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外奎章閣

28122950_zz7.gif
최근에 복원된 외규장각의 전경.
b03.jpg
정확히는 중간의 외규장각 영역만 복원되었다. 본래 외규장각은 강화부 행궁, 장녕전과 함께 있었다.

image.jpg
강화행궁이 건재하던 시절의 복원도. 중앙의 3칸짜리 건물이 외규장각이다.

1 개요

규장각의 분관쯤 되는 곳. 원래는 강화도에 있었다. 당시의 상식으로 보면 강화도는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우선적으로 대피할 정도로 안전한 후방으로 여겨지는 곳이었으므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를 강화도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19세기 들어 서양의 전함이 한반도 연안 각지를 제 집 드나들듯 돌아다니더니 병인양요프랑스 해군이 쳐들어 왔을때 약탈당해 건물은 불타고 안에 있던 책들을 빼앗겼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 이후 이 책들은 프랑스에서 계속 보관해왔었는데...

2 박병선 박사의 발견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가면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1967년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가 되어 의궤를 찾아나섰다. 그러다 1972년 발견한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이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다니는데, 프랑스인 동료로부터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에 한자로 된 책을 무더기로 있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1] 297권을 비롯한 관련 도서들을 발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분상용" 의궤 밖에 없어 "어람용" 의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몰랐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약탈행위를 까발린 박병선 박사가 눈엣가시였고 그녀를 권고사직시켰다. 프랑스 국적이었던 그녀는 프랑스인들로부터 "반역자", "한국의 스파이"라는 멸시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인 자격으로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매일 같이 출석하며 외규장각을 연구하여 "조선조의 의궤"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받는데 가장 앞장서게 된다.

3 도서 환수 문제

TGV 구입의 반대급부로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협상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1993년부터 20년 가까이 사실인 것처럼 세간을 떠돌고 있는데, 애초에 이 이야기는 1993년 미테랑-김영삼 정상회담 이후, 수십 개의 회담의제들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두 가지를 당시 국내언론들이 제멋대로 마치 양국간에 거래가 이루어진 양 지어낸 허구이다.

프랑스로서는 정신이 나가지 않은 한 문화재 반환과 열차 판매를 연동시켜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백 번 양보해서 프랑스가 그 둘을 교환 관계로 묶었다 하더라도, 그런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한국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당시 한국 대통령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로 유명한 김영삼, 듣자마자 걷어찰지언정 저런 조건에 OK할 양반은 절대 아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둘 사이에는 어떤 거래관계도 없었다'이며, 이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 입장과도 다르지 않다. 외규장각 스캔들에 있어서 확실한 공식정보를 원한다면, 외교통상부에 문의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으니 인터넷상에 떠도는 소문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최초 1권의 반환도 '버티다가 마지못해 내준 것'이 아닌, 미테랑이 한국에 도착해 바로 돌려준 것이며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의 반발이 있었다. 물론 미테랑은 반발을 씹어버리고 1권을 김영삼에게 전달한다,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반환협상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므로 한국 정부가 프랑스측에 항의했다는 것 역시 사실무근이다.

한국 시민단체가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소문 자체는 사실이다. 다만 이는 현재 한국으로부터 문화재를 약탈해 간 모든 국가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지라,[2]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된 병인양요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신미양요 때 미군이 약탈해 간 어재연 장군기는 겨우 '10년 대여' 조건으로 2007년에야 돌아왔다. 그나마도 오랜 반환요청과 설득작업 끝에야 따낸 조건이 그것이다. 실제로 어재연 장군기 반환요청은 현 관리주체인 미해군사관학교박물관(미 연방정부가 아닌)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절당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한국 정부의 공식 반환요청이 있자, 처음부터 '영구대여'[3]를 한국 측에 먼저 제시해 왔는데, 1990년대 초반인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에게 약탈국 정부가 영구대여 혹은 그 이상가는 조건을 제시했던 사례 자체가 없었다.[4]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이 조건을 수락했으며, 따라서 '본디 반환이었는데 프랑스가 영구대여로 말을 바꿨다'는 소리는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는 약탈문화재 반환에 있어서 타 약탈국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한국에 우호적으로 나오고 있는 국가임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옳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실제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할 것임을 최초로 선언한 故 미테랑 대통령 이래 지금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해온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반환협상과정에 문제가 발생했을 시에는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4 역대 프랑스 정부의 움직임

