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

黑齒常之
(630? ~ 689)

백제, 당나라의 인물. 자는 항원(恒元). 흑치준의 아버지.

1 개요

백제의 부흥군 지도자이자 배신자[1]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2] 묘지명에는 흑치상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문대(文大)손견, 할아버지는 덕현(德顯), 아버지는 사차(沙次)이다. 묘지명에는 또, 원래 부여씨로부터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봉해져 자손들이 이를 씨로 삼으면서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3]

《구당서》나 《신당서》의 흑치상지열전에는 흑치상지의 키가 7척이 넘으면서[4] 묘지명에는 "날래고 용감하면서도 지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고상하고 기질,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다."거나, "기호, 욕망을 가볍게 여기면서 명예, 가르침을 중하게 여겼고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져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으며, 정감의 폭이 넓어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면서도 신중함, 성실함, 온화함, 선량함을 가졌"고 "그의 성품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면서도 스승,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다.[5]

2 생애

어려서 소학(小學)에서 <춘추좌씨전>, <한서>, <사기> 등을 읽었고[6] 20세도 되지 않아 집안 대대로 맡아온 관행에 따라 달솔(達率)이 되었고 풍달군장(風達郡將)[7]을 겸하게 되었는데, 660년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항복했다. 1차 변심

하지만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 태자를 가두면서 군사를 풀어 백제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꼴을 보다 못한 흑치상지는 주위에 있던 10여 명과 함께 숨어있다가 자신의 본부(서부)로 도망가서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을 지키면서 목책을 쌓고 견고하게 지켰다.2차 변심

기록에는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임존성에 귀부한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소정방이 군사를 파견해 공격했지만 이를 상대로 승리해서 20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고 한다. 다만 이는 흑치상지가 모두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흑치상지가 소속된 백제 부흥군이 가장 리즈시절이던 시기의 세력 규모라고 해석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곳을 점거해 같은 임존성의 부흥군 지도자 귀실복신에게 호응했지만, 663년에 귀실복신이 풍왕과 대립하다가 처형되고[8] 풍왕이 불러들인 왜의 구원군마저 백강 전투에서 대패, 풍왕이 고구려로 달아나 부흥군의 거점은 사실상 임존성 하나만 남게 되었다. 흑치상지는 사타상여와 함께 자신의 무리를 인솔하고 항복했고3차 변심 [9] 항복 당시 당군의 지휘관 유인궤는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식량을 주며 임존성을 공략할 것을 명했고, 당에서 수군을 이끌고 왔던 손인사가 "그들이 무슨 야심이 있을 줄 알고 그들에게 무기에 식량을 대줌?" 한 번 배신한 놈들을 믿게 이 쪼다야?이라며 반대하자 유인궤는 "내가 봐서 아는데 얘들이 당에 대한 충심과 지모가 있어. 믿어주면 공을 세울 거임."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배신 못하게 도망칠 곳부터 없애버려야지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유인궤의 명을 수락해 임존성의 백제군을 공격했기에 당에 항복한것도 모자라 동족을 공격하기까지 한 빼도박도 못하는 배신의 흑역사를 내고야 만다.

묘지명에는 이후 664년에 절충도위가 되어 웅진성을 지키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672년에는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가 덧붙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절,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10]로 옮겼다가 상주국에 임명되었으나, 정작 한반도에서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공세가 강화되고, 웅진도독부도 안동도호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떠나 요동의 건안 옛 성으로 옮기면서 흑치상지도 백제 땅을 떠나야 했다.

당에서는 본적을 경조(京兆) 만년현에 받아 만년현인에 소속되었다. 지극히 공평한 것을 소임으로 삼으면서 사사로움을 잊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고 하며 당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 웅진도독부사마로 임명했고, 부양군개국공 식읍 2천호를 덧붙여 봉해졌으며, 묘지명에는 당 고종이 그의 선함을 칭찬하며 지조(?)와 학식 있는 군자로 대우했다고 하는 등, 당에서의 인망이 높아졌다.

