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종

당의 역대 황제
2대 태종 문황제 이세민3대 고종 성황제 이치4대 중종 화황제 이현
묘호고종(高宗)
시호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1]
연호영휘(永徽, 650년 ~ 655년)
현경(顯慶, 656년 ~ 661년 2월)
용삭(龍朔, 661년 3월 ~ 663년)
인덕(麟德, 664년 ~ 665년)
건봉(乾封, 666년 ~ 668년 2월)
총장(總章, 668년 2월 ~ 670년 2월)
함형(咸亨, 670년 3월 ~ 674년 8월)
상원(上元, 674년 8월 ~ 676년 12월)
의봉(儀鳳, 676년 11월 ~ 679년 6월)
조로(調露, 679년 6월 ~ 680년 8월)
영륭(永隆, 680년 8월 ~ 681년 9월)
개요(開耀, 681년 9월 ~ 682년 2월)
영순(永淳, 682년 2월 ~ 683년 12월)
홍도(弘道, 683년 12월)
능호건릉(乾陵)
이(李)
치(治)
위선(爲善)
생몰기간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55세)
재위기간649년 7월 15일 ~ 683년 12월 27일(34년 165일)
출생지장안 동궁 여정전
사망지낙양 낙양궁 정관전
즉위식649년 7월 15일

의 제3대 황제(재위 649∼683). 당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휘는 치(治).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장손황후의 3남이다.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로, 줄여서 성황제(成皇帝)라고도 부른다.

그는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토번, 돌궐, )와 전쟁을 한 인물이다.

1 황태자가 되다

그는 적자로서는 3번째 아들이지만 서자까지 다 포함하자면 당태종의 9번째 아들이었다. 이로 인해 원래는 황위 계승과 상당히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징 사후 태자인 이승건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2] 위왕 이태가 태종의 총애를 받으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면서 당태종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계승권이 위태롭다 여긴 승건태자가 한왕 이원창, 재상 후군집과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르려다가 발각되어 이원창, 후군집은 사사되고 이승건은 폐서인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일약 황위계승의 물망에 오르게 된다.

당태종은 처음에는 위왕 이태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당태종의 외척이자 유력한 사족인 장손무기가 반대했고, 여기에 위왕 이태가 새로운 경쟁자가 된 진왕 이치를(이때는 진왕이었다.) 협박하는 일이 발각되면서 자신의 사후에도 자식들 간 다툼이 없길 바랬던 당태종의 마음이 변하게 된다.[3][4] 이후 당태종은 자살쇼를 통해 인자하고 효성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정관 18년(644년) 이치를 황태자로 세운다.

2 황태자에서 황제가 되기까지

당태종은 어떤 의미로는 어쩔 수 없이 세운 꼴이고, 황태자가 된 시점에서 아직 20살도 안 된데다 직전까지 계승순위에서 상당히 먼 처지다 보니, 상당히 신경을 써서 황태자를 교육하게 된다.

일단 유력한 중신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이는데, 장손무기를 태자사보, 방현령을 태부, 소우를 태보, 이적을 첨사, 이대량을 우위솔, 우지녕과 고계보를 우서자, 장행성을 소첨사, 저수량을 빈객으로 삼는다. 태반이 공신들이자 재상급 인재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임으로써 그 지위가 굳건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여기에 자신과 항상 동행하게 하면서 국정에 의견을 말하게 하고, 자신의 통치 경험을 《제범》이란 책으로 엮어서 학습시키게 하는 등 황제 속성교육을 시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에 당고종은 측천무후와 만난 것으로 보인다.

당태종은 사망시에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고명대신으로 삼고 유언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아무래도 그렇게 속성교육을 했다지만 당고종이 여전히 좀 못미더웠는 모양.

3 황제로서의 치세

649년에 즉위한 당고종은 아버지에 비하면 별로라는 평이 대체적이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나라를 잘 꾸려나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측천무후를 후원해 그녀가 국정에 참여하고 공신들을 숙청하며 실권을 잡는데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는 좀 까이기도 했다.

