 혁명으로 쫓겨났으니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기는 힘들다. 2013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서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랍연맹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는데, 인구 9% 정도 된다. 이는 8700만이 넘는 상당한 인구 대국(이슬람 아랍 동맹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임) 이집트를 생각하면 8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비칼케돈파교회로 5세기 이후 정통파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이집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았으나 이슬람의 지배와 십자군을 거치며 이슬람에게 인구를 역전당해 지금에 이른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대놓고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으며, 갈수록 신도가 줄어들고 있다. 이들 차별에 대하여 이집트에서 이런 농담까지 있다.

무바라크가 셰이크[22]와 콥트교 교황이 비행기를 같이 탔다.
그런데, 비행기가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무바라크가 말하길…

"지금 낙하산이 2개 뿐입니다. 아무래도,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포기하셔야 하는데
문제를 내서 맞추신 분에게 낙하산을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수락하자, 먼저 셰이크에게 문제를 냈다.

"이집트가 승리한 4차 아랍전쟁[23]에서 우리 이집트군 전사자 수는 얼마죠?"

셰이크: "예, 3,541명입니다."

무바라크: "좋습니다. 맞았습니다. 그럼 교황에게도 문제를 내겠습니다.
저 전사자들 이름을 모두 말해보세요."

교황: "…………………………???"

이런 쓴 우스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콥트교인들은 제대로 직업도 구하기 어렵고 종종 테러를 당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이래도 2천여년을 묵묵히 견뎌온 콥트교인들은 해외에서 차별많다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안 좋게 본다. 물론 콥트교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 그런건 아니며, 한때나마 이런 악조건들을 이겨내고 성공한 이집트 내 콥트인 중산층들이 꽤 늘어나기도 했었다.

지금도 심심찮게 여러 해외 기독교 다른 종파 선교사들이 가고 현재 아랍 지역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등 여러 개신교 종파나 타 종파 신자도 적지 않다. 2011년 혁명 때 타흐리르 광장에 위치한 최대 개신교회에서 데모대에 의료 지원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면서 종교 간 화해의 분위기도 조성되었고, 이전과 달리 콥틱 교회와 개신교회가 연합하는 모임도 열리는 등 분위기의 변화가 감지된다.

그래도 다른 아랍 연맹 나라보단 좀 나은 편이긴 하다. 비록 콥트교에 대한 차별 및 다른 기독교 종파 선교를 금지한다든지 그렇긴 하지만[24], 자국에서 히잡과 니캅, 아바야(차도르)를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부까지 있는 나라다. 히잡만 해도 각양각색 색깔이나 디자인으로 패션쇼까지 한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화려한 히잡이나 아바야를 금하며 죄다 검은색으로 통일하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심지어 히잡조차 안하고 서구적인 복장으로 하여도 전혀 문제가 없다. 여성 정치인들도 공식 석상에서 히잡 안쓰고 서구식 복장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아바야를 경찰이나 군이나 정부에서 싫어하는데 테러나 범죄에 악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카이로의 한 은행에선 아바야를 입은 여성 4명이 들어와 갑자기 총기를 난사하며 11억 이집트파운드나 되는 거액을 훔쳐갔다. 이 와중에 드러난 것은 그 여성들은 실은 남성들이었다는 사실. (목소리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목소리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아바야로 드러난 건 겨우 눈이기에 CCTV로 찍힌 이걸로는 범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지금까지도 범인들은 안 잡혔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은행이라든지 금융 시설에선 이런 범죄를 대단히 우려했다. 그렇다고 아바야를 입은 여성들을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없으니…고민 끝에 경찰은 아바야를 입은 여성은 은행같은 곳에선 얼굴을 드러내게 하는 법안까지 냈는데 이를 두고 수구꼴통적 성직자들이나 여론과 충돌도 벌어졌다…

더불어 아잔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하여 음량을 줄이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벌였다. 하지만 이 또한 보수파들 반발이 워낙에 거셌기에 결국 무아진들을 목소리 좋은 이들만 간추려 쓰게 하면서 다른 무아진들이 실업자된다고 반발하면서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랍 연맹 소속이면서도 세속적 정책을 꽤 많이 취한다. 물론 위에서도 나온대로 독재자가 종교 광신을 막고자 하는 점도 크지만

그러나 무바라크 사임 이후 이슬람 형제단과 무르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경 이슬람 국가로 변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3년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성이 징역 15년, 그 자식들이 징역 5년을 선고받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코란소각으로 아랍권을 분노하게 만든 미국 목사 테리 존스에게도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25] 게다가 무르시 정권도 경제에 대해서는 무능하여 물가는 계속 오르고 종교 극단 정책만 강화되면서 무능한 종교인들이나 정부요직에 앉히는 꼴에 분노한 민중들이 늬들이나 무바라크나 차이가 뭐냐며 2013년 1년여만에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정권을 국민들의 시위 + 군부 쿠데타로 뒤엎어버리면서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근데 무르시 정권의 기반인 무슬림 형제단에서 무르시 지지 시위를 하고 그걸 또 군부에서 강경진압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이집트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이집트와의 관계를 재검토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물론 엘시시 정권은 광신으로 악명높은 무르시 정권과 달리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이슬람 극단 정책을 폐지하였으며 극단주의자들을 단속한다. 특히 콥트 기독교인들을 이집트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금지하여 콥트 기독교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도 엘시시 정권이 더 낫다고 판단해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신정부에 의해 테러집단으로 규정되고, 샤리아를 기반으로 한 헌법도 무효화되었으며,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을 틈탄 IS등 극단주의 세력의 만행을 목도한 이집트 사람들의 인식도 매우 나빠져 재집권하기는 상당히 힘들어질 상황이다. 하지만 이집트 사람들의 종교성은 나날이 세지고 있다고. 그러다보니 이집트 정부는 2015년 8월에 반테러법안을 제정하여 이슬람 극단주의를 금지하고 이슬람 테러단체와 관련있는 사람은 중형을 받도록 했다.