의봉(儀鳳) 2년(677년)에 토번이 당을 공격하자 조하(洮河)로 출진하는 유인궤의 부장으로써 흑치상지는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가 된다. 의봉 3년(678년) 9월 12일에 당의 이경현, 유심례 등이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에게 패하고 지금의 칭하이 성(靑海省) 시닝(西寧) 부근의 승풍령이라는 고개에서 포위되었는데, 흑치상지가 밤에 결사대[11]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습격해 격파, 이경현을 구해낸다(승풍령 전투). 이 공로로 흑치상지는 좌무위장군 하원군부사로 임명되었다. 조로 2년(680년) 가을 7월에도 하원을 노략질하는 토번의 가르친링을 다시 한 번 물리쳐 부사에서 대사(大使)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개요 원년(681년) 여름 5월 21일에는 토번의 논찬파를 양비천에서 격파하고(양비천 전투) 양식, 가축 등을 거두어 돌아갔다. 흑치상지가 하원군에서 지내는 7년 동안 토번에서는 함부로 변경을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을 세워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을 지내다가 684년[12] 11월 4일에는 강남도대총관이 되어 서경업을 토벌한 공으로 연국공(燕國公) 식읍 3천호에 봉해지면서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에 임명되고 예전 벼슬은 그대로 하도록 두었다. 수공 2년(686년), 돌궐의 골돌록이 하동도(河東道)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좌응양위대장군(左鹰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總管)이 되어 양정(兩井)에서 2천 기병을 거느려 돌궐군 3천을 상대로 승리하고 흑치상지는 연국공(燕国公) 식읍 2천 호의 작에 봉해졌다.

수공 3년(687년)에 돌궐은 다시 당의 삭주(朔州)를 침공했는데, 흑치상지는 이때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으로서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 채워져 이다조(李多祚), 왕구언(王九言)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돌궐과 전투, 황화퇴(黄花堆)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여 리를 뒤쫓아 돌궐을 사막 쪽으로 몰아내버렸다. 그런데 당시 우감문위중랑장(右監門衛中郞將)이던 찬보벽(爨宝璧)이 조정에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 것을 청했고, 측천무후도 흑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써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함께 돌궐을 쫓게 했는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사전 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해 당군 1만 3천 명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패전 책임을 물어 찬보벽은 처형당하고 대장 흑치상지도 심문 받던 도중, 혹리 주흥(周興)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더불어 반역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투옥당하고, 689년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3 인품

흑치상지가 죽은 뒤 아들 흑치준이 나서서 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흑치상지는 가까스로 역적의 누명을 벗고, 낙양북망산에 묻힐 수 있었다. 참고로 의자왕, 연남생삼국통일전쟁기 인물 중 북망산에 묻힌 사람이 많다.

1929년에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명에서는 "품성이 빼어나고 굳세면서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했으며, 힘으로는 무거운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지혜로는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지만 자랑하거나 떠벌리지 않았다."거나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내면서도 어리석은 것처럼 하면서 인격을 수양했으며, 그 때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어질면서도 간사하지 않고 위엄을 갖췄지만 다른 사람을 해지지 않고 상벌은 원칙에 따르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것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오륜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고 삼군의 크나큰 복이 되어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함부로 어기지 않으면서도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음악, 여색을 곁에 두지 않으면서 평상시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도 않는 등 금욕적이었으며, 경서를 읽는 것을 즐기면서 예의를 중시하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다."는 등으로 그의 행적을 찬미하고 있다.

구당서나 신당서에도, 자신의 말을 채찍으로 때린 병사를 처벌하자는 부하의 권고에 "내 개인의 말 때문에 관아의 병사를 매질할 수는 없다"며 넘어갔고, 군공으로 포상을 받으면 모두 부하 장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에게 남기는 것은 별로 없었다는 일화도 적고 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면 굉장히 선량한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4 그는 배신자인가

"흑치상지는 (당에)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동료였고 한때는 그 지역에서, 당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그 지역을 함락시키는 데 앞장을 선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흑치상지의 행동은 부흥군의 입장에서그리고 백제인 나아가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입니다."