3.1 황후 폐위와 새 황후 책봉

당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 씨를 황후로 올리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소 숙비를 총애하게 된다. 이에 왕 황후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하나 내로라하는 명문집안이었던[5] 왕 황후를 장손무기,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그녀를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진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당고종은 감업사로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후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인 이홍을 얻는다.[6] 그리고 653년 왕 황후와 소 숙비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고 왕 황후측은 소 숙비에 대한 당고종의 총애가 멀어지게끔 하기 위해 무미량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 2품 소의(昭儀)에 책봉케 한다. 무슨 늑대를 피하려 호랑이를 들이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왕 황후측의 생각대로 당고종의 총애가 소 숙비에게서 멀어졌지만, 무 소의측이 당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 왕 황후는 무 소의측의 도전을 받는다. 무 소의는 왕 황후와 소 숙비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의 서족들에다 장손무기,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고, 결국 치열한 정치투쟁 끝에 자신의 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7]공신들의 수장 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강등시키고 왕 황후와 소 숙비가 폐서인되고 자결을 명받은 다음 황후로 책봉된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린다.

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표면상으로는 측천무후의 미모에 홀린 당고종의 잘못된 행동이라 평을 받고 있지만, 속내는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관롱 귀족(사족)세력[8]과 이들에게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서족세력의 정치투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 귀족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것이 최근의 중평이다. 실제로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황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인, 격이 턱없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9] 때문에 측천무후는 당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천진 군벌을 정면 승부를 벌여서 승리했다면 정치의 신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당고종의 심중을 대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0]

3.2 대외정책

당고종은 당태종의 뒤를 이어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을 추구했다. 측천무후의 포스 때문인지 공처가의 이미지도 강하고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할 것 같지만 실상은 상당히 호전적인 전쟁광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전쟁을 많이 했다.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성공적이었으나 토번을 상대로는 가르친링의 등장으로 딱히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1]

3.3 돌궐과의 전쟁

당고종은 즉위 직후부터 돌궐세력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다. 당태종에 의해 몰락했던 동돌궐은 설연타의 패망으로 인한 공백을 노려 거비극한이 재기를 노렸고 세력을 유지하던 서돌궐은 이를 후원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650년 우효위랑장 고간이 거비극한을 추적, 생포한 다음 그 부족을 욱독군산에 이주, 관리하여 동돌궐의 재기를 늦춘다.

이후 657년 좌둔위장군 소정방은 전격적인 진공작전을 펼처 서돌궐의 사발라극한 아시나하로를 공격, 10만여 돌궐군을 격파하고, 종속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을 증강해 결국 신강지역 버얼타라 강(쌍하(雙河))에서 사발라극한을 사로잡고 서돌궐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658년에는 쿠차에 있던 구자국을 점령하고 여기를 요서도호부로 삼은 후, 재차 진격하여 659년 소그드와 페르가나에 도독부를 설치하면서 파미르 고원에 미치는 역대 최대 강역에 도달한다.[12] 하지만 이들 도독부는 665년 폐지된다.

이후 한동안 당은 돌궐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679년 동돌궐은 아사나니숙을 극한으로 옹립하며 재봉기, 당고종은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30만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진압한다. 아시나복념이 아시나니숙에게 호응해 또다시 들고 일어나는데 당은 이간계를 통해 이를 다시 진압한다. 동시에 서돌궐 또한 682년에 들고 일어나지만 왕방경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압. 당은 당고종 생전에는 동,서 돌궐을 모두 거느리는 넓은 강역을 유지한다. 당고종 사후 곧 모두 상실하게 되지만

3.4 백제를 멸망시키다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645년 여당전쟁 당시 보인 백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본래 백제는 당건국 직후부터 대당외교에 대단히 공을 들였으며, 이것이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당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작업 아래 백제는 몰래 고구려와 함께 당나라에 조공하는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무역 중심지인 당항성을 함락시켜 조공길을 막았다.(643년). 신라가 이 일을 당나라에 알리며 백제를 처벌할 것을 요청하지만, 당태종의 대답은 '너희 왕이 여자라 그렇다. 우리 황족이 대신 가서 다스려줄까?'였다(...) 노골적으로 백제편을 든 것이다.