7.4 유목민 문제

이집트 다른 문제로 알려지지 않은 게 유목민들 처리문제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인 베두인들은 이집트 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껏 떠돌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게 넘어갈 때도 그랬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달리 건드리지 않고, 되려 이들을 치안 경찰같은 온갖 직장을 주고 시나이 지역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들은 되려 이집트보다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일 정도로 이스라엘 지배시절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시나이 지역을 이집트에게 돌려주면서 이집트는 그런 직장을 죄다 무효화하고 유목까지 막으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이들은 시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집트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07년까지 시나이 지역에서 발생한 호텔 폭탄 테러 등 여러 테러의 범인들이 이런 유목민들.

이집트 정부는 병크스럽게도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이들이 알 카에다와 같은 골수 원리주의자들이라 주장했지만, 이들은 알 카에다의 지원도 거부[26]하고 있고, 미국 정부도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 없다며 터러단체로 정하지 않고 이집트의 책임을 물었다. 실제로도 유목민들을 지나치게 차별하고 억압한 이집트의 책임이 크지만. 시나이 테러로 많은 관광객들이 희생된 이스라엘 정부는 애꿎은 자신들이 당한다며 이집트를 욕하고 있다. 결국…덕분에 이들을 강압적으로 뭉개던 이집트 정부는 2007년 샤름 엘 세이흐 호텔 동시다발 폭탄 테러로 유태인만 해도 12명이 죽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분노어린 항의에 한발 물러나서 테러 용의자라며 붙잡아두던 유목민들 200여명을 석방시키고 이동 자유를 허용하면서 이들을 시나이 지역 숙박업 직장을 주면서 이들이 행하던 테러를 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들을 고용하면서 종전 고용하던 이집트 국적 종사자들이 해고되는 터라, 이들이 분노하는 게 또 문제다…

게다가, 아직도 유목민들에 대한 차별이 크다. 2008년 엠네스티를 비롯한 국제 인권단체들의 발표에 의하면, 유목민들 가운데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수용소에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결국 유목민들은 다시 분노하여 2009년 시나이 지역 여러 호텔에서 연이은 폭탄 테러 공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집트 측의 고민은 쌓여만 간다.

이집트를 여행한 한국인 여성 여행자의 책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데, 시나이 지역의 호텔에서 지내면서 별다른 문제없이 친하게 지낸 종업원들과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1년도 안가 그 호텔이 바로 유목민 과격단체 폭탄 공격에 휘말렸다. 깜짝 놀라 국제전화를 해도 그 호텔 측이 받지않아 메일이라도 보냈더니, 한참 시간이 지나 답장메일이 도착했는데 바로 종업원 가운데 한 사람이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사진을 찍고 친하게 지내던 종업원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으나, 몇몇은 눈 앞에서 폭발에 휘말려 끔살되어 토막난 이스라엘인 여행자의 시체를 보고 충격에 빠져 일을 그만두고 카이로로 돌아갔다면서 자신도 여기서 일하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감에 빠져 그만둘까 고민중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지금도 여기 치안은 굉장히 불안하다.

2012년 들어서도 여전하여 한국인 및 중국인이 납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베두인 수감자들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인질인데, 이집트 측도 난감해하는 게 위에 나온 것처럼 베두인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무력을 쓸 수도 없거니와 안 그래도 무바라크 하야 이후 군부에 대한 반발 시위 및 여러 모로 불안정한 자국 사정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8 지역 갈등

이집트인 항목 참조.

9 문화

9.1 음악


흔히 이집트 하면 떠올리는 음악의 스테레오 타입.[27] 이 음악으로도 잘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은 포트리스 2의 스핑크스 맵 음악을 떠올려보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류의 음악은 아랍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지 실제 이집트 음악이 어땠는지는 자신있게 말할수 없다. 기껏해야 당시 사용했다는 악기를 이용해 유추할 뿐. 실제로 어느 음반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음악을 재현했는데 우리가 아는 그런 흥겨운 리듬이 아니라 조선시대 궁중 음악같은 구수한(...) 리듬이 흘러나왔다!

유튜브에 Ancient Egyptian Music을 검색하면 이집트 현지인이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현곡들이 나온다. 근데 어째 댓글란을 보면 키배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대충 유럽계, 터키계, 아랍계 유저들이 '너네나라(이집트)는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 터키, 프랑스, 영국한테 지배당하고 살았다매?'라고 어그로를 끌고 이집트인들이 '우리 조상 욕하지 마라!' 하는 식.[28]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이집트는 레바논과 더불어 현대 아랍 대중음악계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집트의 현대 대중음악은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이집트 영화의 황금기와 시작을 같이하는데, 영화 음악을 작곡하였던 무함마드 압델와합, 무함마드 알까사비 등을 시작으로 아스마한과 그의 오빠인 파리드 알 아트라쉬, 움무 쿨숨 등의 가수들이 아랍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시적인 가사와 우드, 나이 등 아랍전통 악기와 타끄심이라고 하는 아랍전통곡조에 서구곡조를 붙여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움무 쿨숨은 "중동의 별" 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치뤄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이집트에 가면 택시 운전사가 라디오로 주구장창 듣는게 움무 쿨숨 노래라 카더라 이집트의 영화산업이 1980년대 이후 시들어지고, 이집트 경제의 후퇴와 더불어 이집트의 문화산업도 쇠퇴하였으나 지금도 무함마드 무니르, 쉬린 등 이집트 출신 가수들이 여전히 아랍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이집트 출신 가수가 아니어도 많은 가수들이 이집트 방언으로 노래하고 있다.


