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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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1년 5월 16일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승진가도가 막힘에 불만을 품고 정군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대한민국 장교들이 비밀리에 계획한 쿠데타. 이로 인해 제2공화국이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지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장장 32년(1961~1993) 간의 군사정권이 시작되었다.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 예정이었던 육군소장 박정희[1]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2]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3]을 중심으로한 장교들이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포위하고 서울을 비롯 대구, 부산 등의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여 주한미군과 주한미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성명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을 비롯한 국민을 인질로 삼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이에따라 박정희는 이튿날 아침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반 가량 대의민주주의를 벗어난 군부 독재를 실시한다. 이 사건은 본디 군사혁명[4], 군사반란[5], 군사정변 등 다양하게 불렸으나 5.16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6월 민주항쟁이전까지는 독재정권에 의해 5.16 군사혁명으로 불렸고 민주화 후로는 5.16. 군사정변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쓰게 되었다.

2 배경

1960년 4.19 혁명 이후 외무장관이던 허정[6]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구성되었으나 10년이 넘는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의 후유증을 단시일내에 청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독재가 남긴 문제는 민주선거를 통해 1960년 8월 23일 출범한 장면내각에게 떠맡겨지게 되었다. 군대 처리 문제도 떠넘긴 숙제 중 하나였다. 독재 정부는 사령관 원용덕과 대장 김창룡을 이용해 정적을 탄압함은 물론, 군비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군 장성을 각료에 지명하는 등 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부정부패가 꽤 깊게 자리잡았고 능력보다 말 잘 듣는 사람이 승진하는 등 군 내부에 불만이 상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서 원하는, 한국전쟁 등에서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사람이었기에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었다.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 조직이 열배 이상으로 비대해짐에따라 인사적체의 결과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까지도 극심해졌다.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한 것이다.

5.16 군사정변의 명목상의 지도자는 육군참모총장인 육군중장 장도영이었으나 이는 군사정변 이후이며, 실질적이고 분명한 지도자는 제2야전군 부사령관이던 포병 출신의 육군소장 박정희였으며 병력동원 등 실무는 김종필 보병중령 등 8기생을 주축으로 한 육군 영관급 장교들이 했다. 이들은 4.19 혁명 이전부터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였는데 그렇기에,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상륙사단해병소장 김동하와 공모하여 쿠테타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물론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대신 1960년 5월 2일에 허정 과도정부를 상대로,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수뇌부 불신을 천명했다가 김종필을 포함한 다섯명이 구속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정부 수반이 된 장면총리는 한강의 기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고 그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주둔과 기계화를 전제로 국방비 비중을 40%에서 20%로 내리고자 10만명 감축을 주장한다. 물론, 군 내부의 반발이 심해 1960년 11월 군 감축은 60만명을 유지하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 과정에서 불만이 또한번 크게 표출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이 강제로 예편당하였고 결국 박정희 자신마저 1961년 5월 강제로 예편될 상황에 놓여졌다. 즉, 이러한 개인적 문제가 박정희가 반란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이미 독재 정권때부터 계획을 준비했다는 점을 보면 책임 회피일뿐이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을 정변일로 새롭게 정하였다. 4.19 혁명 1주년을 맞이하여 분명히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이고, 이러면 사회혼란을 선동으로 부추기며 명분삼아 자연스레 군이 출동하는 시나리오를 세운것이다. 그러나 선동까지도 준비하였음에도 4월 19일날 아무 일도 없었다. 대규모 시위나 혼란상황도 전혀 없고... 그냥 조용했다. 10여년 간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도 연일 끊이지 않았다. 이 때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도 나왔을 정도#...였다는데 최근엔 장면 정부가 의외로 여러 붕괴설과 위기설에도 불구하고 1961년 이후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혼란이 없음에 당황한 박정희는 정변을 연기했으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성공하기란 힘들어지는 법.

