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군단 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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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에서 발생해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몇 안 되는 반란 시도로 알려져 있는 사건. 1995년에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 주둔해 있던 북한의 제6군단의 정치위원(소장)이 정권 전복을 기도했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알려져 있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북한이 군사 쿠데타 음모사건이라고 공개하면 북한사회에 일으킬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하여 지금까지도 북한 사회 내에선 외화벌이와 관련된 비리사건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출저: 악의 축, 국가안전보위부의 내막, 2002, 윤대일 전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탈북자)

허접하게 일으킨 몇 개의 북한 반란사건 중에서 그나마 짜임새 있는 반란이었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함경북도가 독립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 정황

사건 당시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단으로서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중국 접경지대의 수비군으로 휘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5년 초 나남구역 안전보위부 라성동을 담당하는 한 요원이 자기가 운영하던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한 건의 정보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자료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중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접수한 나남구역 안전보위부장은 이 사실을 함경북도 안전보위부 부장에게 보고했다. 함경북도 안전보위부 부장의 지시를 받은 도 안전보위부의 반탐정처 처장은 현지로 가 그 여성 정보원을 만났다. 그는 그러나 쿠데타를 준비한다고 알려진 6군단 정치부 군관의 말이 취중에 한 말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보자료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도 안전보위부의 관할 밖인 군 부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도 안전보위부 반탐정처 처장은 '허위보고'로 속단하고 도 안전보위부장에게 보고 한 뒤 자료를 서류함에 넣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4년 여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북한 권력이 공백을 보이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중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하나 골 때리는 점이 있다면 공산국가에는 정치장교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는 소련 성립 당시 능력은 있으나 사상 검증이 안 된 지휘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상 검증이 된 인물에게 지휘관과 동급의 권위를 부여해서 지휘관을 통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지휘 체계는 정치장교를 감시하는 보위부 장교까지 만들어 넣은 병맛스러운 구조였는데 정작 정치장교와 보위부 장교가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이 부분은 정치장교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으나, 소련 성립기의 정치장교 제도는 군대의 중추를 제정 러시아군 출신의 직업군인들에게 맞길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충성심이 확인되지 않은 군 지휘관을 견제할 위치에 (충성심은 있으나 군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는) 공산당원을 배치하는 제도였다. 즉, 공산주의 국가가 갓 성립된 상황에서 군주제 국가에서 성장하고 임관한 장교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던 것. 반면, 50년 이상 유지된 북한의 체제하에서는 애초에 정치장교나 보위부원이라고 해서 군 지휘관보다 (북한 정권에 대해) 더 충성스러울 것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 어차피 모두 다 북한 정권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니까. 즉, 북한이 군 지휘관+정치장교+보위부원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꼭 군 지휘관보다 정치장교가 더 충성스럽고, 정치장교보다 보위부원이 더 충성스러울 것을 기대해서라기 보다는 군의 지휘구조를 복잡하게 하고, 이들간의 상호 감시 체제를 구축하여 반란등의 행동을 위한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여지가 더 크다. 당장 이 사건을 보더라도, 2명 사이에는 의견 일치가 이뤄졌지만 3명째가 동의하지 않아서 적발된 것을 생각해 보자.

한편 정보를 제공한 그 여성정보원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데 반탐정처 처장이 속단했다고 판단하고는 이 사실을 일반 사회보위부가 아닌 군대 보위부에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6군단 보위부가 미심쩍었던 그녀는 평양에 가서 지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인민군 보위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인민군 보위국 국장이던 원응희는 즉시 수사팀을 파견해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 6군단 정치위원과 군단의 포병부 사령관을 비롯해 정변을 준비하던 군관들은 군수물자 보장을 위한 외화벌이를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마련했고 준비가 완료되면 정변을 일으킬려고 했다고 한다.북한 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외화벌이 빙자 비리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후의 군부대 교체이동과 군관 대부분을 전역시킨 것을 보면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여진다.

이 사건 이후로 1996년 2월 당시 함경북도 당위원회 조직비서는 인민군 6군단 정치위원과 평소 자주 접촉하고 교류해온 점을 고려해 평양에 유인되어 인민군 보위국의 조사를 받은 후 처형됬다. 이때 함경북도 당위원회 조직비서는 6군단 정치위원은 물론이고 함경북도 안전보위부장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증언해 결국 함경북도 보위부장도 처형됬다. 이 사건을 적발한 공로로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응희는 중장에서 대장으로 고속 승진되었고 인민군 보위국은 군에서 사령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6년 7월에 인민군 6군단은 많은 군관들을 제대시키고 해체되어 각 군단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김정일은 제2의 6군단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의 국경경비대, 해안, 철도 경비대와 사회안전보안성의 일부를 인민무력부에 통합시켜 유일적 지휘체계를 세웠다. 또한 주요 군부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1]

3 정말 반란이었나?

다만 사실 별 거 없었고 그냥 군단장과 정치장교의 알력싸움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우선 쿠데타 시도라기에는 동기와 실제 계획이 어땠는지 너무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다. 추정되는 설로는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에 대한 내전을 일으키거나 한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항에 끌어들인 다음 특수부대가 평양에 잠입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앞서 설명했듯이 6군단의 전력은 인민군 내에서도 열악한 수준인 데다 함경북도의 생산력을 감안하면 전쟁을 벌여도 당연히 평양의 중앙 정권과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쿠데타에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장악과 선전을 통한 지지의 확보인데 북한의 모든 매스미디어는 평양이 장악하고 있으며 설령 국지적인 지지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호응이나 혼란을 야기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는 점, 한국군이나 미군이 북한에 진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수 년간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대규모 반란 사건에 대한 처분 치고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일단 북한 기준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당시 전역자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원래 인민군 전역자를 아무 데나 복불복으로 끌고 가는 인민군 기준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게다가 당시 6군단에 있었고 숙청되어 싹 쓸려야 했던 좌관급 장교들마저도 생존했다는 증언까지 확보되고 있기 때문. 처형당한 경우도 가족들은 함경북도 국경지대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끝났다.

역시 자세한 정황은 북한이 붕괴 된 이후에야 밝혀질 것이다. 현재로서 확실한 것은 '1995년에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춘 주도 하에 6군단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라는 것 뿐이다.
  1. 출저(악의 축, 국가안전보위부의 내막, 전 보위부 출신 탈북자 윤대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