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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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24대 동성왕 부여모대25대 무령왕 부여사마26대 성왕 부여명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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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무령왕(武寧王)
부여(扶餘)
사마(斯麻) / 사마(斯摩) / 융(隆)
생몰년도음력462년[1]~ 523년 5월 7일 (62세)
재위기간음력501년 11월 ~ 523년 5월 7일(약 23년)

력으로 고구려를 제압하고 나라를 안하게 한 백제의 25대 건길지.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되는 백제 왕이자 웅진 시대의 왕들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백제 왕이다.

웅진 시대의 백제 왕들은 문주왕(암살), 삼근왕(요절. 암살설도 존재), 동성왕(암살), 그리고 무령왕과 아들 성왕[2]이 있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1 업적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일본에서 태어났다. 외국에서 태어난 국가지도자이며,[3] 한국사에서 외국에서 태어난 지도자까지 범위를 넓히면 다파니국에서 태어난 신라탈해 이사금[4]과 함께 조선 현종도 있다.

무령왕릉 발굴 결과 62세까지 산 것으로 밝혀졌다. 위덕왕과 함께 백제 국왕 중 출생년도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케이스. 그리고 즉위도 40살에 했으니 늦게 한 케이스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 할 수도 있었을 왕. 그럼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선대 개로왕남동생곤지의 큰 아들이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곤지가 왜로 파견나갈시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바로 사마.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으나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곤지의 왜 파견시기가 일치,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도 있다.

곤지가 일본에 가던중 어느 섬[5]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사마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嶋君(도군/しまきみ, 시마키미)라고 전하는데, 발음상 유사하여 사마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문 표기가 여러 가지로 전하는 것 역시 음차를 이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

사실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6]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역대국왕에 있는 가계도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그쪽도 일단 이리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동성왕의 경우는 문주왕의 아들일 거란 가설이 있어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백제를 크게 중흥시킨 건길지로, 무령왕 재위 전까지는 안습한 상황을 겪다가 동성왕 때 제법 회복되어 무령왕기 부흥의 전기를 마련해 백제 후반기의 흥망기를 열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키가 8척에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2 즉위와 전쟁

무령왕의 이복 아우이자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전제화 시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병 백가를 위시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오히려 한솔 해명과 함께 502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7],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세력의 균형이 이룬 무령왕은 전남지방 즉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서부로 진출하였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였다. 덕분에 한동안 신라에 맞먹을 만큼 팽창했던 대가야는 대폭 몰락한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자지우지 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이 끊기면서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무령왕 시절, 백제군은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 무령왕기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현재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 였느냐? 즉 한강 유역에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는 한강 이남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3 왕권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에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왕족을 지방통치에 이용하여 대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하였는데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귀족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무도포학하다고 할 정도로 전제군주적인 모습을 보여온 동성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4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즉위 6년에 왜에 이미 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한편, 일본의 케이타이 덴노에게 동경(銅鏡)을 하사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516년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랑민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5 무령왕릉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 +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출토된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에 급유명해졌다. 1971년 무덤이 통째로 묻혔다가 수도 공사 중에 발굴된 탓에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을 전혀 안 당하고 발굴된 것. 다만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6 연대 문제

기록이 남은 것치고 연대가 상당히 개판 부정합이 있는 편이다.

  • 출생년도
무령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묘지석, 《일본서기》, 《삼국사기》가 모두 서기 523년 5월로 일치한다. 그런데 묘지석에 따르면 62세로 죽었으니 523-61[8]462년이 되고, 《일본서기》에는 461년 6월 1일로 되어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무령왕이 63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62세로 처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무령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501년 동성왕이 사망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501년 12월 동성왕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삼국사기》가 유월칭원법[10]에 따르고 있음을 감안하면 무령왕의 재위기간은 502년부터가 되어야 맞다. 이러다 보니 무령왕 치세 중간에 한 해가 빠져야 하는 건 당연한 노릇. 그런데 또 《일본서기》에는 502년에 말다왕(동성왕)이 시해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 고구려 전쟁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원년(502) 11월에 달솔 우영과 군사 5천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을 침공했다고 되어 있는데,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온다. 문자명왕 12년(503!)조에. 하하 개판이네 게다가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2년(503)에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온다 문자명왕 11년(502!)조에.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대략 정리하면...

서기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본)
삼국사기 백제본기
(수정 가함)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일본서기
501무령왕 즉위 원년
백가 토벌(1)
수곡성 침공(11)
동성왕 시해(11-12)
동성왕 시해(11-12)
502봄 기근
고구려 변경 침공(11)
무령왕 즉위 원년
백가 토벌(1)
수곡성 침공(11)
백제 변경 내침(11)동성왕 사망
무령왕 즉위 원년
503말갈 마수책 침공(9)봄 기근
고구려 변경 침공(11)
수곡성 내침(11)
504 말갈 마수책 침공(9)

조상님들이 백제본기를 진짜 졸면서 쓰셨나보다. 그래도 수정한 쪽은 그나마 볼만하다.

7 매체에서의 등장

백제 사극이라고 해봤자 황산벌, 서동요, 근초고왕, 계백이 전부인데 뭐 등장할 건덕지도 많이 없었다가 MBC의 전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수백향의 아버지로 등장했다. 일본 황녀를 무령왕의 딸이라고 어림짐작한 역사 왜곡도 문제가 있었고 배우이재룡이 단신인 데다 문관 이미지라 우려가 됐지만. 드라마 자체는 재미가 있고 배우가 예상 외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잘 해내서 호평을 받았다.

8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一月 무령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一年冬十一月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다
二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이 침입하여 마수책을 소각하다
三年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六年 봄에 전염병이 유행하다
六年三月 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이 굶주려 구제에 나서다
六年秋七月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 함락하다
七年夏五月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다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十年春一月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다
十二年夏四月 양나라에 조공하다
十二年秋九月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二十一年冬十一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양 고조(양 무제)가 조서를 보내 책명하다
二十二年秋九月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二月 한수 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 오다
二十三年夏五月 무령왕이 죽다

백제 후기의 왕답게 초기 왕들에 비하면 기록이 많은 편이다. 법왕 혜왕은??

9 기타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부인 역시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사망 3년 뒤인 526년 12월 사망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으로 표현했는데 아쉽게도 성과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1.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른 기록
  2. 성왕은 재위 중반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했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3.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동성왕의 출생이 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4. 왜국보다 동북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5. 일본서기》에 따르면 各羅島(각라도/카카라시마)라고 한다.
  6. 엄밀히 말하면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위의 전승처럼 무령왕을 개로왕의 아들로 보고 있다.
  7.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않고 항복했고 그대로 목이 잘렸다.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백가의 뒤에 누군가가 있을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무령왕이 백가를 시켜 동성왕을 암살하고 자신이 배후임을 숨기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것.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명확한 진실은 알길이 없다.
  8. 동아시아식 나이에 따라 태어난 해가 1살이므로 나이에 한 해를 차감해서 523-(62-1)이 된다.
  9. 《삼국사기》를 그대로 읽으면 동성왕이 501년 12월 백가에게 시해되고, 그해 1월에 무령왕이 백가를 죽이는 상황이 나와버린다! 이건 뭐 타임 패러독스도 아니고...
  10. 한 왕이 죽으면 다음 왕은 다음 달부터 그의 치세로 치는 것. 예컨대 선왕이 11월에 죽으면 그해 12월부터 원년이고, 선왕이 12월에 죽으면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다. 대표적으로 장수왕은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문자명왕은 이듬해 1월부터 원년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