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닌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48대49대50대
쇼토쿠 덴노코닌 덴노간무 덴노

일본의 49대 덴노. 이름은 시라카베(白壁)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당시 거듭되는 정변으로 황족들이 계속해서 죽음에 내몰리자, 관직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술주정뱅이인 척하며 난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황실은 덴무 덴노 계가 황통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770년 쇼토쿠 덴노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5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차기 천황을 둘러싸고 의정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정권에서 희생된 황족들이 많았던 탓에 차기 덴노에 적합한 후보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후보로 거론된 인물이 덴지 덴노의 손자인 시라카베와 정계에서 은퇴한 덴무 덴노의 손자 훈야노 기요미, 기요미의 남동생인 훈야노 오치였다.

우대신 기비노 마키비는 기요미를 적극적으로 추대했지만, 후지와라노 나가테, 후지와라노 스쿠나마로 등이 기요미에게 자녀가 13명이나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 것을 걱정하며 반대했다. 결국 나가테와 스쿠나마로, 우대변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이 추대한 시라카베가 고닌 덴노로 770년 10월에 즉위했다. 즉위 당시 나이는 61세로, 역대 덴노 가운데 최고령이었다. 이때 모모카와 등이 그를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쇼토쿠 덴노의 유서를 날조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가 즉위함으로써 672년 덴무 천황이 아스카기요미하라 궁에서 즉위한 이래 100여 년간 지속된 덴무 덴노계의 황통은 막을 내리고 덴지 덴노계의 황통이 시작되었다.

정무를 운영하는 데에서 고닌 덴노는 기본적으로 전임자 쇼토쿠 덴노의 노선을 계승했다. 이는 즉위 전에 쇼토쿠 덴노 밑에서 의정관을 역임했던 것과 황후 이노우에 내친왕이 쇼무 덴노의 딸이라는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권이 바뀌어 쇼토쿠 덴노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 도쿄가 배척되었다고 해서 불교 자체가 기피되지는 않았다. 쇼토쿠 덴노가 심혈을 기울였던 서대사와 서융사 등의 사찰을 완성시키는 등 고닌 천황은 불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닌 덴노는 독자적인 정치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덴노의 거주 공간인 내리 안쪽에 황후 이노우에 내친왕의 거주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고, 쇼토쿠 덴노의 통치 시대에 비대화되었거나 불필요한 관직을 정리, 통합하고 긴축재정의 정책을 실시하는 등 율령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781년 4월 병상에 누워 있던 고닌 덴노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야마베 친왕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782년 사망하였으며 히로오카 산릉에 매장되었다가 다라하노 히가시릉으로 이장되었다.

전임 천황이 여성이었고, 왕위계승 후계자를 정하지 못해 군신들 간에 분쟁이 있었던 점이나 그 이전까지 왕위계승 상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왕족이었다는 점, 그리고 전임 천황의 유조에 따라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군신의 추대를 받아서 왕위에 오른 점이 증조부 조메이 덴노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실제로 조메이 덴노는 소가 씨의 피를 잇지 않은 왕족으로 조부 비다츠 덴노 이래로 쭉 소가 씨 혈통의 왕족들이 즉위함에 따라 아버지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는 끝내 왕위를 잇지 못했고, 결국 스이코 덴노 사후에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왕위계승 분쟁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즉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코닌 덴노도 조부 덴지 덴노 이래로 쭉 덴무계 왕통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쇼토쿠 덴노의 사후에 덴무계가 단절되면서 덴지계의 단일 왕통을 창출해 냈다. 현대의 천황가는 코닌 덴노에서 쭉 이어져 온 덴지 덴노 계열의 후손이므로 코닌 덴노는 조부, 증조부에 이어 새로운 왕통을 창출한 중시조 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