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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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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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이종주11~12대 문희갑13대 조해녕

文熹甲
1937년 06월 09일 ~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1937년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서 태어났다.[1]

경북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창설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86년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90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89년 토지 공개념 3개법안 입법을 주도하여 통과시켰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강력한 투기억제책이었는데,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았지만 오히려 민정당, 보수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은 10년 뒤에 모두 위헌판결을 받았다.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는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1998년 폐지됐다. 「개발이익환수제」는 2002년 1월부터 부과를 중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부담금 부과는 2004년부터 중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학자들로부터 토지공개념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분당, 일산 등 5개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여 부동산 폭등 억제정책을 주도하였으며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도시에 영구임대주택 20만 호 건설도 추진하였다.

영종도에 동북아 허브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이것이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의 기원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KTX의 기원이다.

1990년 초,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과 청와대의 압력으로 민주정의당 정호용 국회의원이 사퇴하자 치러진 대구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꼬마민주당 백승홍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호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재입당한 정호용에게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내 주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지지하여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 40대 이상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가운데 역대 대구 민선시장 중 일을 잘한 시장 1위에 꼽혔다. 37.6%의 지지도를 받아서 2위인 김범일 시장(19.6%)보다 2배가량 지지도가 나왔다. 링크

그래서인지, 정계 은퇴 후, 정당과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문희갑 전 시장 모시기 러브콜 쇄도-2015년12월29일 대구일보 기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6년 1월 15일,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아 덕담을 건네기도 하였다. 김부겸 선거사무실 찾은 문희갑 前 대구시장

대구의 폭염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기 위해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실시한 장본인으로, 재임기간 동안 6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대구에 심었다고 한다. 정계에서 은퇴한 지금도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을 맡고 있다.
  1. 본리리에 있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