그러나 정작 645년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함께 고구려를 치기로 했던 백제는 원군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는다. 이는 당의 요청에 응해 3만의 원군을 보냈던 신라의 태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당태종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당에 원군을 보낸 신라도 참..그러나 외교적으로는 결국 신의 한수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백제는 당태종이 죽을 때까지 사신을 보내지 못했으며(...) 당고종이 즉위한 후인 650년이 되어서야 관계정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당은 외교 파트너를 백제에서 신라로 완전히 교체해 버린 후였다.

이를 증명하듯 651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화친 조건이라는 것이 '신라에게 뺏은 땅과 포로들을 모두 돌려줘야 하며 이를 어길시 백제를 정벌하겠다'는 것으로 반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백제로서는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입장인 만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당과의 관계복원이 어렵다고 판단한 백제는 신라의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백제와 고구려는 말갈과 힘을 합쳐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협공, 33개의 성을 함락시켜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한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자신을 방어해 줄 구원군을 당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당고종은 백제를 공격하기에 아직 시기가 이르다 판단하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백제의 의자왕이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도취한 나머지 군사 방비를 소홀히 하자, 당고종은 백제의 세력이 미약해졌다 판단하고 660년 3월 소정방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하였고 고구려에서 구원병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적에게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군사를 배치시켜 고구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신라 또한 김유신과 5만 군사를 보내 협공하도록 했다.

한편 백제의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방비를 소홀히 하여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신라-당나라 연합군 18만 명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귀양 중인 흥수에게 막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고, 흥수는 백제의 천혜의 요새인 백마강과 탄현지방에 군사를 배치하여 당나라와 신라를 막으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간신 중 하나인 달솔이 흥수를 시기하여 '당나라 군과 신라군을 백마강과 탄현을 넘어오게 한 뒤 협공'하자고 제안을 해 의자왕이 달솔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고 만다. 이러한 실수는 곧 패배로 이어진다. 이 참담한 결과로 좌절에 빠진 의자왕은 계백 등 출정 장수에게 남은 군사 1만 명 중 5천의 군사를 주어 결사항전하도록 했지만 수적 열세에 패배해 모두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나 남은 5천 명의 군사로 대항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의자왕을 포함해 왕족, 귀족, 일반 백성 등 13만 명의 포로는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건국 678년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3.5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키다.

고구려는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해 이제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상태가 되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이는 당시 준비중이던 대규모 고구려 원정에 대한 중지 정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당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했고 이후로도 꾸준히 전쟁을 벌이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숙원사업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아 신라의 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였고 659년에 재차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했었다. 그러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자 고구려를 고립시켰다 판단하고 이는 곧 정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4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하지역에 도착해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때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공격 시기를 늦추게 된다.

그리고 그해 8월, 결국 고종은 군을 내보낸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대략 계필하력 -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 - 평양도행군도총관, 임아상 -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 -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 -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 - 옥저도행군총관[13] 삼아 총 35개 군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한다. [14]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였다. 661년 8월, 소정방은 바다를 통해 패수로 진입, 저지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 근처인 마읍산을 점령하고 군영을 세운 후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전이 된다.

그러는 사이 서북지역에서 철륵이 봉기하면서 계필하력과 소사업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원정군 자체가 절반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방효태군의 괴멸로 소정방군이 고립되자 결국 원정 자체를 중지시켰다. 이후 당고종은 철륵의 봉기를 진압하고 토번의 도전에 대처하는 등 바쁜 시기를 지내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구려에 대한 정벌 의욕을 포기하지는 않았던 당고종은 때마침 연개소문 사후 그 자식들의 정권투쟁의 결과로 맏아들 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거느리고 투항(666년)하자 재차 공격에 들어간다. 여기에 신라 또한 남쪽에서 협공에 들어갔다.