1930년대 활동한 여가수 아스마한[29]의 "Ya habibi taala elhaqni(내 사랑이여 내 뒤로 와요)"

9.2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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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요리는 중동-북아프리카 지방의 전통 요리와 함께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터키 요리 식의 요리법이 가미되었으며, 특히 이집트가 자랑하는 은 나일강의 축복을 받아 밀 곡창지대로 손꼽히던 고대부터 유명했다. 헤로도토스가 이집트인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빠지지 않은 게 바로 맥주를 먹는 점이었을 정도다.

추천할 만한 음식은 그곳 사투리로 '샤와르마(shawarma)'[30]라고 부르는 케밥과 타메이야(tameiya)이라는 콩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긴 것, - 이스라엘에서는 팔라펠(falafel)이라고 부르는 그것! - 코프타(qofta)라는 일종의 미트볼과 중동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 일명 걸레빵이라고 불리는 아에쉬(aesh) 빵이 추천할만하다. 이집트인들은 양의 뇌를 삶아서 빵에 발라먹는것도 좋아하지만 외국인들은 왠지 손을 대지 않게된다고 한다. 그리고 터키 지배를 받아서인지 이 동네 차이도 설탕물이다.(…) 더불어 바쓰부사라든지 여기에서 즐겨먹는 과자류는 무척 달기로 알아준다.

더불어 맛과는 무관하게 식료품 가격이 무척 싸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관광객은 제외(…). 더불어 지역에 따라 역시 차이가 있다.

2000년 초반 이집트를 여행한 여행가 함승모 씨 책에 의하면 사와라는 작은 도시에서 먹을 것을 사고자 먹을 거 파는 집을 한참 찾다가 겨우 영어로 브래드가 희미하게 쓰여있는 집을 발견했다. 들어가보니 역시 수공업 빵집. 그야말로 현대인에게는 웰빙인 빵, 장작을 지펴서 화학조미료나 방부제는 일절 없이 만드는 손맛이 가득한 빵을 굽더란다. 아랍어가 서툰 함씨, 반대로 영어를 거의 못하는 거기 빵집 주인, 그래서 한국 돈으로 당시 320원 정도 돈을 내주자 신문지로 방금 구운 꿀맛같은 빵을 20개가 넘게 싸주더란다! 더불어 주변에 순수 과일만 짜서 생과일 주스 파는 집을 찾아가 온갖 과일을 짠 단 주스를 마시며 빵을 먹었는데 주스값도 100원도 안했단다…이는 독재자인 무바라크가 적어도 굶주리진 말자는 정책으로 밀같은 것을 수입하여 엄청나게 싼 값으로 팔거나 보급하면서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지난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곡물 파동으로 밀값이 오르는 통에 이집트도 빵값이 몇배로 오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여러 물가까지 덩달아 오르면서 민심이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거에서도 이슬람 과격파 정당들이 대거 약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과거라면 어찌 억지로 해산시켜 막곤 했으나 민심을 눈치보니 그러지도 못한다. 게다가 무바라크도 민주화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불안한 정국에 따라 매우 유동적으로 변해버렸다.

9.3 영상 산업

중동에서 영화, 연극, 드라마 제작으로 유명한 나라가 이집트다. 특히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약 4000개로, 아랍 국가 전체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이집트의 영화산업은 1896년 첫 영화가 상영된 것부터 시작한다. 그 후 1930년대에 소규모 영화사들이 설립되어 1940년대부터 이집트는 "이집트 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대를 맞이한다. 이집트 혁명 이후 이집트 군부는 영화사들을 국유화 했으나, 황금기 시기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오마르 샤리프, 루슈디 아바자, 누르 샤리프, 파텐 하마마, 수아드 호스니, 레일라 무라드, 샤디야 등의 전설적인 배우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1960년대부터 연극산업도 활발해지면서 현재도 아랍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는 아델 이맘 등의 배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집트가 경제적으로 쇠퇴함으로 이집트 영화산업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때부터 이집트 영화계는 사우디 자본을 투자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사우디 투자자들이 이집트 영화제작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이집트 영화 특유의 자유로움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90년대부터 등장한 제작자인 엘 소브키 감독은 선정적인 주제(미국으로 치면 B급영화) 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대부분의 이집트 영화제작사들이 엘 소브키 식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면서 이집트 영화는 거기서 거기가 되어버렸다. 또한 2011 이집트 혁명 이후 군부가 집권하게 되면서 검열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현재 이집트 영화산업은 "야쿠비얀 빌딩", "카이로 678" 등 극소수의 대중영화와 독립영화를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질적으로 악화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지금도 5,60년대 영화만 본다 또 레바논과 터키가 중동의 새로운 영상 산업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이집트 영상 산업의 헤게모니가 밀린 점도 있다.