- 계명대학교 사학과 노중국 교수의 평, KBS 역사추적 '비운의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신자인가' 인터뷰 中[13]

흑치상지의 행적은 비유하자면 대한제국의 군인이 대한제국 멸망 후 일본의 작위를 받았다가 마음을 바꿔 의병(또는 독립군)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다시 일본군에 항복해 독립군 소탕에 앞장서서 일본군 장성으로 출세한 격.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린 백제인 3명(...) 가운데 한 명이다.[14] 이마저도 중국 기록의 복붙이다(...). 일제 시대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이에 대해서도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영웅인 귀실복신은 열전을 안 썼으면서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진압하기까지 한 흑치상지는 열전을 써 넣었다"며 깠다.[15][16]

흑치상지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쉴드를 쳐줄 수도 있는 것이, 당장 흑치상지가 살았던 시대가 너무 막장으로 흘러갔다. 백제 말기 의자왕의 무리한 왕권 강화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에 당의 점령지 백제에 대한 처분이나 학살도 만만찮았지만 백제 부흥군 안에서도 정작 부여풍과 도침, 귀실복신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이 다시 풍왕에게 죽는 등하라는 부흥운동은 안 하고 거의 막장에 치닫는다(...).[17] 흑치상지의 눈에는 백제 부흥군 세력 내부의 분열이 참으로 아니꼽게 보였을 수도 있고 그것이 백제 부흥운동 자체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18]

"정말 흑치상지는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그냥 용병으로써 이용만 당하다가 그냥 죽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그렇잖아요. '이러자고 조국을 배신했을까?' 무상한 거예요."

- 류근 시인의 평. KBS 역사저널 그날 제105화(2016년 1월 3일자 방송분) 고대사 인물열전 '선택' 1편에서,

다만 이러한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기도 하다. 당은 백제를 점령한 뒤 신라에 할양하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세워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을 도독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는데 이것이 당의 괴뢰정권이긴 했으나 백제의 근본적인 멸망 원인이 당과의 단교였던 것으로 봤을 때 이는 당시 부흥운동의 실패 이후 신라에게 합병되지 않고 백제의 존속이라도 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유일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웅진도독부의 설치 목적이 단순히 백제 부흥이나 존속보다는 신라에 대한 견제용으로[19] 의자왕 이전의 독립국로써의 백제라기보다는 당의 일개 기미주로써의 성격이 강했기에, 진정한 의미의 백제 부활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더구나 신라가 백제 땅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펼치면서 그런 식으로라도 백제를 존속시키려 했던 희망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다.

백제 부흥은 물 건너 가고 당으로 건너가 토번이나 돌궐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무장으로써 어느 정도 정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흑치상지가 섬겼던 군주가 하필이면 숙청 내지 무고를 적극 장려하며 자신의 정치권력에 이용해 먹었던 유명한 측천무후(...)였다. 《신당서》에서는 흑치상지의 죽음을 전후해 숱한 번장들이 죽임을 당하는 기록이 쏟아지는데, 이민족으로써 출세했다 한들 중국에서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는 늘 흑치상지를 따라다녔던 것이다.[20] 전공을 세워 출세한다 해도 흑치상지는 당에서 죽는 순간까지 이방인일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은근히 일제 말의 홍사익 중장에 비유되기도 하는 모양.홍정선의 중국기행(세계일보 연재)

