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F

1 개요

1981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 23-F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2월 23일을 의미하는 23 de febrero의 약자이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의 이름을 따 스페인어로는 Tejerazo라 부르기도 하며, 이는 1930년대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 미수를 Sanjurjada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중남미권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딱히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고유의 정치적 전통(...)으로 여겨졌고, 다른 나라의 쿠데타와 비교해서는 황당하지만 저렇게 정부 기관을 장악하기도 전에 "우리 군부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저러저러하게 나약하고 부패한 정부가 나라를 망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라고 선언부터 하고 구데타질 하는 걸 쁘로눈씨아미엔또 (pronunciamiento)라고 부르며, 개별 쿠데타 사건을 두고 저렇게 그 주동자의 이름을 붙혀 부르는 전통이 있다. 프랑코 정권을 낳은 스페인 내전의 발단이 된 1936년 여름 쿠데타는 일단 개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1], 저렇게 황당하게 자기 쿠데타 한다고 떠벌리며 사건 터트린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장기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쁘로눈씨아미엔또에 해당되지 않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취급한다. 반대로 이 테헤로 중령의 쿠데타는 전통적인 히스패닉권의 쿠데타 행동 양식과 비슷하여 최후의 쁘로눈씨아미엔또로 취급하기도 한다.

2 쿠데타의 배경

스페인을 철권통치하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1975년 11월에 사망하고 스페인의 권력은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잘 알고 있던 카를로스 1세는 전제 왕정을 취하지 않고 프랑코 시대의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추진했다.[2]

프랑코 말기에 수상을 맡았던 아리아스 나바로가 1976년 7월에 퇴진하면서 스페인의 민주화는 가속화되었다. 후임 수상에 임명된 아돌프 수아레스 곤잘레스는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박차를 가해 1977년 4월에는 그동안 불법이었던 스페인 공산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했다. 이 결과 스페인 내전이후 소련에 오랫동안 망명해 있던 라 파시오나리아로 유명한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즈등이 귀환하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열린 총선에서는 수아레스 수상이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의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민주주의로의 급속한 이행으로 다른 유럽국가들은 이를 스페인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워 했다.

하지만 이런 스페인의 민주화에 프랑코 총통의 추종자들을 주축으로한 육군내의 우파성향 장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게다가 공산당의 합법화나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20%가 넘는 실업율 등으로 우파내에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독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77년 11월 군부내 우파의 대표적 인사인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과 피타 데 바이가 해군대장이 하티바에서 회동을 가지고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한뒤 국왕을 앞세운 소위 구국내각을 구성해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를 부활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978년 11월, 헌병대의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과 사엔스 데 이네스트리자스 중위가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인 갈락시아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전에 계획이 탄로나 테헤로 중령은 반란모의 혐의로 징역 11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갈락시아 계획의 실패후 군부내 우파세력의 쿠데타 모의는 표면화 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국내에서는 군부의 쿠데타 소문이 끊이지 않아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3 쿠데타의 발발

징역 11개월을 살고 풀려나와 다시 헌병대 중령으로 복귀한 안토니오 테헤로는 1981년 2월 23일, 200명의 치안 경비대를 이끌고 스페인 코르테스(국회) 의사당에 난입해 35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마침 이날은 수아레스 수상이 사의를 표명하고 새 수상을 선출하려는 날이었기 때문에 의사당에는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모여있었고 새 수상의 선출과정을 생중계하기 위해서 언론들도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테헤로 중령은 의사당에 난입한뒤 국회의원들에게 모두 엎드리라 고함을 지르고 자동 소총을 천장을 향해 난사하자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은 의석 밑으로 엎드렸다. 그러나 수아레스 수상과 스페인 공산당의 산티아고 카리요 서기장은 내가 왜 니들 말을 들어야 하니?라면서 엎드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당시 남겨진 사진들 보면 이 둘은 일부로 쏠테면 쏴 보라는 듯 다리 꼬고 담배피고 있다[3] [4]... 사회민주당의 펠리페 곤잘레스 서기장은 동료의원이 밀어 넘어진 상황이었다. 이 장면들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스페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와 같은 시각에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이 이끄는 전차부대가 발렌시아마드리드로 난입해 마드리드의 스페인 국영 TV방송국을 점령했다.