하지만 이집트 영화나 드라마등의 미디어는 지금도 아랍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명 유튜버들은 이집트 영화나 뉴스 영상등을 이용하여 패러디 하고, 이집트의 정치 풍자가인 바셈 유세프의 유튜브 채널은 무려 200만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집트 뿐만 아니라 다른 아랍국가에서도 바셈 유세프의 쇼를 즐겨보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집트 배우 라메즈 갈랄(رامز جلال‎‎)이 진행하는 Prank 몰래카메라 TV 쇼가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MBC Masr[31]에서 방영했는데 무시무시한 상황 설정 속에서 패닉 상태에 빠진 출연자들이 낚이는 모습이 백미. 이집트의 흔한 몰카 번역 패리스 힐튼 등장 편 뉴스[32] 2016년판에는 스티븐 시걸등장했다. 수위가 높아 도가 지나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IS 대원(...)이 들이닥치는 컨셉의 몰래카메라 쇼도 있다.

9.4 스포츠

9.4.1 축구

아프리카 나라답게 축구가 가장 인기가 있다. 국가대표팀에 관한 내용은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을 참고바람.

아프리카 클럽 축구에서도 최강급이라 1964년 처음 시작하여 2012년까지 모두 48번 치뤄진 CAF(아프리카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CAF Champions League)에서 이집트 구단이 4강에 진출한 게 30번이나 되어 아프리카 최대 성적이다. 결승진출 18번 및 우승 13번 또한 아프리카 최다 기록(2위인 콩고 민주 공화국이 우승 5번이다)이며 2012년 대회 결승은 알 아흘리가 4년만에 결승에 진출해 2011년 대회를 우승한 튀니지의 에스페랑스와 격돌하여 2-1로 이겨 우승하면서 2012년 FIFA 클럽 월드컵에 진출했다. 2013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올랜도 파이러츠 F.C.를 1승 1무로 제치고 우승하며 2013년 클럽 월드컵에 참가자격을 얻었다. 비록 아시아 챔피언인 광저우 헝다에게 0-2로 패하고 5,6위전에선 북중미 챔피언 CF 몬테레이에게 1-5로 참패했지만.

2014년 아프리카 챔피언스리그 대회에서 이집트 알 아흘리는 예상을 뒤엎고 알 아흘리 SC(리비아)에게 0-1,2-3. 2경기를 다 지면서 토너먼트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그나마 이집트 자말렉이 토너먼트에 올라가 2009년 클럽 월드컵 준우승을 거두며 화제를 모은 콩고 TP 마젬베와 같은 조에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결선 라운드 조예선에서 1승 1무 4패로 조꼴지로 탈락했고 2015년 대회에서도 결선 조예선 라운드에서 이집트 팀으로 홀로 올라온 스모하 SC도 똑같이 1승 1무 4패 조 꼴지로 일찌기 탈락했다.

이렇게 프로리그인 프리미어리그 인기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과열되어 문제. 90년대 후반 이집트 카이로에선 집단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원인이... 대가족이 한 공동주택에 모여 살았는데, 아내와 남편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서로 다른 탓에 중계방송을 보다가 남편이 아내를 구타했고 이웃에 살던 처남이 누나의 비명을 듣고 와서 매형을 두들겨팼다. 그러자 근처에서 살던 남편 쪽 친척들도 와서는 남편을 도왔고 처남을 도우려고 처가 사람들도 합세해 집단싸움이 되었다는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12년 2월 1일 알 아흘리와 알 바스라가 벌이던 리그 경기에서 관중들이 충돌하여 적어도 79명 정도가 죽고 1,000명 이상이 중상을 입는[33]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칼을 숨겨가지고 경기장에 들어와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경찰이 개입 안 하고 멀뚱멀뚱 지켜본 점(…)(역시 싸움은 직접 봐야 제맛!)으로 일부러 자연스럽게 폭동이 되도록 기획된 일이 아닌가하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후반부에는 경찰들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압.

9.4.2 농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농구에서도 강호이다. 과거에는 아프리카에 농구대회가 없던 시절, 아예 유로바스켓에 자주 나갔다(1937,1947,1949,1953년 대회 본선 진출).동네북처럼 당하기도 했지만 1949년 제 5회 유로바스켓을 개최했고 이 대회에서 무패를 거두며 전승으로 우승까지 차지했다. 이는 역대 유로바스켓 대회 유일무이한 비유럽 우승기록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이 차례로 독립하자 1962년 아프리카 선수권 대회(FIBA Africa Championship)를 첫 개최하여 우승했고 세네갈과 더불어 이 대회 우승을 연이어 차지하며 아프리카 최강급으로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1990년대 와서 앙골라가 아프리카 최강이 되면서 1983년 자국대회 우승(공교롭게도 결승에서 앙골라를 제치고 우승)이후로 30년째 우승을 못하고 있다. 2013 코트디부아르 대회에서도 결승에서 앙골라에게 40-57로 패해 30년만의 우승에 실패했다. 2015년 튀니지 대회에서 8강까지 4전전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지만 또 앙골라에게 8강전에서 63-83으로 참패하여 앙골라에게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이며 대회 5위로 마감했다.

10 문화유산

프랑스 루브르나 영국 런던 박물관(또는 대영박물관)이나 미국 메트로폴리탄, 러시아 에르미따주 박물관같은 세계 4대 박물관은 물론이오, 하다못해 터키 톱카프 황궁박물관에까지 이집트 유물들이 엄청나게 많은지라 정작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는 유물도 별로 없겠지?'라고 가볍게 둘러보다가 넘쳐나는 유물에 기겁할 정도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는 카이로 박물관조차도 전시할 유물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전시할 곳이 없어 계단이나 여기저기에 대충 두기까지 한단다. 땅만 대충 파도 유적이 넘쳐난다는 말까지 있다.