당은 667년 1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북쪽의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웅거한 남생과의 연결선을 확보했으며,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후방을 안정화시킨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하여 보장왕의 항복을 받는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3.6 나당전쟁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당고종은 신라 또한 장악하고자 시도한다. 백제영역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영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명명하면서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 그러나 신라는 이전부터 당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당의 야욕을 눈치채고 있었으며, 결국 웅진도독부를 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은 장기간에 걸처 이어졌으며, 결국 매소성 전투기벌포 전투 등 중요한 교전에서 신라군에게 패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양국은 장기간에 걸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나중 당현종때에 관계가 복구된다.

3.7 토번과의 전쟁

당고종은 토번을 상대로도 실패만 맛보게 된다. 이는 이 시기에 가르친링이 토번의 실권을 잡으며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번에 대해 이이제이의 용도로 당태종 이래 부용세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토욕혼을 663년 대파, 장악한 후 안서사진을 공격해 함락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고종이 설인귀를 대총관으로, 아시나도진, 곽대봉을 부사령관으로 10만의 군대를 편성해 670년 공격에 나서지만 가르친링에게 대비천 전투에서 완파당해 장군들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살아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후 토번은 남쪽으로는 파라문, 서쪽으로는 총령, 북으로는 돌궐에 이르러 '1만여 리가 되는' 강역을 지배하에 두었고 기나긴 국경선을 치고 빠지며 당나라를 괴롭혔다. 679년 이경현, 유심례는 재차 10여만에 달하는 군을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지만 이 또한 참패, 유심례는 사로잡히고 이경현만 간신히 귀환한다. 당나라는 이에 토번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지만 딱히 대응할 방도가 없어 각지의 방어를 견고히 하는 소극적 정책만을 수행하게 된다.

3.8 대내정책

대내적으로는 무덕율령, 정관율령을 토대로 영휘율령을 완성하고 얼마 안가 장손무기에게 영휘율령의 조목마다 주석을 달게 하여 <당률소의>를 작성, 전국에 반포했고 뒤이어 율소 찬정,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반포하는 등 당나라 율령과 전장제도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씨족지>를 고처 <성씨록>을 만들어 기존의 사족들의 실권을 제한하고 서족들의 등급을 높이는 개혁적 정책도 실시한다. 또한 정관 말년에 심화된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 구분전과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여 균전제를 유지하는데도 성공한다. 이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수성왕.

660년부터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가 국정에 개입하게 되는데, 관직을 늘리고 범계를 늘리며 복식을 확정짓고 인재 채용의 폭을 넓히는 전주법을 개정했으며 과거제도를 수정, 보완하는데 측천무후가 함께 했고 이 과정에서 실권은 천천히 측천무후에게 넘어가기 된다. 그러나 내치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이에 당고종과 측천무후는 666년 봉선을 수행하여 자신들의 치세가 성공했음을 자평하기도 했다.

3.9 측천무후의 국정개입과 장악

고종은 집권초에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정치를 수행했으나 660년 이후부터는 자주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무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맡기고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하게 된다. 고종의 신임에 의해 정치적인 힘도 얻게 된 무후는 아직 힘이 남아있던 장손 무기, 한원, 유석, 우지녕 등을 죽였으며, 이후 자신의 반대파였던 재상 상관의도 664년 이전의 황태자였던 이충과 짜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고 몰아 처형한다. 고종이 무후를 폐위하기 위해 칙서를 내린 것이 들통나 무후가 고종에게 가서 따지고, 고종이 상관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당시 고종의 권력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는게 세간의 평이다. 하지만 고종은 병이 나아지면 직접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고 이 시기 무후의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고종의 신임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고종의 권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15] 실제로 폐위 운운도 권한이 강해지는 무후에 대한 단순 견제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건강상태는 레알이기 때문에 고종이 쓰러지고 무후까지 폐위되면 당황실은 사살상 공황상태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16]. 이후 무후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고종의 신임을 회복했다.

