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欽陵.
중국쪽 기록에선 論欽陵(논흠릉).
(? ~ 699년)
토번의 무장이자 재상. 정식 이름은 가르 친링 첸드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대당제국을 무찌른 사나이
1 역사의 등장
아버지가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성사시킨 가르통첸(薛東贊)이다.[1] 667년에 가르통첸이 사망 이후 당과의 관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했으며, 이후에 685년 형인 가르친네(論贊悉若)가 죽자 재상의 자리까지 장악했다. 중국 기록에는 처음부터 가르친링이 재상인양 묘사되고 있지만 이건 당시 가르친링이 대외적으로 활동한게 크다. 형인 가르친네가 곧 사망했다고 하지만 티베트 기록은 그가 685년까지 생존했다고 명시한다. 667년 강주, 황중 일대를 약탈했으나 당군의 공성계에 속아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2 영토확장의 일선에 서다.
662년경부터 토번 왕조는 서역진출을 시도했고 이러한 노력은 668년 안서사진 장악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당의 서역경영을 통째로 중단시키는 거대한 사건이었고 즉각 당 조정은 대응에 나섰다. 669년, 당고종이 설인귀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아시나도진과 곽대봉을 부사령관 삼아 10만 군대로 토번을 공격하게 했는데 지휘권 다툼에 의해 혼란스러운 당군 상황을 활용해(곽대봉이 직전까지 설인귀와 동급이었는데 설인귀 명령을 받게 해서 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비천(大非川)에서 당군을 공격, '죽거나 다쳐서 거의 다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궤멸을 시킨다. 설인귀를 비롯한 당군의 주요 장수들은 모조리 생포되어서 가르친링에게 끌려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났다.
675년 찬포 망송망첸이 급사하자 정통성을 가진 장남와 군사권을 장악한 가르가문의 지지를 받는 차남이 대립해 내란 직전까지 갔으나 가르가문의 군사권을 그대로 지속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장남 치토슨을 치둑송첸으로 즉위시켰다. 차남이 어떻게 됐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를 두고 책부원구는 '마침내 대의를 위해 살약과 협심하였으니 치토슨의 왕위가 정해졌다. (중략) 가르친링의 위세가 마치 왕과 같았다.'라고 서술하였다. 한편 675년 중종(仲宗)을 당에 파견해서 친선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정전으로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토번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를 두고 사서는 '당시 토번은 양동(羊同), 당항(党項; 탕구트) 및 여러 강족(姜族)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松州), 무주(茂州), 휴주(巂州)등지와 서로 접했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본디는 승려를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인도를 뜻함)에 이르었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 소륵등 4개의 진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한(漢), 위(魏)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날로 기세가 오르는 토번에 두려움을 느낀 당나라는 676년 나당전쟁 도중 귀환환 유인궤(劉仁軌)를 조하로 보내 방비를 굳히는데 677년 현지 지휘관을 이경현(李敬玄)으로 갈아치우고 678년에 유심례(劉審禮)와 같이 18만 대군을 맡겨 다시 한번 공격에 나선다. 이에 가르친링이 맞대응하는데, 유심례는 선봉군을 거느리고 밀고들어가 호소에 주둔했다가 포위, 괴멸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경현은 도주하다가 승풍령(承風嶺)에서 따라잡혀 마찬가지로 사로잡힐 뻔 했으나,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500의 결사대를 이끌고 토번군을 기습하는 바람에 놓치고 만다. 이후 토번은 여러차례 당을 습격하나 대부분이 흑치상지의 방어에 가로막혀 실패하는 통에 강제정전을 맡게된다.
685년 가르친네가 사망하고 가르친링이 직위를 계승했으나 이후 그는 티베트 동부의 농노반란진압과 연이은 지배부족 이탈로 골머리를 썩히게 된다. 특히 690년에는 30만이나 되는 대규모 이탈이 발생할 뻔 했으나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는 689년 위대가(韋待價)에게 10만군을 이끌고 토번을 치라 명한다. 이에 가르친링도 군사를 이끌고 나서고 양 군은 인식가(寅識迦)강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추위 때문에 당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눈이 내리자 우라돌격을 감행, 그야말로 처절하게 당군을 관광보냈고 그나마 살아남은 당군들도 추위 때문에 퇴각하는 도중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측천무후는 위대가를 귀양보냈다.
