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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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仁貴
(613 ~ 683)

1 개요

나라의 장군.살인귀가 아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강주 용문 사람으로 평민 출신이며 본명은 설례(薛禮)로 흔히 알려진 인귀(仁貴)는 (字)이다. 삼국지여포의 부하로 나오는 설란의 15대손이다.

2 생애

나라의 맹장인 설눌의 아버지로 무예에 능하였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는데 가난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조금 나아지겠지'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는데 기록에 의하면 설인귀의 부인인 유씨가 "지금 천자께서 요동을 원정한다 하셨는데 맹장이 필요할 거예요. 능력 있는 사람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은 재주 있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생각해요. 조상님들 묘를 이장하는 것은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아요!"라고 권유해서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입대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내가 니트족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던 듯./이미 조상님 묘는 잘 잡았고, 아내 덕에 복을 받은 듯

645년에 고구려-당 전쟁주필산 전투에서 가는 곳마다 고구려 진영을 격파하자 유격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658년에 우령군중랑장으로 요동 적봉진을 함락하고 다음 해에 석성을 공격하며 물러갔다.

659년 황산에서 고구려 장수 온사문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661년에 철륵이 10만의 병력으로 난을 일으켜 당군을 공격하자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화살 3발로 적장 3명을 죽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진격하여 적들을 격파하였고 661년8월에 고구려 대규모원정에 참가하였지만 연개소문에게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했다.

그러다 667년에 3차 여당전쟁에서 신성,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회군하였으며 668년에는 3천의 병력으로 부여성을 함락하고 이후에도 평양성 점령에도 공을 세웠다.

중국의 경극에서는 연개소문에게 쫓기는 당태종을 보호하기 위해 연개소문과 싸우는 히어로적인 역할로 나온다. 여기서 연개소문이 5자루의 칼을 휘두르는 먼치킨으로 나오고, 설인귀는 그를 활로 응수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안동도호가 되어 고구려 땅을 다스렸으며 670년에 고종의 명으로 30만의 군사를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였지만 토번의 명장인 가르친링에게 패하여 붙잡혔고 이 패배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다음해에 복귀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676년에 기벌포 전투에서 패하였다.

682년에 돌궐이 공격하자 이를 격퇴하고 683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죽은 후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의 직위를 받았다.

무인으로서는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대표적인 무용담으로는 황제 앞에서 기사술을 시연하는데 어찌나 강궁이었는지 그가 쏜 화살이 5중 쇠갑옷을 관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 서술된 세 명의 돌궐족 선봉장을 세 개의 화살로 사살한 무용담에서 당시 군중에서는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관문으로 되돌아오네(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이라는 말이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흰 전포를 입고 전장을 질주해서 '백포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또한 방천화극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방천화극과 활을 잘 쐈다는 걸 보면 어쩐지 여포와 이미지가 겹친다. 다만 여포는 실제로는 ""이 없는 시대에 살았다고.

3 창작물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비록 말갈족, 거란족 처럼 나와서 그렇지 이덕화가 연기했으며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보였다. 분명 악역의 위치임에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1] 한국 사극에서 가장 잘나가는 적장이라는 말이 그럴듯해 보인다. 사실 고증에 따르면 대조영은 설인귀에게 항상 패했다 역시 거란 장수로 나온 이해고(정보석 분)도 그의 포스에 비하면 철철 밀릴 지경. 이덕화가 천추태후(드라마)에서 강감찬 역을 맡을 때 강감찬과 설인귀가 겹쳐 보인다고 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대조영도 못한 전회 출현! 하지만 10년을 더 살은 좀비물

연개소문에서는 유태웅이 연기했다. 수당의 무장을 통틀어 고구려군 지휘관들과 대등하게 겨루고(여자들이었지만) 킬마크를 따낸 유일한 인물. 전쟁에 나가기 위해 참가한 비무대회에서 다수의 기병대와 겨뤄 압도했었고 1차 고당전쟁에선 쌍검녀를 시종 압도하다 죽여버리고 연수정은 첫번째 대결에선 팔에 상처를 입히고 두번째 대결에서 화살 하나로 꿰어버리는 등 무용으론 중국의 무장중 원탑이지만, 입체적인 인물상이 아닌 단순히 당나라 장수 1인으로 묻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덕화의 연기에 비해서는 포스가 확실히 밀린다.

수호지의 등장인물인 '새인귀' 곽성의 별호는 설인귀에게서 따온 말. 작중의 곽성도 설인귀처럼 흰 전포를 입고 활약한다.

현대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그냥 침략에 실패한 악역 정도지만, 중국에서는 상당히 취급이 좋다.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뛰어난 무공 때문인지 많은 민간전설을 남기기도 했으며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도 인기가 많았는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나올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인기 많은 역사 속 무인 중 한 사람이다.[2] 아무래도 농사꾼이 심기일전하여 산전수전 다 겪고 나라의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는 어딜 가나 매력이 있는 듯 하다. 참고로 바이두 백과에서는 중국의 민족적 영웅[3] 카테고리에 악비, 위청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1. 다만 가끔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권토중래라는 단어를 몰라 옆의 부하에게 지적받아 역성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더 인간적이라는 감상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권토중래라는 말 자체가 그 시대에 없던 거라 고증오류로 지적받기도 하였다(권토중래라는 말은 당나라 후기에 생겨났는데 당시 중국은 당나라 전기였음).
  2. 경극인 독목관에서는 아예 연개소문을 쓰러뜨린 영웅으로 나온다.
  3. '민족'이라는 말이 붙듯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중국사의 제갈량, 관우 같은 영웅들보다 외세에 저항해 싸우거나 이민족을 격퇴한 역사 인물들을 일컫는다. 일제의 침략을 겪은 후 현대에 와서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은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