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운티호 선상반란 사건

Mutiny on the Bounty

1 개요

1789년에 일어난, 해양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상반란 사건.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선상 반란사(?)에서 드물게 사실상 성공[1]이라 할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고 동기의 특이함, 그 전개의 드라마틱함, 최후의 비극성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2 사건 경위

바운티 호(H.M.A.V. Bounty)는 원래 영국 국왕의 명령으로 향신료 무역에 종사하는 무장선(Armed Vessel)이었으며 당시 항해는 빵나무(Breadfruits tree) 조사라는[2] 특별 임무를 맡은 항해였다. 정규 장교는 블라이 함장 한 사람뿐으로 그 밑으로는 준사관사관후보생, 사병이었고 식물학자 2명이 동승했다. 인원은 총 46명.

군함의 단독 지휘는 처음이었던 윌리엄 블라이 함장은 경험 많은 항해사가 필요했는데 해군성에 의해서 임명되었던 항해사(Master) 존 프라이어를 못 미더워했기 때문에, 자신과 두 번 항해를 같이 한 적이 있던 플렛처 크리스천을 부항해사(master's mate)로 임명하여 태웠다. 크리스천은 보수도 받지 않고 기꺼이 승선할 정도로 절친열 살 차이 나는 친구라는게 함정이었다.

영국에서 타히티로 가는 항로는 남아프리카희망봉을 돌아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 조금 멀지만 항로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다. 하지만 블라이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타히티에서 출발할때는 서쪽으로 항해해 결국에는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개인적인 공명심으로 험하기로 유명한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케이프 혼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한다. 항해사들이 다 반대했지만 밀어붙였는데 악천후 속에 결국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만 허비하고 남아프리카 항로로 되돌린다. 이 때 프라이어가 남아메리카 항로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했으므로 그를 해임하고 대신에 크리스천을 부장(lieutenant)[3]으로 임명했다. 승조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가득했다. 블라이 함장의 성격은 고집불통에 독선적이라 승조원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사소한 일도 채찍으로 다스렸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타히티 은 완전히 낙원이었다. 주민들은 대대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왔으며 블라이 일행을 격렬히 환영하며 거의 매일 축제를 열어주고 빵나무를 주었다. 날씨는 따뜻하고 푸르른 해변, 야자 열매, 넘쳐나는 먹을 것에 여자들은 벌거벗고 다니며 승조원들을 유혹하니 반 년 가까이 대기하는 도중[4] 현지 여성들과 친해진 승조원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원주민 여자들과 연애를 하는 선원들이 늘어났다. 특히 플렛처 크리스천이 원주민 추장의 과 사랑에 빠져 헤롱헤롱되자 블라이 함장이 나서 호통을 쳤다. 이 때 크리스천과 블라이가 등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승조원들이 마음 속으로 타히티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군율은 지엄한 법. 탈영한 수병 몇 명을 채찍질로 다스린 후에야 본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블라이의 엄격한 지휘는 계속되었고 결국 출발한지 20여일만인 1789년 4월 28일, 크리스천의 주도 하에 반란이 일어난다. 블라이 함장 편에 선 승조원들은 18명이었는데 이들을 구명 보트에 실어 망망대해로 떠나보내고 자신들은 바운티 호를 몰아 타히티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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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반란 그 후

블라이 함장과 그의 부하들은 40여일간 태평양을 무려 3,800마일(6,000km)을 방황한 끝에 1789년 6월 14일, 티모르의 네덜란드령 항구인 쿠팡(Kupang)에 도착했다.[5] 그 즉시 함장은 네덜란드 관청에 반란에 대해 보고했고 이 소식은 영국 본국에 전해진다. 생존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약 2개월은 쿠팡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렀는데 여기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있던 식물학자 한 명이 죽는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8월 20일 자카르타로 떠났으며 10월 16일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져있던 4명이 추가로 사망한다. 1790년 3월 14일 블라이 함장은 영국에 도착한다. 1년여동안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블라이 함장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영국은 해양 국가로서 국가의 근간이 해상 무역과 제해권에 있기 때문에 해적 행위, 선상 반란에 대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때문에 반란자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냈다. 영국 해군성은 군함 H.M.S. 판도라(Pandora) 함을 파견해 반란자 색출추노에 나서게 된다. 반란자들의 말로는 뻔했다. 당시 지구상에서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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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자들은 일단 타히티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무리는 (정말 멍청하게도)타히티에 정착했고, 다른 무리는 연애하던 여자들을 데리고 영국 해군이 찾을 수 없도록 무인도인 핏케언 섬[7]에 도착하여 바운티 호에 불을 질러 침몰 시키고[8] 그 곳에 정착했다.[9] 1791년 3월 21일, 판도라 함이 타히티에 도착했고 승조원들과 해병대가 한 달여간에 걸쳐 섬을 토끼몰이하듯 포위하여 중심으로 수색해들어간 결과 14명의 반란자들을 잡아들였다.

