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용관(居庸關)
1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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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용관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창평구에 위치하며, 화베이(華北)평원에서 몽골(蒙古)고원으로 향한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장성과 일체가 돼서 설치된 관문이자 요새이다. 천하제일웅관이라고도 불리며 난공불락의 아홉 요새로 꼽혔다.
중국어의 뜻으로 거용관의 용(庸)이란 뜻은 평범하다 라는 의미로, 평범한사람이 거(居)하더라도 능히 관(關)의 역할을 할 수 있을만큼 완벽한 요새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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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용관은 난커우(南口),관성(關城),상관(上關)의 3개 관으로 되어 있다. 중심이 되고 있는 관성은 둘레가 4km이며, 1369년에 서달(徐達)이 개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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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안에 운대(雲臺)가 있다. 그 밑을 네이멍구(內蒙古)로 향한 도로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과가탑(過街塔)이라고도 한다.
1343년 승려 덕성(德成)이 교통의 안전을 기원하여 건립한 것으로 2011년 현재 가로 위에 서 있는 백색 석회암조의 권문(券門, 아치문)은 원대 말기의 과가탑(過街塔) 탑기(塔基)부분이다. 처음에는 대좌 위에 3개의 라마탑이 있었으나 지진으로 훼손되었고, 그뒤 사찰을 세웠으나 청(淸)나라 때인 1702년(강희 41)에 이것마저 훼손되고 대좌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탑기는 사각 설계로 하부가 동서방향으로 29m 남짓, 남북방향으로 16.5m,상부가 26.5m×13.5m이다. 거의 물매가 없는 지붕 주위 고란(高欄) 하단까지의 높이는 9.7m,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는 아치의 높이는 7.2m이다.
벽면과 천정 안팎으로 무수한 조각이 있으며 문내측 벽면에는 중국, 몽골, 서하(西夏), 티베트, 위구르, 범어의 6체 문자로 도상(圖像) 내용의 경전을 새겼다. 여기서 서하 문자의 존재가 최초로 발견되기도 했다.
부조된 여러 상들은 라마교 경전에 의한 것으로 내벽 좌우 중앙의 다라니경은 법신(法身)을 뜻하며 네 모퉁이의 사천왕상과 천정의 오만다라와 시방불 및 천불이 있으며 당초에는 금 장식이 있었다. 한자명말미에 至正五年(1345) 西蜀 成都 寶積寺僧 德成書라 새겨져 있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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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인 연나라 시절 거용새라고 칭하는 요새를 건축한 것이 그 시작이다. 동시대 사료인 여씨춘추에는 천하구새(天下九塞), 거용이 그 중 하나(庸其一)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 때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타이항(太行)산맥의 고갯길인 타이항팔경(太行八徑)의 하나로 알려졌다.
항상 중시되던 지역이며, 특히 금나라와 명나라때 산해관과 함께 북경으로 가는 최종방어선을 맡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게다가 산해관보다 조금 더 중요시되었는데, 산해관 지역은 일단 북경에서의 거리가 300Km 정도며, 중간에 임시방어선이 될 하천이 흐르고 있지만, 거용관의 경우는 만일 이 곳이 함락되면 북경 중심가까지는 고작 60Km의 거리만 남으며, 북경의 성벽에 이르기까지 방어할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기스 칸이 금나라를 정벌할 때 거용관은 2번에 걸쳐서 함락시키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일단 1차로 함락시킨 후에 방치하자마자 다시 금나라 병력이 들어와서 요새를 수리하고 물자를 적재하는 등 복구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때도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1930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만주국을 만든 이후 지속적으로 하북성쪽으로 공략했으며, 산해관과 함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다가 1933년 1월 30일에 산해관이 함락되면서 북경가는 길이 열리자 중국군에 의해 포기되었다.
1961년, 거용관(居庸關)은 만리장성의 주요관문 중 하나인 가욕관(嘉峪關)과 산해관(山海關)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장성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다. 올라가기도 힘들고 내려오기도 힘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