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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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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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노재봉23대 정원식24대 현승종


鄭元植
1928년 8월 5일 ~

대한민국의 교육자, 관료, 정치인이다. 호는 서호(西湖)이다.

1928년 황해도(현 북한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1946년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로 진학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재학 중이던 1951년부터 5년 동안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군 복무 중인 195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1955년 육군대위로 예편한 후, 1956년 공무원에 임용되어 중앙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발령받았다.

1957년 미국으로 유학, 조지 피바디 대학교 교육대학원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1958년 미국 조지 피바디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단 1년만에 심리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1960년 8월 문교부 장관 오천석의 비서관, 문교부 장학관을 거쳐,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의 조교수와 부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196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 피바디 대학교 교육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1966년 조지 피바디 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0년 한국교육학회 교육심리연구회 회장, 1972년 카운슬러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74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197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이 되었다.

1979년부터 조선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였고, 그 해 조선일보에 '머리를 써서 살아라' 는 제목으로 유태인의 가정교육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칼럼을 단행본 '인간과 교육'으로 만들어 출판했는데, 총 100만 권이 넘게 팔려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79년 월간 샘터에서 발행하는 유아잡지 「엄마랑 아기랑」에 '정박사와 의논하세요' 라는 컬럼을 맡아 1994년까지 15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상담, 컬럼을 기고하였다.

1985년부터 3년간 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현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뒤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노태우 정권에서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문교부 장관 재임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자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립되자, 전교조를 즉각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선진국에도 교원노조는 다 있다는 의견과 함께 전교조 해직교사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일부 보수언론에서도 전교조 가입 해직교사들에 대해 복직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전교조 교사들은 '결국 정치세력화했고 정권퇴진투쟁에 나서고 있다'며 '이미 정치세력화한 그들을 다시 교직에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991년 5월,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와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으로 인하여 노재봉 전직 총리가 사퇴하자, 그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총리 임명에 대해 야당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3당 합당 이후 여당의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기 때문에, 여유있게 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다.

교육부 장관 시절 전교조문제에 관하여 지나치게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탓에 이미 세종대, 덕성여대, 부산대 등에서 심한 조롱과 야유를 당한 상태였고, 그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기 전에 학생들이 테러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누군가에 의해 새어나가 시중에 유포되어 있었으나, 아랑곳 않고 수행원이나 가족 동반 없이 홀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강단에 섰다. 그러나 강의를 마친 후 분노한 학생들과 마주쳐야 했고, '전교조 선생님과 귀정이를 죽인 살인마', '귀정이 살려내라',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 등을 외친 외대 학생들에게 무려 20분 동안이나 계란과 페인트와 밀가루 세례를 받으며 구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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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강경대 열사의 사망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의 정권을 뒤엎을 듯한 기세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정원식 총리가 외대생들에게서 밀가루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여론이 갑자기 반전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사그러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를 가리켜 노태우 정권을 위해 '살신성인'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후 1992년 10월까지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 등 굵직한 일들을 벌였다. 그런데 워낙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아서 단체사진을 찍으면 뽀대가 완전 지대라는 말이 나돌았다. 물론 국민들에게서 그닥 존경 받는 총리는 아니었고, 그의 총리 재임기간 동안 민심의 이반은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가 중립내각을 구성할 때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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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영삼 후보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국회의원을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충격적이게도 조순, 박찬종에 밀려 3위 득표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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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자당의 정원식이 민주당의 조순에게 참패한 것을 기화로 하여 김대중이 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에게는 정원식이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였다. 2002년 12월 부산광역시 브니엘학원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1] 관선이사 체제에서 어느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던 브니엘학원 사태가 제대로 꼬이면서 고작 9개월 뒤에 낙마하였다.
  1. 이는 브니엘학원 사태로 당시 이사진에서 해임된 상태였던 브니엘학원 설립자 및 부산지역 교계의 요청으로, 브니엘학원이 학교법인 경남노회기독교교육학원의 전례 처럼 여러개의 학교법인으로 쪼개져서 비신자에게 넘어가는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은 비신자에게 넘어가는것을 막아서 설립자가 복귀하기 위하려는 초석을 마련하는것이 주 목적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