5 매체에서

일제 시대의 문인 현진건이 흑치상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명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 검열로 중지당한 일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처음에는 흑치상지가 이런 인물인 줄 모르고 시작했다가 (자료 수집 부실 등의 문제로) 뒤늦게 흑치상지의 실체(...)를 알고 작가가 중단해 버렸던 게 아니냐고 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람의 나라에 등장하는 던전 미륵사 지하회랑의 보스 이름이 흑치상지다. 본문의 인물과 연관성은 없고 이름과 국적만 따온 듯.
  1. KBS 역사추적 제27회(2009년 6월 15일자 방영) '비운의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신자인가'편의 사회자 클로징 멘트는 '조국 백제의 비극적인 운명을 온몸으로 함께 한 진정한 백제인'이었으나, 해당 방영분은 지수신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았고 귀실복신이나 도침 등에 대한 언급도 미비해 왜곡된 방송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2. 여기서 서부란 사비성 안의 오부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백제에서는 수도를 오부(요즘으로 치면 서울 무슨무슨 구)로 나누고 지방을 다시 오방(요즘으로 치면 무슨무슨 도道 나누는 것처럼)으로 나누었다. 기록에서 '어디 사람'이라고 하는 경우 꼭 그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주로 당시 자신의 호적이 등록된 곳, 요즘의 주민등록상의 본적지 주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 흑치는 지명으로 보이는데, 이 흑치가 국내인지 국외인지 학자들끼리도 말이 나뉜다. 이도학은 흑치를 중국 기록에 나오는 흑치국(黑齒國) 즉 지금의 필리핀으로 보고 백제가 동남아시아까지 지배권을 행사한 증거라고 보았던 반면에 노중국은 흑치를 '검은니'의 훈차로 보고 黑은 검다는 의미로 금(今), 齒는 내(川)라는 의미로 물(勿)로 해석해 백제 금물현(今勿縣)이 있던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고덕면, 봉산면 및 당진시 합덕면 일대로 비정하였다. (이도학은 다시 자신의 저서 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에서 "그런 식으로 해석할 거 같으면 한반도에서 흑치 아닌 곳이 없을 것"이라고 노중국의 설을 비판한다.)
  4. 한국의 KBS 역사추적 팀이 흑치상지묘지명에 대해 취재하던 도중 들은 것으로 1929년에 흑치상지와 아들 흑치준 두 사람의 묘지명이 뤄양의 북망산에서 함께 발굴될 당시 묘지명 부근에서 머리뼈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유골도 함께 수습되었다고 한다. 다만 묘지명만 남고 유골은 수습하지 못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다고.
  5. 묘지명의 특성 상 이런 식으로 개인의 일생이 수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6. 흑치상지묘지명에서는 “좌구명(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나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라고 감상평을 남겼다고 적고 있는데, 해당 부분은 논어 공야장편 25장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한 것으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번지르한 말, 꾸민 얼굴빛, 과한 공손함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다. 나도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원한을 감추고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다. 나도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하셨다."이다. 후술할 흑치상지의 인생을 보면 마치 그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상하는 듯한 묘한 부분이다.자아비판
  7. 풍달군의 위치는 현재까지도 미상이다. 이병도는 풍달군의 풍(風) 자에 주목해 바람이라는 단어와 가장 비슷한 이름의 발라군(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을 풍달군으로 비정했는데, 이도학은 백제의 서부 어디엔가에 있었을 것이므로 충청북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8.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는 흑치상지가 풍왕의 명으로 복신의 목을 직접 친 장본인으로 각색, 묘사된다.
  9. 이도학은 당시 당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당으로부터 새로운 백제왕으로 임명되어 귀국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이 흑치상지의 회유에 나섰을 것으로 보았다.
  10. 당이 옛 백제 땅에 두었던 웅진도독부 산하의 5개 주 가운데 하나다.
