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역사

용인시 행정구역 변천사
처인현
(處仁縣, 1397)
용인현
(龍仁縣, 1414)
충주부 용인군
(忠州府 龍仁郡, 1895)
경기도 용인군
(京畿道 龍仁郡, 1914)
용인시
(龍仁市, 1996)
용구현
(龍駒縣, 944)
양지현
(陽智縣, 1399)
양지현충주부 양지군
(忠州府 陽智郡, 1895)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백제 건국 후 백제의 땅으로서 멸오현(滅烏縣)이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고구려 땅이 되면서 구성현(駒城縣)이 되었다. 551년 백제가 구성현을 수복하였으나 553년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삼국통일전쟁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거서현(巨黍縣)으로 개칭되었다.

2 고려

944년 거서현이 다시 용구현으로 개칭되었다.

구 양지군 지역은 수주(水州)에 속한 양랑촌부곡(陽良村部曲)이었다. 그러다가 1362년(공민왕 11) 에는 안성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3 조선

태조 때였던 1397년 수주 처인부곡이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정종 때였던 1399년에는 양량촌부곡이 안성에서 독립하여 양지현으로 승격되었다.

태종 때였던 1414년에 구현(駒縣, 現 구성[1] 일대)'과 처현(處縣, 現 남사면 일대)'을 용인현으로 통합하였다.[2]

용인은 역사적으로도 교통의 요지였는데 구한말 때까지 존재했던 영남대로[3]가 거쳐가는 곳이었던데다 인천-수원에서 영동지방으로 가는 중간지점이기도 했다. 과거 영남대로가 지나갔던 때는 현재의 구성 지역(용인군)과 양지면(양지군)이 중심지였다[4].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자 용인현, 양지현이 용인군, 양지군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충주부 관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경기도 용인,양지군이 되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부군면 통폐합 이전까지 '용인군'[5] '양지군'[6]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양지를 용인에 병합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 그 해에 읍삼면 구성리(현 기흥구 구성동)에 있던 용인군청이 수여면(후에 용인읍으로 승격) 김량장리로 이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양곡수탈을 위해 건설됐던 수려선이 현재의 기흥구 신갈동, 어정, 동백지구, 舊 용인읍내 일대를 지나가 용인의 중심이 신갈과 김량장으로 옮겨지게 됐다.

5 대한민국

1971년에 영동고속도로가 수려선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개통이 되면서[7] 기흥면 신갈리와 용인면이 지역 중심지로서 강화됐다.

1979년에는 용인면이 용인읍으로, 1985년에는 기흥면이 기흥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수지면 이의리, 하리(현재의 광교신도시 일대)가 1995년에는 기흥읍 영덕리의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용인시는 근 20년 가까이 가장 많은 인구가 유입된 도시이다. 1995년 당시 약 24만명 인구의 전형적인 수도권 도농복합시였던 곳이 1996년 군에서 시로 승격되고 난개발 때문에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개발이 되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다음 표를 참고하자.

2001년455,118명
2002년529,300명+74,182명 (16.3%↑)
2003년583,516명+54,216명 (10.2%↑)
2004년649,577명+66,061명 (11.3%↑)
2005년702,007명+52,430명 ( 8.7%↑)
2006년777,849명+75,842명 (10.8%↑)
2007년813,653명+35,804명 ( 4.60%↑)
2008년831,305명+17,652명 ( 2.17%↑)
2009년854,054명+22,749명 ( 2.74%↑)
2010년891,708명+37,654명 ( 4.41%↑)
2011년911,494명+19,786명 ( 2.22%↑)
2012년930,058명+18,564명 ( 2.04%↑)
2013년955,907명+25,849명 ( 2.78%↑)

시 승격 이전 24만명에서 2014년 5월 현재 96.5만명으로 거의 4배 가까이 상승되는,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높은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각주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경기도에서 시 승격 짬밥도 있고 인구도 많았던 도시들인 안양시(1973년 승격, 59만 명), 안산시(1986년 승격, 70만 명), 부천시(1973년 승격, 85만 명) 등을 전부 추월하고 먼저 90만 명을 달성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이제 광역시급 한국 10대 도시가 되는 건 시간문제. 그리고 역북지구 개발이 완료되면 100만은 그냥 찍게 된다. ㅎㄷㄷ
2016년 8월 1일 기준으로 드디어 인구수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8]. 기초자치단체로서는 수원, 창원, 고양 다음으로 4번째이다.