4.1 미테랑 정부

재임기간 1981~1995

1993년에 최초로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천명한 장본인이다. 반환 계획이 미리 알려질 경우 국립도서관 사서들을 비롯한 반대파가 격하게 반발할 것을 우려한 미테랑은 한국에서 단기간만 전시할 것이라면서 우선 2권 정도만 준비할 것을 요구했고, 사서들은 별다른 생각없이 이에 응했다. 하지만 9월 14일 방한 당일 김영삼 대통령과 첫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당장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해버렸으며 다음날 저녁 청와대에 가서 전격적으로 한 권을 반환한다. 반대파가 결집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반환을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

당시의 상황은 한국측에서도 당황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었다. 애초에 미테랑의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데다 실제로 한국에 도착한 직후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의 피곤한 모습을 보여서 청와대측에서는 일단 첫 날은 만찬 일정만 진행한 뒤 다음날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미테랑 본인이 괜찮다면서 바로 저녁에 정상회담부터 하자고 제의하여 김영삼을 만나 외규장각 반환을 약속한 것. 이 때까지만 해도 한국측에서는 나중에 미테랑이 돌아가고 나서 천천히 진행할거라고 짐작했지만 바로 다음날인 9월 15일 오후에 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미테랑이 또 청와대를 찾아가 김영삼에게 기어이 전달한 것.[5]

미테랑이 독단적으로 도서 2권을 김영삼에게 전달하자 미테랑을 수행하여 한국에 왔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2명은 사표를 내는 등의 반발이 거셌는데[6], 이들은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숙소인 롯데호텔 객실에 들어가서 농성했으며 프랑스 문화부 장관인 자크 투봉에게 전화해 지원을 호소하는 등 책을 껴안고 울며 항의했다. 응? 프랑스 정부 측은 주한 프랑스 대사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설득하였고 이들은 눈물 범벅이 되어 전달식을 고작 몇분 남기고 책을 내놓았다. 이게 와전되어 프랑스가 사서들의 반대를 핑계삼아 약속을 깼다는 헛소문이 현재까지도 떠돌고 있다. (...) 의외로 한국 언론에선 이 사서들을 책을 사랑한 여인들 정도로만 보도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반환 비판 여론은 침략자들의 천박한 역사 의식이라고 맹비난했다. 당시 미테랑의 건강이 심히 안 좋은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7] 이런 식의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런 낭설은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태도와 방침과는 별개로 한국에서는 이 때 반대한 사서들에 대한 비난하는 목소리가 당연히 있는데 반대로 오히려 이 일로 프랑스를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다. 프랑스는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라다 또는 사서가 대통령에게도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식의 주장. 일단 약탈된 문화재를 둘러싼 문제인데 이런 목소리가 과연 옳은 시각일지 그른 시각일지는 각자 판단하자.

4.2 시라크 정부

재임기간 1995~2007

전임 미테랑이 좌파의 대부였던데 반해 시라크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우파였지만[8] 정작 외규장각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미테랑과 똑같은 행보를 보였다. 국립도서관 사서들이 '등가교환' 논리를 내세우며 반환저지를 시도하자 그걸 힘으로 제압하고 한국 측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한국 협상대표단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NO'로 일관하던 사서들은 시라크에게 단번에 함락당했으며, 단장인 자크 살루아는 한국 측 협상단장이었던 한상진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야만 했다.

다만 다른 문화재를 내놓으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 이에 한국은 대신 프랑스에 대여해 줄 문화재 목록을 작성해 프랑스에 보냈으나 프랑스 측에선 문화재의 가치의 격이 맞지 않다고 거부하고 분상용 의궤를 요구했는데. 이에 한국 내부에선 인질이 된 장남을 찾아오기 위해 차남을 인질로 보내는 격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2000년 협상 때는 프랑스 감사원 대표인 자크 살루아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고 협상장을 나가버리는 글러먹은 태도까지 보였다. 깡패세요? 반환 협상이 난황을 겪자 TGV 음모론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4.3 사르코지 정부

재임기간 2007~2012

"한국의 정체성에 속하며 보편적 세계 문화재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직접 내세워가며[9] 한국으로의 외규장각 반환에 전례 없는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덕분에 반환 절차는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다.

2011년 2월 7일, 박흥신 주프랑스 한국 대사와 폴 장-오르티즈 프랑스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소장 중인 외규장각 도서 297권의 한국 반환을 위한 정부 간 합의문에 서명했으며, 이 합의문에는 5월 31일 이전에 297권의 도서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사서들은 반환에 반대하며 2010년 11월 18일, 도서 반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서명 운동도 벌였으나, 서명한 인원은 동년 11월 24일 기준으로 284명. 망했어요. 반면 반환 찬성파에는 전현직 대통령을 필두로 전직 장관,[10] 국회의원, 대학 총장들이 즐비하다.