  11. <중국 속의 고구려 왕국, 제>의 저자 지배선 교수는 흑치상지가 승풍령에서 지휘한 결사대는 과거 흑치상지를 따르던 백제인 병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뛰어난 이민족 무장을 적극적으로 번장(番將)으로 기용하던 당에서 번장으로 임명되는 경우 으레 자신과 동족인 자들을 모아 부대로 거느리기 마련이며, 밤에 몰래 이루어지는 야간기습작전의 경우 웬만큼 손발이 맞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그 이유로 흑치상지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이었기에 작전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았다.
  12. 이 해에만 연호가 세 번이 바뀌었다(...). 사성(嗣聖), 문명(文明), 광택(光宅) 순으로. 사실 측천무후는 재위 중에 연호를 자주 바꾼 편이었다.
  13. 이도학은 흑치상지를 비판한다면 백제부흥군의 거물이었던 귀실복신을 의심해서 죽인 부여풍도 비판받아 마땅한데 왜 부여풍을 비방하는 사람은 없냐며 흑치상지에 대해 옹호하는 편. 이도학은 흑치상지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
  14. 나머지 두 사람은 도미와 계백.
  15. 《삼국사기》의 편파성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지적하고 있는데, 백제 부흥군에 가담해 신라의 웅진으로 가는 길목인 옹산성(대전 계족산성으로 비정)을 지키고 있던 성주를 치러 나선 김유신이 옹산성주를 회유했지만 듣지 않자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성주를 죽인 것에 대해, "신라에 저항했어도 그는 백제의 충신인데 왜 꼭 죽여야 했을까? 죽였으면 의리상 최소한 장례라도 제대로 치러줘야 되는 거 아님?"하고 비판했다.
  16. 다만 안시성주의 사례에서 보이듯 단순히 이름을 정확히 몰라서 못 썼다고 쉴드를 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귀실복신의 경우는 중국의 《구당서》나 《신당서》, 《자치통감》은 물론 《삼국사기》에서도 간간이 이름이 보이고 있기에, 본기의 내용을 거의 복붙하다시피한 을파소나 명림답부, 중국측 열전의 내용을 복붙한 흑치상지의 경우에서도 보이듯 쓰려면 복붙을 해서라도 쓸 수도 있었다(실제로 고구려의 명림답부을파소는 본기 내용을 복붙해서 열전을 썼다). 부흥운동을 주도한 충신이기는 했지만 풍왕도 무시하고 전횡한 점이 김부식에게는 거슬렸던 모양(김부식은 유학자다).
  17. 일제 시대에도그리고 어쩌면 현대에도 항일독립운동, 민중계몽운동에 나섰다가 동지들의 불화나 민중의 모순된 모습을 보고 실망, 좌절하고 자포자기한 나머지 변절해 버린 유형의 친일파들이 상당히,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치호.
  18.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흥운동 자체를 비하하고 좌절한 나머지 부흥운동 자체를 부정하고 그 진압에 나서고 만 흑치상지의 행동은 제국주의 시대의 여느 변절자들과 마찬가지로 흑치상지 스스로가 가진 논리의 모순을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간 변절자 모델 흑치상지처럼 멸망한 백제, 고구려 유민 가운데(심지어 신라인 가운데서도) 본국보다도 외국인 당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내고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거나, 서쪽으로 사막이나 초원, 정글에 사민되거나 하며 평생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다 죽어갔다. 당 왕조가 한족 이외의 이민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자국에서 출세할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한 당시로써는(혹은 요즘의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전근대 사회의 신분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였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19. 신라가 고구려 유민 안승과 그가 데려온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 땅인 익산에 이주시켜 보덕국을 세우도록 지원한 것이 백제 유민에 대한 견제에 있었듯이.
  20. 흑치상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멸망 뒤에 당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한 천헌성(연개소문의 손자로 연남생의 아들)이, 문무관 중에 활을 잘 쏘는 사람 5명을 뽑아 상을 주려는 측천무후에게 내사(內史) 장광보(張光輔), 우왕검위대장군(右王鈐衛大將軍) 설토마지(薛吐摩支) 등이 모두 헌성 본인을 추천하자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이를 고르신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중국인(한족)이 아니니, 대당의 관리(한족)들이 앞으로 활쏘기를 수치스러워 할까 두렵습니다."라며 물러선 적이 있다. 심지어 측천무후 사후인 당 현종 때조차, 고구려 유민 출신의 명장 고선지가 상관인 부몽영찰에게 먼저 보고도 거치지 않고 승전을 황제에게 보고했다는 이유로 부몽영찰로부터 "개 배알이나 삶아 처먹을 고구려 놈아!"이라는 욕설을 들어야 했다. 이미 고구려가 멸망하고 백 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고, 고선지는 아버지 때부터 당 조정의 무장으로 복무하던 인물로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 따위는 거의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었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