황태자로 앉힌 장남 이홍이 675년 병으로 죽자[17], 둘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680년에는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하고[18] 셋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674년 고종은 병세가 심해져 더이상 정사를 돌보기 힘들게 되자 자신은 천황, 무후는 천후로 칭해 공동정부의 구도를 형성하게 되고[19], 675년 장남 이홍이 죽자 무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면서 사실상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심지어 고종은 무후에게 제위를 넘기려고까지 했다가 재상 학처준의 반대로 이를 취소한 적도 있다.

4 사후의 혼란

고종이 죽자,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 제위에 오르나 중종의 아내 위 황후와 그녀의 아버지가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무후는 그를 내쫓고 무후의 넷째 이단, 즉 예종을 즉위시켰다.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690년, 측천무후는 그도 몰아내고 드디어 제위에 올라 나라를 세운다.

무후는 나라를 잘 다스렸다지만 그거야 백성들 사정이고, 당 황실은 이후에도 위황후, 안락공주,[20] 태평공주[21] 등으로 당현종(이융기)이 즉위할 때까지 몸살을 앓았다. 이렇게 된 계기가 측천무후에게 있다고 보는 건지 측천무후에 대한 평은 잔인하다는 등 안 좋은 평가와 뛰어난 통치자 등 좋은 평가를 같이 갖고 있다. 자세한 건 측천무후 참고.

5 그 외에

어머니를 일찍 잃었는데 그래서인지 약간 마더콤 기질이 보인다. 측천무후는 고종보다 연상이었고, 나중엔 과부였던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 무씨를 사실상의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한국부인 무씨와 죽은 남편 하란씨 사이의 딸 진국부인 하란씨 또한 사실상의 후궁으로 삼아 자매덮밥모녀덮밥을 현실에서 실현한 케이스)

고우영 화백은 십팔사략에서 그를 가리켜, 로봇 공처가라고 평했으며 소설가 진순신은 유약함의 결정체인 당고종이 아버지 당태종도 멸망시키지 못한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앞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는 여자에게 휘둘린 무능한 인물로 꼽히다가 점점 그 능력이 인정받고 오히려 여자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평이 나온다는 점에서 조선 숙종, 고종과 겹친다.

여담으로 신당서에 혼동(混同) 즉 바보라고 기록될정도로 악평받은 군주.[22]

