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건국 삼걸 | ||||||
카밀로 카보우르 | 주세페 가리발디 | 주세페 마치니 |
Giuseppe Garibaldi
1807년 7월 4일 ~ 1882년 6월 2일.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자 혁명가, 군인, 정치가. 사실상 이탈리아의 국부.
프랑스 니스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들어간 것이 그의 군인으로서 경력 첫 줄을 장식한다. 아직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오스트리아에게 고통받던 조국 제노바의 독립을 추진하던 주세페 마치니에게 감화되어 청년 이탈리아당에 들어간 것이 혁명가로서의 경력 첫 줄이다. 이 때가 1834년, 당시 아직 강대했던 오스트리아가 이러한 민족 운동을 내버려둘 리 없었고, 그는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끌어내려지고 복고왕정이 세워진 어수선했던 프랑스에서도 그들은 청년 유럽당을 세워 활동했지만 실패해 스위스에서도 쫓겨나고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이 와중에 가리발디는 1836년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으로 와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혁명전쟁에 참전했다. 군인과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던 가운데 그는 조국의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 1848)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귀국한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이 롬바르디아를 장악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나 1860년 그의 고향이었던 니스와 사보이아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 비정규군을 소집해 프랑스령 니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위험한 짓거리를 방관할 수 없었던 카밀로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측근들을 적극 이용해 남이탈리아행을 가도록 유도했고, 그는 냅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점령해서 사르데냐 왕국에 바친다. 그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의 위명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두에 시칠리에 왕국은 무혈개성을 했을 정도였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남부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 역시 가리발디가 직접 왕이 되려 하거나 최소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리발디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두말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헌납했다.
이후 카프레라 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지지부진하자 1862년과 1867년에 팔레르모에서 냅다 군대를 만들어서 로마 탈취를 시도하였다가 실패, 카프레라섬에 다시 연금되었다.
사실 정치가로서의 역량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시대의 영웅이자 애국자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