판도라 함은 나머지 반란자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모아, 통가 등 남서 태평양의 섬들을 무작정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핏케언 섬은 해도(Chart)에 아직 안 나타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나머지 반란자 색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1791년 8월 30일 아침, 암초가 많기로 유명한 호주 북동부의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서 암초에 난파되고 만다. 여기서 31명의 승조원과 4명의 죄수가 익사하고, 89명의 승조원과 10명의 죄수는 살아남는다. 이들은 4대의 구명 보트에 나눠타고 2년 전에 블라이 함장이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항해했던 길을 그대로 재연(...)하여 쿠팡에 도착하게 된다.
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쿠팡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를, 희망봉부터 영국까지는 군함 HMS 고르곤(Gorgon) 함을 타고 귀향했다.
최종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10명의 죄수는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4명은 무죄, 6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교수형을 당한건 3명 뿐이었다. 사관후보생 피터 헤이우드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유력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좋은 변호사를 사고 빽을 썼다. 재판부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고 판도라 함이 도착했을때 즉시 투항했기 때문에 이런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국왕 조지3세에게 사면을 건의했다. 그는 결국 사면 받고 정규 장교로 임관까지 했으며, 몇 십년 후에 제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언론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이 많았다. 갑판부사관 제임스 모리슨도 정상이 참작되어 사면 받았다. 수병 윌리엄 머스퍼랫도 결국 방면되었다. 1792년 10월 28일,돈 없고 빽 없어사형 판결을 받은 수병 3명(버킷, 엘리슨, 밀워드)이 군함 HMS 브룬스위크(Brunswick) 함의 돛대에 매달려 교수형 당했다. 낙원에서의 삶이 결국 2년도 못 간 것이었다.

핏케언 제도에 정착한 자들은 여자들과 오손도손 잘 사나 싶었지만 애초에 성비가 안 맞아서 여자 쟁탈전이 일어났고(...),그러게 원주민 남자는 왜 데려가 백인들이 같이 간 원주민 남성들을 노예로 부려먹었기 때문에 몇 년후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인 끝에 성인 남자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1808년 미국 포경선 토파즈 호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성인남자 1명(존 아담스)에 여자 8명, 어린이 19명만 있었다. 이 소식은 1810년, 영국에 전해졌는데 이때는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정신 없던 시기여서 군함을 보내 잡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1814년에 영국 군함 두 척이 다시 핏케언에 상륙,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렸는데 해군성은 반란자들이 존 아담스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으므로 그냥 놔두기로 하고 아담스는 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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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핏케언 섬을 방문한 영국 해군 함정에서 촬영된 핏케언 섬 정착자들의 후손들. 이 때 섬의 인구는 약 150여명으로 추정된다.27명으로 시작하여 100년만에 5배로

이후 이 반란이 누구의 책임인가가 여러 번 회자되었는데 재판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블라이 함장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받았고 태평양에 한 번 더 갔다와서 기어이 빵나무를 카리브해 제도에 운반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시의 공적으로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에까지 오르지만 또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 사임한다.