서역 탈환을 위한 당의 노력은 692년에야 간신히 빛을 보게 된다. 692년 왕효걸이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안서사진을 공격하자 가르친링의 아우인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2]가 막아보겠다고 15만의 대군을 끌고 나섰으나 대부분의 군사를 잃는 대패를 당한다. 이후 서돌궐의 아사나뇌자(阿史那子)에게 도움을 청해 아사나뇌자가가 10만군을 이끌고 출격하지만 왕효걸에게 관광당하고 6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친링은 오히려 강경책으로 나갔다. 695년 그는 임조를 약탈하였고 당은 즉각 토번군을 요격하게하였다. 이에 가르친링은 이 요격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로 결정, 양군은 청해와 장안의 중간지점 즈음에 있는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벌였을것으로 추측되는데 확실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토번군은 최소 4만, 당군 역시 최소 10만을 상회하는 이르는 대결전이었다. 696년 3월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가르친링은 3만~5만 사이의 병력으로 30만~40만에 이르는 당군을 완전히 박살내고 당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다. 목숨만 건져 살아온 사령관 왕효걸은 평민으로 보내고 부관 누사덕은 강등시켰다.[3] 참고로 소라한산은 장안에서 불과 320km 떨어진곳이라 수도권의 안보가 위협당하는 거대한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르친링은 이걸 빌미로 서돌궐 지역의 반환과 안서사진의 수병 철수을 요구했으나 측천무후는 이를 거절했다. 이미 가르가문의 정권이 붕괴직전인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가르가문의 대당강경책은 분명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한가문의 직책 독직은 다른 중소 귀족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치둑송첸은 자신의 즉위에 가르가문이 간섭한걸 생각하면 왕권을 생각해서라도 도저히 가르가문의 권세를 도저히 용납할수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당강경책마저 성과를 보이는데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이상 가르가문의 권세는 더이상 지속할수가 없었다.
3 최후
699년 치둑송첸은 다른 귀족과 연합해 가르가문에 대한 전면적 숙청을 단행한다. 2000여명의 달하는 가르가문의 사병을 해산시키라고 명한 다음 청해 지방에 있던 가르친링에게 재상직을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자살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 명령에 가르친링은 당연히 거절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군이 도착하자 가르가문의 군대는 100명을 제외하고는 그냥 달아나버렸고 마침내 자신의 시대가 끝난걸 안 가르친링은 자살했다. 또한 동생 가르찬파와 친링의 아들 가르궁린은 당으로 도주해버려 이후 토번에서 가르가문의 계승은 단절되었다.
4 기타
많은 작은 새가 한 마리 매에 의해 살해되며 많은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의 수달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네 크게 자란 뿔에도 불구하고 수사슴은 짦은 뿔을 가진 야크를 당하지 못하네 백년된 소나무도 하나의 도끼에 베어지며 강은 작은 배로 건널 수 있다네 평야전체에서 자라나는 대맥과 쌀은 하나의 물방아로 빻아지고 뭇별들은 하나의 태양에 의해 빛을 잃네 계곡 밑에서 발화된 불이 산을 태우고 한 샘물의 물이 산과 평원의 모든 나무를 운반하네 하나의 돌이 평원에 있는 단단한 돌을 흙으로 만들고 풀전체는 버려진 철조각 보다 빨리 썩네 솥에 가득 찬 물도 소금을 넣으면 짜게 되고 무수한 풀도 낫 하나로 베여지며 가느다란 화살로 여러마리 야크가 죽는다네. |
- 가르친링이 지었다는 시로 Dpa'o gTsug-lag phreng-ba 연대기, Lhobrag판, 목판본에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준걸이 여러 사람들을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전설에 따르면 문성공주와 가르통첸이 서로 사통해서 태어났다고. 물론 설득력은 현저히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