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움직임

쿠데타 발발후 육군 참모총장인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장군은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전화를 걸어 왕궁에서 알현을 요청했지만 카를로스 1세는 코민 장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각 지역의 사단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쿠데타에 참여하지 말것을 명령했다. 이 때의 사단장급 장성들 대부분이 카를로스 1세가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알게 되어 친해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국왕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쿠데타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5]

헌병대 사령관인 아란블루 트페테 장군이 테헤로 중령에게 쿠데타를 멈추고 투항할것을 설득했지만 테헤로 중령은 거부했다. 국왕이 쿠데타를 반대한다는것을 알게 된 코민 장군도 테헤로 중령을 국외로 망명시키려 설득했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테헤로 중령이 투항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카를로스 1세는 직접 군복을 입고 쿠데타군이 방송국을 점령하기 전에 빠져나온 취재진들을 통해 기자회견을 열어 그날 밤, 스페인 전국에 자신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에게 쿠데타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결국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다는것을 알게 되자 쿠데타에 참여한 헌병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의사당에서 탈출했다. 상황이 끝났다는것을 깨달은 테헤로 중령은 중위 이하의 헌병대원들이 기소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4일 새벽 인질로 잡고있던 국회의원들을 석방한뒤 항복했다.

5 결과

당초 쿠데타 세력은 카를로스 1세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국내각을 구성해 군사독재를 부활시킬 작정이었지만 카를로스 1세의 반대로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군부의 위신은 추락해 더이상 군부가 쿠데타를 도모하는 일은 없게 되었고 스페인의 민주화는 확고해지게 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과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된 이들중에 테헤로 중령은 1982년 총선에 옥중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선에는 실패하고 2005년에 25년형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한편, 스페인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잘짜여진 각본에 의한 카를로스 1세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의 저명한 작가인 호세 루이스 데 비라젠가 후작등은 이 쿠데타에 카를로스 1세와 연관이 있는 은행가나 가톨릭 교회 인사등의 민간인들이 후원하고 있었음을 들어 의혹을 보내고 있다. 이런 자작극 의혹에 카를로스 1세는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지 않다고. 일단 후안 카를로스가 스페인 민중이 전반적으로 받아 들이고 존경 할 수 있는 위상으로 올랐던게 이런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경력이니 이게 사실이면 후안 카를로스 뿐만 아니라 부르봉 복고 왕정 전체의 정통성과 명분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다. 사실이라면 지금 스페인 정국 전체를 시궁창 대혼란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엄청난 폭발력의 의혹이지만, 그 민감성도 워낙 절대적이다 보니 아직은 의혹 수준에 멈추어 있다.
  1. 프랑코는 쿠데타와 내전 초기에는 공화국과 좌파에 반대한다는 것만 빼고는 딱히 구심점이 없었던 국가군 진영의 유력 지도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2. 실제로 프랑코가 카를로스 1세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키면서도 정작 정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으며, 이에 카를로스 1세가 정치에 대해서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프랑코는 "지금의 통치 방식은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것이니 저에게 묻지 마세요."라고 잘라 말했다.
  3. 사실 스페인 내전시기 부터 최전선에서 싸우며 망명 시기에는 공산당 당수로서 숟하게 암살,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가 강산이 3번하고도 반 바뀐 뒤에야 모국에 돌아왔던 카리요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살아 보지도 못 했던 시대로 역행하려고 드는 철부지들의 똥깡아지 같은 시대에 역행하는 발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아레스 수상도 원론적으로는 프랑코 치하 테크노크라트로 큰 우익 인사이지만 저런 폭거는 용납하지 않을 원칙과, 이에 도전할만할 소위 올드비급의 배짱은 있었기에 현대 까지도 좌우익 대립이 험악한 스페인 정치판에서 그나마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존중하는 초당적 인물로 평가 받을 수 있었다
  4. 테헤로 대령은 1932년 생, 20살이 되었을 52년을 기점으로 해도 프랑코 체제 치하의 빈곤은 겪어 보았어도, 공포정치와 피비린내나는 자국민 대학살 숙청이 정점을 이루었던 1940년대에는 열살배기 꼬맹이었다. 반면 카리요의 경우 일단 20년 가까운 연장자여서 볼거 못볼거 다 본 광기의 시대의 베테랑이며, 무엇보다 본인이 내전 도중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공화파가 정치적 불안성을 이유로 수감 되어 있던 죄수들에게 저지른 파라쿠에요스 감옥 학살 사건의 주동자이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당시 역사적 기록과 교차 증언을 참고하면 카리요가 지휘했던 사건이란게 거의 확실하다) 정치인으로서든 사형집행인으로서든 테헤로에게 겁 먹을건 하나도 없던 양반이다
  5. 참고로 카를로스 1세를 사관학교로 보내 군사 교육을 받게 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설적이게도 프랑코가 카를로스 1세의 군내 인맥을 탄탄하게 만들어준게 나중에 쿠데타를 막아내는 큰 힘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