용인시 : ㅋㅋㅋ 우리시 인구 100만 넘겼다. 어때? 부럽지?
부천시 : 아니 이 면적만 쓸데없이 넓은 풋내기가 나의 인구력을 뛰어넘어?
시흥시 : 아나 ㅅㅂ 우린 시대 잘못 만나서 남은 건 자투리밖에 없으니...
안산시 : 시흥시 너, 걍 우리한테 와라.
광명시 : 나는 서울 편입이나 해야겠다.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 안 되겠어. 우리 합체하자! 과천시, 너도 올래?
과천시 : 나는 안양 편입이 싫어요!
수원시 : 이참에 난 내 오랜 숙원을 이뤄야지. 화성, 오산 우리도 함께하자!
화성시 : 뭐래 ㅗ

다만 이건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도농복합시 개념 도입 이전 여러 자치단체로 쪼개지고 해체된 시흥군과는 달리[9] 1995년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되고 난 직후에 시로 승격한 덕분에 예전의 시흥군처럼 여러 지차체로 분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행정구역 분리를 거치지 않고 인구 90만 명 돌파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행정구역이 갈라지지 않고 통째로 시로 승격하여 1기 신도시 버프를 받은 고양시의 인구 증가 수준이 비견될만하다. 근데 행정구역 면적은 용인시가 2배 더 넓다.

이런 높은 인구 증가로 인해 2004년 특정시로 승격되었다. 또 기초단위 승격도 빈번했는데 1996년 수지면이 수지읍으로 승격되었고, 2000년에는 구성면이 구성읍으로, 2001년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2005년에는 수지구(수지출장소), 기흥구(구 기흥읍+구성읍)[10], 처인구(나머지 지역)의 일반구가 설치되었고, 포곡면이 포곡읍으로 승격되었다.

  1. 수지구 죽전동과 기흥구를 관통하는 도로인 용구대로는 바로 이 이름을 딴 것이며, 구성(駒城)이란 지명 역시 용구의 '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2. 참고로 용인시 자체적으로 2014년에 '용인' 지명 600주년을 기념하였다.
  3. '동래로'라고도 불렸으며, 동래(부산광역시)-밀양-대구-상주-문경-새재(조령)-충주-죽산-양지-용인-한양 구간에 해당된다.
  4. 용인향교는 옛 용인시청이 있던 김량장이 아닌 기흥구 언남동에 있다. 양지면에는 양지향교가 있다. 향교가 위치한 곳은 구한말까지 각 고을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5.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수지구 전체, 기흥구 전체, 처인구 옛 용인읍(수여면) 지역·포곡읍·모현면·이동면·남사면 일대.
  6.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처인구 양지면·백암면·원삼면, 안성시 고삼면 일대.
  7. 그리고 수려선은 이듬해인 1972년에 폐선된다.
  8. 8월 1일 오후 4시45분 기준 내국인 98만3794명, 외국인 1만6206명
  9. 공교롭게도 위에서 설명한 시 승격 짬밥이 좀 되는 도시들인 안양시, 안산시는 시흥군에서 갈라져 나온 도시들이다. 수원시는 수원군 안에 있던 수원읍이 시로 승격된 도시다. (화성과 오산은 그 나머지 자투리 군 지역이였던 도시다.
  10. 용인시 3개 행정구로 개편되기 전 이 지역의 명칭을 관계자들은 옛 이름인 '용구' 혹은 '구흥(구성+기흥)'으로 하자고 건의했지만 어느 반도체공장에서 '기흥'으로 하자고 우기는 바람에 기흥구로 굳혀졌다는 말도 있는데,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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