오죽하면 유럽이나 미국같은 나라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두면 유물들이 훼손될텐데 안타까워하고 프랑스같은 경우엔 이렇게 방치하지 말고 루브르로 가져가서 잘 보관하겠다고 개념말아먹는 헛소리를 하다가 이집트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부터 내놓고 그런 소리하라며 까였다. 그런데 참으로 얄궂은 게, 한 양심있는 프랑스인이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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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오귀스트 페르디낭 마리에트(François Auguste Ferdinand Mariette, 1821~1881)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도 20대 시절만 해도, 이집트 문화재를 파내 프랑스로 가져가던 자였다. 그러나…1858년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 최초 근대 박물관을 세우면서 개심해 문화재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고 문화재 국외 유출을 법으로까지 막게 하는데 했다.(당시 사이드 샤에게 며칠을 설득하면서 기어코 법으로 만들게 했단다.) 그걸로만 끝낸 게 아니라, 문화재를 단지 돈만 주면 팔던 이집트 사람들에게 문화재의 보호성을 일깨워주고자 교육시설도 만들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문화재 발굴에 관여시키면서 고고학 기술을 전수하게 한다든지,수많은 공로를 남겼다. 또한,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이자 당시 이집트 왕국을 통치하던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1822~1863)가 오벨리스크를 외국 왕족에게 선물로 마구 주는 걸 보고 분노하면서 가차없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갈하면서 꾸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 황제이던 나폴레옹 3세 내외가 이집트로 와서 전시된 이집트 문화재들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황후가 그 가운데 몇몇 문화재에 눈독을 들여 황제에게 프랑스로 가져갈 수 없냐고 했다. 황제도 사이드에게 일단 정중히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강대국인 프랑스를 뒤로 한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에 사이드는 문화재 관련 문제는 죄다 마리에뜨에게 맡겨두었다고 자신은 물러났다. 황제는 프랑스인이라면 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줄 알고 이야기를 했지만 마리에트는 냉담하게 "이미 프랑스 루브르에도 그런 것들이 몇만점은 있는데 왜 또 멀쩡히 있는 것을 욕심내냐면서 위대한 프랑스 황제가 좀도둑같은 짓을 저질러야 되겠는가"라면서 대놓고 앞에서 깠다. 당연히 황제 내외는 분노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고...얼마 뒤, 그는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조수이던 이븐 하지 라우드(1852~1931, 바로 이 사람이 투탕카멘 유적이 발굴되자 영국으로 빼내려고 하던 걸 필사적으로 막던 당시 이집트 박물관장이다. 마리에트가 없었다면 투탕카멘 마스크는 영국에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가 '선생님은 문화재 중 어느 게 가장 좋으세요?'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 즉시 "몽땅 다! 돌조각 하나라도 다 좋아. 함부로 버릴 수 없이 좋지."라고 대답했다. 늘그막에 '대체 왜 그리도 이집트 문화재를 아끼느냐?'며 지인이 질문하자, 그의 대답이, "이 위대한 문화재들이 세워질 때, 우리 프랑스인의 조상인 갈리아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인처럼 숲에서 짐승을 잡아먹으며 작은 마을 단위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 야만인이라던 우리 프랑스인이 어느새 으스대면서 이 문화재를 부숴가며 제 나라로 훔쳐가는 주제에 이집트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비웃는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위대한 문화재들을 그 자리에 놔둬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 뿐이다."이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찌질한 선민사상과 제국주의 사상에 젖어있던 유럽인들에게 이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현재 이집트에선 카이로 박물관 입구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 카이로 박물관은 시설이 오래되어서 문화재 보관 및 관리가 어렵다는 의견이 나와서 해외 투자로 건물을 더 현대적으로 고치고 더 크게 만드는 기획에 들어가있다. 그만큼 여태껏 이 박물관 시설 상태가 그다지 안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박물관이라도 미라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데 이집트에서는 왕과 왕비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고 심지어 문자 그대로 개나 소나 다 미이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물 미이라까지 존재해 미이라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과거에는 이걸 연료(…)로 쓰기도 했고,[34] 심지어 사람이 먹기도 했었다!
워낙 미이라를 많이 만들다 보니까 재료가 부족했는지 근처에 굴러다니던 파피루스 뭉치를 대강 그냥 안에 넣고(고대 이집트식 이면지 재활용)...봉합해버린 미이라가 발견된적이 있다. 여기서 반전은 그 파피루스 뭉치가 현대에는 실전되었던 이름만 전해지던 유명 희극이었다는점.

이집트 벽화는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얼굴은 반드시 측면을 보고 있고, 눈은 정면에서 본 모습이며, 상반신 몸은 반드시 앞을 보아 양 어깨가 대칭에 가깝게 보이도록 그리며, 하반신은 또 측면으로 그려 두었다. 이는 당시 미술에서 사람에 대한 시각을 알려주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의 양팔, 양다리 전부 그려넣어야 '완성된 사람의 그림'으로 인식했다. 사실주의 그림에서 측면으로 선 사람의 한쪽 팔이 몸에 가리어 안보인다면, 고대 이집트인은 그를 한쪽 팔만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이집트 벽화 인물들은 전부 애꾸

2000년대에 여하튼 프랑스나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 강압책을 써가면서 고대문화유산을 상당히 되돌려 받았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파라오시대 고분벽화 5점을 돌려받았으며.영국 런던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던 석기시대 유물 등 2만5000점, 미국이 갖고 있던 3000년된 목관 등등 유럽과 미국에게 3만점이 넘는 이집트 고대 유물을 돌려받았다. 이집트 문화재청장인 자히 하와스 박사가 이뤄낸 결과. 문젠 이 양반이 반유대주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유대인을 역사적으로 노예민족이라고 비하하며 노예 주제에 팔레스타인에게 미쳐 날뛴다느니 이집트에게 터무니없는 10계 허구로 우쭐거린다든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점. 하지만 이집트 고고학계에서 큰 손이라서 영향력이 쎄서 이집트 고대유물 연구에 그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미국도 유럽도 불만을 보이면서 대들지 못하고 있다.