2011년 4월 14일에는 1차분이 한국에 도착하였고, 5월 27일 4회에 걸쳐 전권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사르코지-이명박 합의가 있은지 불과 5개월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결론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세간의 상식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굴욕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수단방법 안 가리고 한국에 반환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하는 가운데 오히려 프랑스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자국 도서관 사서들 때문에 일이 늦어진 것이다.

5 대여 갱신 떡밥

국내 일부에서 외규장각 도서는 5년마다 대여를 갱신하는 시스템이므로, 2015년 프랑스 전시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문화재 관련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5년마다 갱신' 이라는 말만 들으면 마치 언제라도 대여 갱신이 중단되고 다시 프랑스로 반납해야 할 것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이것은 약탈 문화재 환수 협상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약탈 문화재 환수라는 결과물은, 이상과 현실의 끝없는 충돌 끝에 맺어진 적당한 타협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약탈국민 누구나 침략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영구적인 반환을 원한다. 그러나, 약탈국의 현행 법률을 무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국내의 반대파와 피약탈국의 요구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감수해야 하는 약탈국 정부의 사정, 약탈국의 국민이지만 약탈된 문화재가 한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추진중인 지한파 인사들의 정치적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뉴스

한국이 강경한 자세로 나서면 프랑스는 바로 굴복할 것이고 우리 뜻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은, 외교라는 냉혹한 세계에서는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한국으로부터는 조건이 부족하다고 욕먹고, 프랑스 국내 반대파로부터도 뭐하는 짓이냐고 양쪽에서 공격받는 것을 감수해가면서 협상에 나섰는데 한국이 '침략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영구적인 반환' 을 요구하며 초강경으로 돌아선다면?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는 '어머 뜨거라' 하며 이 뜨거운 감자에 관심을 끊어버릴 가능성이 높고, 욕먹어가며 문화재의 한국행을 위해 뛰던 지한파들의 입지는 강경파에 밀려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손해보는 것이 어느 쪽인지는 자명하다.

실제로 외규장각 도서의 한국행을 위해 힘써 온 자크 랑 의원은 르 몽드 기자로부터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을 떠맡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기자가 랑 의원을 비꼰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어렵고 욕만 먹는 고난의 길을 어쩌다가 자처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

지미 카터 前미국 대통령 역시 헝가리에 약탈 유물을 돌려주는 결단을 내리고 성사시켰지만, 미국 내에서도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고[11] 지지층들까지 이탈하는 결과를 감수해야만 했다.[12]

결론적으로 말해 영구 반환은 어렵다. 이것이 현실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거니와 강대국들은 하나같이 법률로 문화재의 국외 증여 및 영구 대여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사키 바트만의 박제된 시신과 표본이 프랑스에 있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는 그녀의 시신을 인권을 가진 한 여성의 신체로 대하지 않고 프랑스의 적법한 소유물 개념으로 봐서 20세기가 끝나도록 반환을 거부했다가 인권단체와 국제 사회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2002년에서야 그녀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따라서 5년이라는 '한시적 대여'의 모양을 빌리되, 여기에 '자동 갱신, 갱신 횟수 무제한'이라는 옵션을 붙여서 법률적으로는 한시적 대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구 대여인 결과물을 사르코지는[13] 만들어 준 것이며, 이는 세계적 기준으로 보아도 호의적인 조건이다. 이것을 가지고 '언제라도 다시 빼갈 속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프랑스 측에서 대놓고 "대여는 포장일 뿐이고 사실상 반환이라는 점을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 때 분명히 이야기 하겠다는 데도 믿지 못한다는 거냐"고 말했다. #

중간에 다시 가져갈 생각이라면 애초에 '영구 대여'는 고사하고 '대여' 자체를 해 주지 않는다. 약탈 문화재 환수라는 개념 자체가 양국 간 장기간에 걸친 대화와 깊은 신뢰가 구축되지 않고서는 성사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제발 3개월만 빌려달라'는 이집트 측의 요청을 간단히 거절한 유럽이랑 유대인한테는 사죄 잘 하지만 아프리카에는 사죄를 안 하는 독일의 사례만 봐도 그렇고, 어재연 장군기는 2년씩 연장하는 시스템으로 한국에 돌아와 있지만 누구도 이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불까들의 악질적인 왜곡된 소문을 배제하더라도 등가교환을 요구해왔던 프랑스 정부나 사서 자클린 상송의 태도, 사르코지의 발언, 운송비를 한국이 전액 부담한 것[14]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측의 태도도 상대적으로 낫다는 수준이지 반드시 호의적으로 보고 칭찬만 할 것은 아님을 생각할 수 있다.

명심하자. 칼자루를 쥔 쪽은 어느 쪽일까?