2.2 원인

당시 민간 선박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1회성 계약직이었고 군함도 대동소이하였다. 오히려 군함에 타게 되는 수병들이 더 막장인 때가 잦았다. 전투 중 죽을 것을 두려워해 기피했기 때문이다. 만취해 곯아떨어진 사람을 태워놓고 깨기 전에 출항한다든지 밤거리에서 두들겨 팬 다음 억지로 끌고가 태우는 방법이 꽤나 일반이었다. 물론 다른 배가 다 출항해 버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는 때도 있었다. 조선만 수병을 기피했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관심하는 사람들은 해양학회지나 관련 논문을 찾아보자. 간단히 언급하면, 상선에 탔던 사람이 항해를 끝내고 나면 해적선에 타고 그 다음엔 해군함에 탔다가 다음엔 상선에 타는 식이었다.후...훌륭한 돌려막기다 심지어 해군이 상선이나 사략 해적의 선원을 납치하려다가 역공받고 털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선원은 항로를 보고 항해계약을 할지 안 할지 결정했다. 당시 배의 성능이 성능인지라 선원으로서 어느 정도 생활하다보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만 다니게 되기 때문에 어느 항로로 갈지만 알면 난도가 예상된다. 그런데도 이런 사태(대부분의 선원이 초행)가 일어난 이유는 앞의 주에서 언급했던 승선 절차 때문이었다. 정식 절차는 해변에서 계약자와 구직자가 출항 날짜와 항해 기간, 항로와 항해 목적, 임금이 명시된 계약서에 사인한 뒤 승선하는 것이었다. 계약 내용상의 항해 기간을 벗어나거나 명기된 것 이외의 목적으로 항해하거나 항로를 벗어날 경우 계약을 파기하고 중간에 내리거나 이럴 경우의 추가 임금까지 계약서에 명기하기도 했으나 선원 대부분이 문맹이고 어떻게든 배에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온 뒤에 작성하(게끔 강요하)거나 그것조차 없이 구두로 계약(사실상 통보)을 끝내기도 했다. 게다가 초기에는 계약서 그딴 것은 없었다. 더 심하면 아예 외국 선적의 상선이나 사략선을 붙잡은 뒤 선원들을 강제로 자신들의 선박에 태우기까지 했다. 한 예로 영국 해군은 독립한 미국 국적의 상선 선원들을 이런 식으로 납치해 수병으로 부려서 미영전쟁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가 되기까지 했다.

영국 해군의 선상 반란에는 의외로 유구한 역사가 있다. 스핏헤드, 노어 군항에서 수병에서 장교들까지 가담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처우가 개선되기도 했다. 스핏헤드의 봉기는 주로 요구 조건이 처우 개선(봉급 인상, 식단 개선 등)이라 결국 협상이 타결되고 주모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거기다 봉기기간 중에도 자체적으로 규율을 지키고 장교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만약 프랑스 함대가 나타나면 즉각 봉기를 철회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반면 노어의 봉기는 의회 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당시는 프랑스 혁명 기간이었다.) 등을 주장하다가 스핏헤드의 봉기 결과(처우 개선)에 어느 정도 만족한 수병들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봉기 지도부는 항구 봉쇄를 시도하다 호응하는 함정들이 없자 프랑스로 도주까지 시도했다가 결국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20세기에도 인버고든 항에서 수병들이 봉급 삭감을 반대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과도한 전비 부담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행정부가 봉급을 삭감하면서 일어난 일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의 파업이란 게 우리네 상식으로는 불가해하겠지만 반란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바운티 호의 사건은 반란이 맞지만 스핏헤드, 노어, 인버고든 등의 사례는 반란이 아닌 파업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봉급 문제로 자기가 맡은 일을 안 하는 것이니... 다만 노어의 사례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정치에 관련된 요구를 내민 데다가 나중엔 적국으로의 도주까지 시도했기에 단순 가담자들은 처벌하지 않아도 주도한 자들은 모두 사형이나 유형(오스트레일리아 유배행) 등의 엄벌을 받았다. 이외에 프리깃함 HMS 허마이어니의 반란도 있는데 이것은 함장이 워낙 수병들을 잔혹하게 다뤄 결국 수병들이 함장과 일부 장교들을 살해하고 남은 장교들은 보트에 태워 버린 후 외국으로 도주한 사례로 영국 해군은 몇 년간 이들을 추적해 수십 명을 체포해 사형시키거나 유형을 보냈다.

3 영화화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제 7회
(1935년)
제 8회
(1936년)
제 9회
(1937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바운티호의 반란위대한 지그펠트

창작물의 경우, 제작될 때마다 반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함장의 폭정 때문인지, 수병들의 잘못인지에 대해 해석이 종종 뒤바뀐다.