3 과정 및 주요 인물

5.16 군사정변/과정

4 결과 및 반응

5.16 군사정변/반응

5 평가

5.16 군사정변/평가

6 여담

  • 5.16 정변 당일 김도연이 거국내각을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제의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
  • 5.16 정변은 세계 역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민주 혁명 직후의 독재정권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반적인 민주혁명직후의 독재정권의 등장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 독재 정권→부패→사회 모순→민주 혁명→사회 혼란→정부의 능력 부족→국민의 실망→'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 + 정치적 무관심→새로운 독재자가 국민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정권 장악'.
  • 이러한 식인데, 5.16 정변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 '독재 정권→부패→사회 모순→민주 혁명(4.19)→사회 안정기의 시작(장면 내각)[7]→새로운 독재자가 정권 장악(5.16)'
  •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전속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한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정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정변 지휘부들은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5.16 정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빨로 귀순시켰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 두잔 한 건 몰라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8] 단순히 한두잔 정도는 아니고 술냄새가 풍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더라도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닌게 박정희는 술이 상당히 셌다. 훗날 박정희는 태국의 푸미폰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기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서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받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연설까지 마친 일화가 있다.
  •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면서도,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5.16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5.16 정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회에 아베 등 악역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정변이 구악을 척결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파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민주화 투쟁을 하신 높으신 양반들이 보시기에도 거시기 했을 듯
  • 이 사건 발생 3일 전인 1961년 5월 13일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들은 취임한지 12시간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자격이 박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엔 4번의 좌절[9] 끝에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이도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김대중이었다. 참 질긴 인연(...).
  • 51년 6개월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마 박근혜에게 516이란 숫자는 다른 숫자들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썰전에서 5.16은 쿠데타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심지어 자기 군 복무 시절에 터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군인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논문을 쓰며 군인 신분임에도 12.12는 쿠데타라고 대놓고 말했다가 치도곤을 치룰 뻔 하기도 했다고. 사실 보수인사 중에서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5.16을 쿠데타라고 비교적 쉽사리 인정하는 반면, 권위주의 보수 계열에선 쿠데타나 군사정변이란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후술된 김현웅 법무부 장관 말처럼 교과서엔 얄짤없이 군사정변이라고 기술되어있다.
  •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곽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복역 중 5.16 정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 하며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래는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끌려다니며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대학 나온 인재라고 살려준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깡패도 학벌이 좋아야 살아남는 더러운 세상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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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국의 결단이라고도 한다. 본래, 5.16을 미화하려는 측에서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링크. 과정은 쿠데타이지만, 결과를 놓고본다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게 그들의 입장. 하지만 당해 용어의 사용이 일종의 화 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확대되어 굳이 5.16이 아니더라도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치인의 결정을 구국의 결단으로 표현하는 용례가 늘어나고 있다. 링크.

7 관련 항목

  1. 종북단체인 남로당 군사책으로서 여순반란 계획에 가담했다는 전력에 이어 정군운동의 배후로 지목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예편압력을 받아왔다. 장도영이 도움을 주어 당장의 예편은 면하고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나, 1961년 1월 육본 개인보안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결국 1961년 5월 말에 강제 예편조치될 예정이었다.
  2. 2인자 김종필또한 정군운동으로 61년 2월 예편당했다.
  3. 대부분은 영관급 장교였다. 정부 수립 초기였기에 1기생은 절반가량이 입대 5년만에 별을 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4년 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조차 배출하지 못했고, 선배들이 아직 은퇴하지 않았기에 대령 승진자도 1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4. 문민정부 이전 및 보수계 세력
  5. 민주화 및 진보계 세력
  6.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남에 따라 본래는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그의 장남이던 이강석의 자결 총격에 가족과 함께 사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다음 승계순위였던 외무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이 외무장관이 허정이었다. 지금도 부총리 급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의 장관들 가운데 가장 서열 높은 사람은 외교부 장관이다.
  7.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4월 19일로 정변일로 하려 했지만, 4월 혁명 분위기는 가라앉고 안정기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시위 금지법, 반공법 등으로 그냥 찍어누른 것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8. 특히 박정희가 만취했다고 회고한 박치옥 같은 경우는 초기에 정변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반혁명 혐의로 숙청된 인물이라서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다.
  9. 3번 낙선했고, 한번은 방해공작으로 등록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