5.1 유사 사례들

대한민국 → 러시아
인천시가 소유했던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 때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그의 군기를 4년간 대여(2년 기본 + 2년 연장)했다가 2014년 11월에 반환받은 바 있다.

미국 → 대한민국
어재연 장군기는 '사실상 10년 대여' 상태이다.

미국 법률상 문화재는 외국에 2년을 초과해 대여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대여기간 연장도 10년을 초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에 기본적으로 '2년 대여'를 하되 2년씩 총 4번의 추가연장이 가능하도록 하여 2+2+2+2+2=10년 대여가 된 것이다. 2007년에 대여하였으니 2017년에는 미국으로 반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1.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과 신하들이보는 "분상용"으로 나뉘어 제작하고 보관했다. 당연히 "어람용"이 표지도 더 화려하고 장정도 잘 되어 있었으며, 그림도 더 세밀하고 정성들여 그려 훨씬 가치가 높다.
  2. 미/영/프/독 등의 서구열강들은 하나같이 제국주의 시절 약탈해 반입한 문화재의 반출을 막기 위해 반출금지법을 제정해 두고 있기에, 이 법이 폐기되거나 또는 특례로 예외를 적용받지 않는 한 소송에서 이길 도리가 없다. 가끔 반환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이는 반환하지 않을 경우 향후 해당 국가의 고고학 문화재 연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협박 정도. 이집트가 이런 요구로 프랑스에게 여러번 반환받았고 터키독일에게 반환받은 적이 있다. 다만 이런 경우는 그 나라 문화재 관련 연구에 약탈국 측이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양국 정치권 간에도 물밑합의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다.
  3. 통칭 영구대여. 법적으로는 5년 만기+자동갱신+갱신횟수 무제한이란 한시적 대여이다. 실질적으로는 영구대여라 할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좋은 조건.
  4. 한국정부 對 약탈국 개인 or 한국정부 對 약탈국 민간단체 케이스로는 반환이나 기증 사례도 있지만, 정부 대 정부로는 프랑스 수준을 따라오는 국가가 없었다.
  5. 애초에 없던 스케쥴이라서 김영삼이 당일 오후에야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준비했을 정도였다.
  6. 이 때 미테랑과 같이 내한했다가 반환에 결사반대한 사서 중 하나가 자클린 상송인데 2009년 당시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이 그녀를 만난 내용에 따르면 국립도서관 사서부문 총국장으로 승진한 듯. 프랑스 국익과 보유 문화재를 관리하고 대변하는 공적인 자리의 입장에서인지 개인적인 신념과 입장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글에 따르면 한국에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7. 실제로 미테랑은 이미 이 시기 전립선암을 앓고 있었고 1995년 5월 퇴임한 뒤 불과 8개월만에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반환 모습 때도 표정이 다소 쇠약하며 고서 한 권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보인다.
  8.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상징중 하나인 영국의 마거릿 대처조차 안했던 공영방송 민영화까지 밀어붙일 정도였다. 참고로 이는 미테랑 정권하에서 시라크의 우파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해 시라크가 총리로 취임해서 가능했던 것. 일명 좌우 동거정부.
  9. 피약탈국으로의 문화재 반환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제일 자주 써먹는 논리가 '이것은 세계인의 유산이지, 특정 국가에 귀속된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으며, 굳이 피약탈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인데, 사르코지의 '한국의 정체성에 속한다'는 발언은 이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논리이다. 그런데 외교적인 발언인데도 문화재 가치를 낮게 보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10. 자크 랑 前 문화부 장관. 오늘의 외규장각도서 반환을 성사되게끔 만든 산파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3년의 미테랑-김영삼 정상회담에서 반환이 천명된 이후 20여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외규장각도서의 한국행을 위해 노력했다.
  11. 한창 냉전 시기였기 때문
  12. 실제로 이 사건은 카터의 재선 실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13. 미테랑 행정부의 최초 조건은 2년 대여+자동 갱신이었다. 사르코지는 조건을 크게 연장시켰다.
  14. 일본에게서 일제강점기 시절 약탈당했던 조선왕실의궤를 외규장각 도서 귀환과 같은 해인 2011년 하반기에 환수해온 사례와 비교하면 그보다도 못한 조건이다. [기고조선왕실의궤의 초라한 귀국] 이건 외규장각 도서와 달리 임대도 아니고 아예 소유권이 한국에 있다. 물론 이 때 일본의 문화재 반환은 우익 자민당 정권이 아닌 상대적으로 온건한 민주당 정권이었으니깐 가능했지만. 일본을 칭찬하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위안부 문제 등 다른 문제에 대한 태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