11 외교 관계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권, 이슬람권 세계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국간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이웃한 나라들이나 몇몇 이슬람 국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4차례씩이나 중동 전쟁을 벌였던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도 같은 이슬람교를 믿고 언어도 아랍어를 쓰는 리비아, 수단같은 주변 아랍국들과도 상당히 앙숙이다. 리비아와 관계는 고대 이집트 시기때부터 리비아가 이집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온데다 1977년에 국경 지역에서 전쟁까지 벌어졌다. 수단과는 할라이브라는 항구 도시와 그 외곽 지역을 놓고 국경,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다. 1902년 국경선이 조정되면서 할라이브가 수단으로 편입되었기 때문. 반면, 비르 타윌은 이집트로 편입되었으나 이집트도 수단도 영유권을 포기하여 사실상 무주지다.

거기다 같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하고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며 이란과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국왕의 입국을 받아줬다는 이유로 양국 수교가 단절된 상태이다.

원교근공의 논리가 예나 지금이나 적용되는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탄자니아, 케냐, 모잠비크, 잠비아, 말라위, 마다가스카르, 나이지리아, 우간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몆몆 아프리카 먼 나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1.1 한국과의 관계

이집트는 대한민국과는 1961년에 영사급으로 수교하였고 북한과는 1963년 대사급으로 수교하였는데 중동전쟁 당시 북한이 군사적 지원을 함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는 (대한민국과) 수교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하였는데, 정말로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난 이듬해인 1995년에 가서야 대한민국과 대사급 관계로 격상하였다. 나 싸나이 이집트,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1999년에 당시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가, 2016년 3월에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11.2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1963년 일찍이 대사급 수교를 먼저하였고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교전중이라 이에 북한이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이집트, 시리아 등에 군사적 지원을 하게 된 계기로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북한 역시 이집트를 중동, 아프리카 외교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고, 이런 영향으로 대한민국과의 수교관계는 1995년까지 영사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가서야 남북한 모두 대사급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997년에는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관 장승길 대사가 부부 동반으로 탈북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일도 있었다.

11.3 이스라엘과의 관계

전쟁을 네번이나 치룬 앙숙이지만 일단 수교는 되어있는 둘뿐인 아랍국가이다. 자세한 것은 이집트-이스라엘 관계 항목 참조.

11.4 다른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이슬람 아랍 동맹이면서도 다른 아랍 나라들과 사이가 안 좋다. 아무래도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은 점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요르단도 마찬가지임에도 이집트만 유독 까인다.이집트에서 아랍어 공부를 한 김동문 목사는 정작 요르단 가서 아랍어를 하자 요르단 사람들이 "아랍어이긴 하지만, 당신 말투를 보니 이집트 쪽 아랍어를 배우셨구려…"라면서 그다지 안 좋은 말투로 대하여 황당했다고 한다. 대놓고 "너 왜 우리 노예들 말 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가 요르단에서 오래 살면서 느낀 게 아랍 지역 사람들이 은근히 이집트에 대하여 거부감도 있다고 한다. 아랍 여러 산유국에 운전사 등 고된 일을 하는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꽤 많다 보니 아랍에서도 유달리 후진국 신세로 우습게 보인다는 것. 그렇지만 이집트 나라, 정부는 제법 돈이 많긴 하다.(위에 언급한대로 자원도 꽤 있고 관광으로는 이슬람 아랍 동맹에선 가장 유명한 나라) 즉…국민이 직업을 찾고자 다른 산유국으로 가서 일하다 보니 저런 인식이 자리잡힌 모양.

이를 이집트에서도 모를 리 없지만 우물이 급한 게 자기들이라 저런 아랍 동맹국들의 인식에 별다른 논쟁을 벌이지 않는데, 그래도 속은 타들어가서인지 이집트에서 만들어지는 연극이나 영화나 드라마로 은근히 아랍 동맹 다른 산유국을 까면서 작은 위안을 삼기도 한다. 1990년대에 만들어져서 인기를 모은 연극 "알라가 말하길"에선 다른 아랍 나라들 사람을 맡은 배우들을 등장시켜 풍자한 바 있다.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인으로 나오는 배우는 아주 큰 재앙이 닥쳐도 와하비즘의 형님이라면서, 아무 일도 안하고 잘난 척한다든지 나오는 다른 아랍 동맹 사람들은 잘난 척하기만 하고 전혀 실속이 없다고 비웃고 풍자한다. 이 연극은 전회매진되면서 이집트 문화부 장관상, 최고 연극대상을 비롯한 상들도 휩쓸었는데 당연히 다른 아랍 나라들에선 엄청나게 비난했다. 물론 이집트 측은 개의치 않았으며, 독재자 무바라크도 3번을 연이어 보러갔다며 칭찬했다고. 이집트가 연극, 영화같은 미디어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아랍국가에 비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자유롭기 때문인데 가령 여성이 TV에 출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우디걸프 지역 국가들에서는 여성캐스터나 아나운서로 이집트 여성을 고용한다. 최근 이집트가 사우디와의 경제협정으로 아카바 만의 두 개섬을 사우디에 넘기면서 2개섬은 사우디의 영토가 되었다

11.5 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와는 소련시절부터 외교관계를 맺어왔고 지금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집트의 군사시설을 러시아에 임대하려는 계획이 이뤄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공수부대가 10월 중순에 이집트군과 대테러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사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2 여행 정보

여행 정보 문서 참조.

