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역대 국왕
통일 전초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움베르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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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Emmanuel Ⅱ.

1 개요

풀네임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알베르토 페르디난도 에우제니오 톰마소(Vittorio Emanuele Maria Alberto Eugenio Ferdinando Tommaso). 사보이 왕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지막 왕이며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이탈리아 건국 3걸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통일에 큰 기여를 한 인물 중 하나이다.


2 즉위 전

1820년 3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 토리노의 궁정에서 태어났다. 왕실의 자제였지만 그가 태어난 1820년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뒤였으며, 북이탈리아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강하게 전파된 곳 중 하나여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그의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Charles Albert)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그 역시 자유주의적 사상 속에서 성장했다.

1848년, 전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기운 속에 부친인 카를로 알베르토는 국내의 자유주의 좌파 세력의 강력한 요구에 부응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그러나 사르데냐군은 강력한 오스트리아군에 연전연패하고 굴욕적인 화평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당시 왕위계승권자였던 비토리오도 군 지휘관으로 종군했으나 패전하는데 크게 일조(…)하는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강화 조건으로 카를로 알베르토의 퇴위와 망명을 요구, 사르데냐가 이를 수락하면서 비토리오는 사르데냐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3 집권 초 : 와신상담의 시기

처참한 패전의 혼란 속에 즉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으나, 전후 수습은 상당히 빨랐다. 우선적으로 그는 부친을 부추겨 무모한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주장한 자유주의 세력 및 공화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며 국왕 친정체제를 확립했다. 자유주의 세력은 이를 배신이라며 이를 갈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강한 상황에서 패전 직후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좌파 및 반대파에 대한 탄압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오스트리아에 전쟁배상금을 완납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에 대한 복수의식과 이탈리아 통일의 의지를 더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리고 상공업을 진흥하는 등 국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면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파트너로 후일 이탈리아 건국 3걸 중 하나로 불리는 명재상 카보우르를 전격적으로 기용했다.

그는 카보우르와 작은 부분에서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에서는 전적으로 그를 믿고 따랐으며, 카보우르의 의견을 따라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훗날의 통일 수행에 있어 강대국인 영국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외교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탈리아 통일에 지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기회를 엿보며 군사력을 키우는 등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준비에 나섰다.


4 집권 중반기 : 미완의 통일

마침내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나섰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고 전면적 승리를 거두기 일보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프랑스군은 빌라프랑카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터에서 일제히 발을 빼는 배신을 하는 동시에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에 이쯤에서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라는 권고를 했다.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한 카보우르는 단독으로라도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지금까지 얻은 성과조차 모두 날리고 프랑스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피렌체, 로마 등의 중부 이탈리아는 병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사르데냐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니스사보이를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사보이 왕가의 발원지인 사보이 지역까지 넘길 정도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다.[1]

이후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붉은셔츠 의용대가 양시칠리아 왕국 등 시칠리아 섬과 남이탈리아를 석권한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헌납하여, 마침내 로마 제국 멸망 이래 계속 분열되어 온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었고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정식으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건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베네치아 외에도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로마는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어서 접수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미완의 통일이었다.


5 집권 말기 : 통일의 완수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프로이센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비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 오스트리아의 후방을 공격하여 8년 전 획득하지 못한 베네치아를 양도받는 데 성공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해냈다.

뒤이어 1871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로마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를 점령,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과 로마의 지배자이기도 했던 교황 비오 9세와 충돌하여, 비오 9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파문했으며 이 둘은 살아생전에 서로 대면조차 하지 않았다.

VITTORIO·EMANVELE·II / PADRE·DELLA·PATRIA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국가의 아버지)

이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기반을 닦다가 1878년 1월 9일 사망했다. 유해는 판테온에 안장되었으며 왕위는 아들 움베르토 1세가 계승했다.
  1. 빌라프란카 강화 조약으로 프랑스가 배신을 때렸어도 그나마 다행이었던게 강화 조약에는 사보이와 니스의 언급이 없었다. 이 두 지역은 1년 후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