가장 유명하고 고전으로 남은 작품은 1930년대 나온 버전으로서 함장 (찰스 로턴)의 사이코스러운 연기와 표정이 당대의 유행으로 남은 작품, 단 이 작품에서는 함장은 비록 잘못이 있지만 반란은 더 안 좋다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구성된다. 사실 이 버전의 주인공이 된 모델은 반란에 가담했다가 기소된 후 무혐의로 나온 군의관이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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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런 브랜도가 출연한 1962년에 제작된 버전[10]에 나오는 함장 (트레버 하워드)은 그야말로 사이코 그 자체(...). 반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수병들을 몰아세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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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제작된 영화에선 함장은 함장 나름대로 잘못이 있고, 선원들도 선원 나름대로 잘못이 있지만 결국 양쪽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고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으로 다뤄진다.

1984년 버전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앤서니 홉킨스, 멜 깁슨[12], 리엄 니슨, 로런스 올리비에, 대니얼 데이루이스, 버나드 힐[13] 등이 출연했다. 영어 위키백과. KBS에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심슨 가족》의 시즌 17 에피소드 18의 이야기 중 하나는 바운티 호의 반란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다.

4 반란자의 후손들

현재 핏케언 제도에는 이들의 후손이 대대로 살고있다. 영화를 통해 유명해져 외부의 동경을 한껏 받고있지만 섬사람들은 작은 사회 특유의 기질로 외부사람들의 상륙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허락도 잘 하지 않았다. 섬의 소박한 생활을 방해받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외부인의 상륙을 막은 결정적 원인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시도였음이 결국 밝혀졌다. 한편 섬의 인구증가 문제가 대두되자 상당수가 1856년에 노퍽 섬(Norfolk Island)으로 이주하여 바운티 호의 반란자들의 후손은 지금은 노퍽 섬에 더 많은 수가 살고 있다. 영문위키백과 참조

  1. 후술되어 있지만 일부의 반란자들이 무인도였던 핏케언 제도에 들어가서 영국 해군의 추적을 피하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2. 키우기 쉽고 탄수화물이 많으며 맛도 그럭저럭이었기 때문에 카리브 해 제도에서 재배하여 흑인 노예들에게 먹이려던 계획이었다.
  3. 당시 영국 해군의 위관급 장교는 "Lieutenant"라는 계급 단 하나뿐이었고, 함내에서 임관 일자가 빠른 순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식이었다. 보통 최선임 위관급 장교인 1st Lieutenant가 부장에 가까운 직책이었는데, 당시 바운티 호에는 정규 장교가 블라이 외엔 크리스천 하나뿐이었으므로 그가 자연스레 부장이 되었다.
  4. 빵나무가 익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5. 그 동안에 여러 사람이 아사했으며 식료품을 구하러 상륙했던 토푸아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아 보급관 피터 링크레터 준위가 사망했다.
  6. 하지만 일부가 발각되지 않았기에 이 반란 이야기가 유명한 것이다.
  7. 핏케언 섬은 1767년 영국 군함 HMS Swallow 함의 15세의 사관후보생 Robert Pitcairn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8. 어차피 핏케언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필요도 없고, 만약 나중에 근처를 지나가는 배가 무인도 바로 앞에 둥둥 떠있는 바운티 호를 본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9. 핏케언에 정착한 자들은 백인 남자 9명, 원주민 남자 6명, 원주민 여자 11명, 여자 아이 1명으로 총 27명이었다.
  10. 감독이 중간에 두 번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선임된 루이스 마일스톤도 짤렸다. 그래서 그 부분을 연출한 사람은 다름아닌 브랜도...
  11. 실제로도 항해술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고루한 원리원칙주의자였던 듯. 총독일 때도 본국의 훈령(주 거래를 제한하라는 명령)을 그대로 강행하다 반란을 촉발하게 된다.
  12. 도서전설에 따르면 실제 반란 주모자가 남긴 손자국 크기가 깁슨과 비슷하다고 한다.
  13.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의 왕 세오덴 역, 타이타닉에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역을 맡은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