13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이집트

이집트 신화가 유명한데, 고대문명의 신비성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 등장하며 그럴 때마다 역사가 제멋대로 왜곡된다. 또 미라와 피라미드, 스핑크스 때문에 온갖 기이한 생물체들이 살며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법도구가 발굴되고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선 이계처럼 묘사되는 등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피해 문명이다.

유희왕에서는 멀쩡히 정체가 밝혀진 18대 파라오이름 없는 파라오가 되고 일곱 가지 비보(秘寶)로 석판에서 마물을 소환해 외침을 막는 나라로 변질되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 3부에서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숙적 DIO가 은거하고 있는 이집트로 원정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미이라 시리즈에서는 별의 별 이상한 고대인고대생물이 살고 있는 정신 나간 곳으로 등장한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개근 문명 중 하나이다. 문명 5에서는 불가사의 건설시 생산력 20% 증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황제 난이도 이하로는 사기 특성이지만 불멸자 이상의 난이도로 가면 과학력이 딸려서 이 생산력 20% 증가 혜택을 보기도 전에 다른 문명들이 상위 테크 불가사의를 뺏어가버린다.

시리어스 샘에서는 첫 작품이 고대 이집트였고, 3에서는 현대 이집트로 전체 줄거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도 유적지였던곳이 등장하지만 1에서는 대략적인 외관과 이름만 빌렸다. 3은 처음에는 카이로 시가지에서 시작하다가 유적지로 가는 구성이다. 3은 현지 취재를 한 등 어느정도 고증을 반영한듯한 모습도 있다.

대한민국의 워터파크오션월드는 고대 이집트가 테마다.