  1. 줄여서 성황제(成皇帝).
  2. 당태종은 신임하는 신하인 위징을 승건태자 옆에 붙여서 훈육함과 동시에 지위가 굳건함을 대내외에 보이려 했으나 얼마 못 가 위징이 병사한다.
  3. 나중에 시중드는 신하에게 "이태가 세워지면 이승건과 이치도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즉, 숙청당할 것이고), 이치가 세워지면 이승건과 이태는 모두 걱정이 없을 것이다."는 이유를 댄다.
  4. 당태종 본인도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라 최소한 자신의 후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5. 서위대장 왕사성의 현손이자, 태종의 고모인 동안공주의 손녀이다.
  6. 출가한 비구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는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황제가 되면 그런 것도 상관없나 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측천무후가 당태종후궁이므로 당고종에게는 의붓어머니 뻘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태종이 후궁으로 들여놓고 워낙 기가 강한 일화 등 때문에 안 건드려서 처녀였다는 식의 드립도 존재하지만, 애초에 그랬으면 궁녀도 아니고 후궁이 되었을리가 있나... 당이 명색은 한족 국가일지라도 북방유목민적인 색채가 강해서 그나마 넘어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7. 측천무후가 딸을 낳았는데 생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사망하였다. 이를 측천무후와 연결된 파벌은 왕 황후가 다녀가서 죽인 것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이 승리의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측천무후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차피 아들도 아니라서 황위계승권도 없으니까 자신의 딸을 베개로 눌러서 죽였다는 야사가 있지만, 측천무후와 관련된 다른 수많은 야사와 마찬가지로 신빙성은 반반이다.
  8. 이 중에서서도 북주, 수, 당을 건국한 핵심 그룹은 무천진武川鎭 군벌이라고 불린다. 무천진은 북위 말기 육진의 난이 벌어질 때의 6진중 하나인데, 북주의 실질적 건국자 우문태를 따라 이 지역 선비족들이 이동, 군부의 핵심 집단이 된다. 우문태의 일족인 우문씨, 수문제 양견의 일족인 양씨, 그 아내인 독고황후의 일족인 독고씨, 수당교체기 한때 최대 세력이였던 이밀의 이씨, 당고조 이연의 일족인 이씨(농서 이씨), 당태종의 황후의 일족인 장손씨가 모조리 이 집단에 속했다. 이들은 8개의 주국대장군, 12개의 대장군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산동, 관중 일대의 귀족과는 대비되는 '신귀족' 집단을 형성했고 황실도 이 집단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 정도였다.
  9. 이 시대에 가문 좀 대단하네 하려면 못해도 후한말부터 거진 수백 년 이상 고위직을 역임해야 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후의 당문종이 우리 가문이 200년간 황제를 했는데도 최고 가문이 아니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러니 고작 개국공신 정도로는 그냥 벼락출세 취급받았던 것.
  10. 사실 <이위공문대>를 보면 당태종 본인도 특히 장손무기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고종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당태종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후에 측천무후도 쳐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이…. 자세한 것은 본문 중 측천무후 관련 대목을 참고.
  11. 애초에 당이 키운 감이 없지 않은데 토번을 제때에 선빵때려서 갈구었으면 토번이고 뭐고 초기에 몰락시킬수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캐안습이 된 셈.
  12. 이후 당현종때 고선지에 의해 더 서진하기는 한다.
  13. 정명진과 방효태는 기록에 따라 총관, 대총관 각각 다르게 기술되었다.
  14. 1개 군 = 최소 5천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최소 병력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당육전에는 최대 1만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20만 내외에 종속된 기미주의 이민족 병력이 +a 일 것으로 보인다.
  15. 상관의 폐위 조서 사건 이후로 고종은 국가 중대사는 재상들이 의결하고, 정책 결정도 재상을 통하도록 만들었는데 측천무후는 이의부, 허경종이 물러난 이후에는 얼마 동안 재상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재상 중에 자기 파벌을 심지 못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힘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에 반대했던 배행검같은 인사들도 임용했을 정도로 관료 임용에 있어서도 측천무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천군 군벌을 기껏 제거한 상황에서 황실의 두 축인 황제와 황후가 대립하다가 권력이 준 공황상태가 되면 다시 황권 도전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17. 신당서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자치통감 등에서는 단지 소문이 있을 뿐이라 할 뿐이며, <사시황태자굉효경황제> 및 <책시효경황제문> 등 당시의 기록에는 '병이 완쾌된 줄 알고 업무를 넘겼다가 병이 심해져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8. 폐위 후 곧 무후가 죽였다.
  19. 선황의 아내뻘인 무후의 환궁과 공치는 당 초기가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북방 국가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증거로 거론된다. 실제로 수문제와 그 아내가 사실상 동등한 직위에서 공치를 한 것이 이 시기 기준으로 100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문제의 독고황후는 스스로도 무천군 군벌중 한인 호족의 출신으로 워낙에 배경이 강하고 유능해서 오히려 수문제를 압도해서 그런 것이고, 당고종과 측천무후는 고종의 병약함과 측천무후의 약한 세력이 조화를 이룬 것도 있었다.
  20. 710년, 위황후안락공주 모녀는 연흠융(燕欽隆)이 중종에게 두 모녀가 나라를 장악하려고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중종의 추궁을 두려워해 중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21. 고종과 측천무후의 막내딸. 어머니 못지 않은 여걸이다. 중종이 독살당한 뒤엔 조카인 이융기와 연합하여 예종을 복위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후 황태자가 된 이융기과 대립하게 되었고 그가 황제로 즉위한 후엔 이융기를 죽이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
  22. 게다가 토번 관련 기록에는 제 때에 조치를 취하지못해 토번을 키웠다고 더 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