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1 불특정인을 흔히 의미하는 이름

2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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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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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출생, 1986년 사망. 호는 지운(遲耘)

한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이동휘,여운형,박진순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견줄정도급의 1세대 독립운동가.

전라북도 부안군의 지주 양반 출신[1]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10대때부터 구한말 구례 군수를 지낸 서택환이라는 한학자 밑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전북 군산 금호학교 선배이자 동네 인근(고창군)의 대지주였던 김성수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준 덕에 김철수는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생활중이던 젊은시절 1916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중국,대만,베트남등 아시아지역 출신 유학생들이 국제주의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 단체 신아동맹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같은해 대학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유학 지내던 시절에 우장춘과 교류[2]하며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전후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내분, 1923년 국민대표회의[3]에서 심각한 파벌대립에 크게 실망하여 국내로 귀국한다.[4]

국내로 귀국하면서 1920년대 중반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주요 멤버 중 한 명(ML파에 속했다)이었으며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가까운 사이였고 주위 사람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김철수에게 고향에 이미 본처가 있던 관계로 혼인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1929년 3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나 1930년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는다.[5] 1938년 10월 출옥했으나 1940년 여름 '시국대응사상보국연맹'이라는 전향자 단체 강제가입에 거부해 또다시 서대문예방구금소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해방맞을때까지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지냈다.

1945년, 해방을 맞자마자 출옥. 정백,이영과 같이 서울 종로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이를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한다.[6] 하지만, 이내 곧 같은시기에 결성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 의해 부정되면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된다.[7]

이후 김철수는 해방정국시기 좌익과 우익의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을 주로 맡으면서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동조, 참여하여 통일정부 구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정치에 환멸을 가지게 되어 정계은퇴 선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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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김철수

이후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6년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유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8]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가 강한 남한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인사였는데 이는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에 따르면, 김철수가 중국 상하이에 있을때,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의 횡령 혐의로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김철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납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본인도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다는 조건으로 김철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목숨만 건진 것이지, 이후에도 그와 가족들은 경찰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9]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는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김철수의 딸인 김용화 씨가 집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3 정치인

金銕洙
1906년 12월 2일 ~ 1973년 7월 3일

1906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4 기업인

1954년 2월 17일~2007년 3월 2일

숭실대학교를 졸업하여 하버드 대학교 유학을 했다. 한국IBM에서 이사를 지내다가 2002년 안철수연구소로 스카우트되어 2005년에는 안철수의 대표직을 물려받는다. 대표로 지내면서 정보보안전반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엄청난 경영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림프샘이 발병하여 대표직을 그만두었고 투병중에 숨졌다. 기타를 좋아하여 안철수연구소로 스카우트된 이후 직원들과 기타밴드를 구성하였다.

살아있을때 둘을 양(兩)철수(개그맨 양철수와는 무관)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그 시기에 하우리는 사장과 기술 본부장에 성씨는 다르고 이름이 똑같은 사람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1]

5 배우

김철수(배우) 항목 참조.

6 배구인

1970년 8월 13일 생. 한국전력의 선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전력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7 2부의 김철수

해당 항목참조.

8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 등장인물

김철수(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참조.

9 기타

  1. 그의 아버지가 쌀장사로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부안군에서 가까운 이웃동네인 고창군의 김성수의 집안 재력과 견줄정도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ㄷㄷ
  2. 1916년 동경제국대학 농학과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된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3. 개조파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4. 이 시기 김철수는 '이게 무슨 독립운동이냐? 차라리 죽고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무기력감에 빠졌다고 한다
  5. 이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김병로였는데, 1심판결이 징역 8년형 선고를 받자 김병로가 '항소를 하자'고 그에게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거부했다.
  6. 하지만, 이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강령과 규약 및 당면활동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중앙당 기구 이외에는 일정한 수의 당원 및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1920년대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관계가 불분명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20일, 박헌영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장안파는 일개 파벌집단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해체를 요구했고. 결국 결성한지 10여일만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만다. 그래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5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7. 여담으로 김철수는 박헌영하고 대단히 관계가 안좋았는데, 그의 교조주의적인 독선적 노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박헌영의 독선적인 방식을 놓고 성토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내에서 당원자격 무기한 정지권한을 받기까지 했을정도.
  8. 하지만, 김철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뿐이었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스탈린의 이론 이런거 깊이 신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30년 일제 총독부 당국의 경찰에 체포당하고 재판받았을때,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고 묻자, 김철수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고한다. 이는 그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
  9. 한국전쟁 때는 극우파들에게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다행히 현장 지휘관이 그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구해줬지만, 집이 불타며 평소 틈틈이 써오던 항일운동 수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