13.1 이집트 국적, 출신의 캐릭터

14 참조

  1. 철수권고, 특별여행경보 발령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2. Sharm El-Sheikh를 제외한 시나이 반도 전역 및 이집트-리비아 국경지역 전역(국경도시 Salloum을 포함, 국경지역으로부터 100km까지)
  3. 시나이 반도
  4. #
  5. 해안가에 맞닿은 남한 면적 1/3 정도 이 땅을 빼고 나머진 다 사막이다(...)
  6. 하지만 현지 콥트 기독교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대 20~25%의 인구가 콥트 기독교인이라고. 이집트 대사관 콥트 기독교인 직원 역시 이집트 인구의 30%가량이 콥트 정교회 신자라고 했다. 이런 통계치의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콥트 정교회 신자는 이집트 정부에서 통계를 줄여서 발표하는 것도 있고, 박해와 차별 문제 때문에 콥트 정교인 스스로 무슬림 일코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7. 다만 실제 위상은 인구수에 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굉장히 안습한 편이고 특히 걸프만 국가들로부터 비웃음을 많이 사는 편인데 왜냐면 경제력이 굉장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이 어느정도 되었다면 진짜로 큰 영향력을 끼칠수 있었겠지만 경제성장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실제 영향력은 나세르 시절보다 훨씬 못하다는것이 중론. 그나마 아랍권 국가에게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하지만 아랍권 이외 지역에서는 고대문화에 대한 부분만 강조되어서 안습 그래도 이거라도 어디냐 싶지만
  8. 표준 아랍어 발음으로는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9. 줄여서 ARE라고도 쓴다. 주로 공산품에서 그렇게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Made in ARE 이런 식으로
  10. 이집트에서 사용되는 아랍어는 중동쪽과는 다른 아랍어 사투리이지만, 중동에서 이집트 방송이 자주 방영되어서 많이 통용되고 있다. 주요 외국어는 영어, 프랑스어다.
  11. 단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스스로 판정승으로 여기고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보는 시각이 더 많다. 동맹인 시리아의 삽질로 인해 무리하게 깊숙히 들어갔고 약속했던 소련의 당초 무기 지원이 가격 및 지원해주는 대가 흥정 등으로 지지부진한 반면 미국천조국과 밀월관계였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총리의 바짓가랑이 붙잡고 사정사정 비는 필사적 외교전략으로 인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국의 쇼미더머니 전폭적인 군수 물자 수송 지원에 힘입어 그나마 겨우 반격하게 된다.
  12. 사실 이집트가 군사력이 강한 것도 있겠지만 여기에 중동+아프리카 주변국 중에서 리비아가 손꼽히는 군사 최약체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13. 단 우리가 흔히 부르는 늑대와는 다른 종이다. 아누비스 항목 참조.
  14. 그래서 다른 이슬람국가한테는 이웃 튀니지, 모로코와 함께 "아랍의 창녀"라는 비아냥도 듣고있다.
  15. 모로코는 이슬람권에서 개방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이슬람교의 율법 체계인 샤리아를 국법으로 채택하는 등 이슬람권에서도 어느 정도 보수적인 일면이 있는 국가이다.하지만 돈이나 물건을 훔쳤다고 절도범의 손을 절단하거나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술과 돼지고기를 사 먹었다고 장형을 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보다는 그렇게 강압적으로 샤리아를 시행하진 않는다.
  16. 관광청 간부들이 치한이 많아서 관광업에 타격이 크다고 하소연하자, 1999년 무바라크가 직접 경찰 및 특수요원들에게 「치한을 발견시 죽여도 일절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17. 무슬림 형제단 중심의 이슬람 중시파 대 세속주의파 대 군부 등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18. 행정 구역상은 기자. 다만 카이로 도시권에 포함되어서 일반적으로는 해당 지역을 카이로라고 부른다.
  19. 6000년 전부터 문명이 이어져 내려왔고, 나일강 유역의 인구부양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14세기 이전에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중 하나였다. 특히 이집트 땅 대부분이 사막이다보니 나일강 유역이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살수밖에 없었다. 2000년전에 700만명을 넘을 정도로 인구가 많았고, 지속적인 전란과 역병에도 불구하고 500~900만 명 정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중세 말 시작된 흑사병의 영향을 너무 심하게 받게 되면서 주기적으로 큰폭의 인구감소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18세기 이집트 인구는 7세기 때보다도 적을 지경이 되었다고...
  20. 다만 이집트는 로마 본토에서 주장한 것과는 다른 신학적 이론인 '단성론'을 따랐기 때문에 본토와는 다른 종파인 콥트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 헌데 다행스럽게도 이 콥트교에는 십자가 대신 앙크를 상징으로 쓰고 제례 용어 또한 고대 이집트어의 후예인 콥트어를 쓰는데다 세셰셰트(sesheshet)라는 고대시절부터 사용한 악기를 제례용으로 쓰는 등 고대 이집트 시절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 물론 이슬람화 이후로 마이너로 전락해버리지만…
  21. 더 과거로 들어가봐도 기원전 525년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한 후 기독교화 되기까지만 해도 900년 넘는(동로마 지배기와 그 이후에 등장한 이슬람 세력에게 지배당한 세월까지 합치면 외세에 지배당한 기간이 2000년이 넘는다! 그전에 힉소스, 아시리아, 흑인 왕조, 리비아 왕조 등에 지배당한 것은 제외한 계산) 세월 동안 마케도니아와 고대 로마의 지배하에 이집트 신앙 자체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은 상태라서 이미 순수한 이집트 전통 신앙이 유지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현대 이집트 문화와 고대 이집트 문화가 생판 달라보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
  22. 이슬람에서 명예직인 성직자 이맘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최고위 성직자, 다만 교황처럼 군림하진 않는다.
  23. 1973년 벌어진 전쟁으로 국제적으로 비겼다고 보는 전쟁이지만 이스라엘군도 엄청나게 사상자가 많아서 그동안 동네북처럼 당하던 이집트는 꽤나 이겼다고 생각할 만하다…비록 이집트군도 나중에 사상자가 장난아니었지만,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와 피해가 장난아니라서 6일 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이 순식간에 역적이 되어 사임했고, 골다 메이어는 핵까지 이집트에 퍼부을까? 고민했었는데 닉슨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이 핵을 쏘면 소련도 핵을 아랍 연맹에 지원하여 결국 늬들도 다 망한다! 경고하면서 그만두었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이 받은 충격이 엄청났고, 이집트는 이걸 꺼내면서 의기양양해한다. 결과적으로 시나이 반도를 되찾고 미국으로부터도 인정받게 되었으니 전쟁 목적은 전부 달성한 셈이기도 하다.
  24. 심지어 이슬람에 대한 비판도 금지하여 비판하면 징역을 3년 살아야 한다. 물론 이슬람만 하는게 아니고 기독교랑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도 금지하여 하기만 하면 징역산다. 물론 이슬람 욕하기만 하면 태형과 10년 감금같은 중형받는 사우디, 이란에 비하면 형벌이 가벼운 편이지만.
  25. 물론 무르시 정권이 망하면서 취소되었지만.
  26. 이들 저항 단체 지도자가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우린 오사마 빈 라덴 같은 미친 자들과 다르며, 그들과 절대 손 잡지 않는다. 우린 단지 먹고 살기 위하여 이집트에 저항하는 것 뿐이라는 인터뷰를 했다.
  27.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닉 & 너클즈의 스테이지 3(소닉 3까지 합할 경우 스테이지 9)인 샌도폴리스 act 2의 BGM이다. act 1의 BGM은 어느 정도 경쾌한 음악이었고 맵 자체가 밝은 톤이었기 때문에 그냥 고대 이집트풍 스테이지 정도로 각인되었지만 act 2에서는 갑자기 BGM이 기괴하게 변하면서(...) 유희왕에서나 나올법한 으스스한 연출때문에 1990년대 ~ 2000년대 초반 당시 이걸 플레이하던 초딩들은 절대 혼자서 하지 않고 형제나 친구들을 불러모아서 플레이 했다고... 게다가 이 맵자체도 게임 내에서도 유난히 난이도가 높아서 안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부분 여기까지 못 오고 카니발 나이트 존에서 막혔겠지
  28. 유럽문화의 근원을 찾아올라가보면 태반이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여기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떠올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29. 1912~1944. 본명은 아말 알 아트라쉬로, 위에 언급된 파리드 알 아트라쉬(1910~1974) 의 동생이다. 시리아의 드루즈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카이로 로 이주하였다. 영화 등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1944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아스마한이 독일 스파이로 의심받아 영국이 죽였다는 설이 있다. 오빠인 파리드는 아랍 전통기타인 우드 연주와 작곡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30.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그 샤와르마(자막으로는 슈와마로 나옴.)가 맞다.
  31. MBC의 본사는 아랍에미리트에 있지만 MBC Mars는 이집트에 본사를 두고 송출한다.
  32. 패리스 힐튼이 몰카 촬영 후 관계자들을 고소했다는 것은 루머로 밝혀졌다.
  33. 사상자 절반은 압사에서 생겨났다.
  34. 소문에 의하면 붕대에 기름처리를 한지라 활활 잘 타올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