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
907 ~ 1279 | 오대십국(五代十國) | 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 당항(黨項) | |
송(宋) ,대리국(大理國), | 북송(北宋) | 백고대하/서하(西夏) | ||
남송(南宋) | 안춘 구룬/대금(大金) | |||
1270 ~ 1368 |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 |||
1368 ~ 1644 | 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
만주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세 | 근현대 |
당(통일왕조) | 발해 | ||||
요나라 | 발해부흥운동 | 여진 | |||
금나라 | |||||
몽골 제국 | |||||
원나라 |
목차
중국의 역사 | ||||
송/금/서하 | ||||
요 | ← | 12 ~ 13세기 | → | 원 |
금 |
만주의 역사 | ||||
요 | → | 금 | → | 원 |
金 (Jin Dynasty)
高麗-고려, 宋-남송, 金-바로 이항목의 주인공 금나라, 西夏-서하, 西遼-서요, 大理-대리국, 交趾-리 왕조, 蒲甘-파간 왕국, 高棉-앙코르 왕국, 郭耳國-고르 왕조, 古格-구게 왕국, 注輦國-촐라 왕국, 泥婆羅-네팔, 吐蕃諸部-티베트, 康里-캉글리, 乃蠻-나이만, 克烈部-케레이트, 汪古部-옹구트, 塔塔兒部-달단. 畏兀兒-위구르, 朋加羅-벵골이다.
1 개요
요 제국을 멸망시키고 12세기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었던 다크호스 왕조(1115년~1234년).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개조는 완안아골타. 수도, 도읍지는 초기에 상경 회녕(령)부였으며 후에 금의 4대 왕인 해릉왕이 연경으로 옮겼다.[1] 황성은 완안(完顔). 이건 한국식 독음이고 여진어로는 정확히 뭐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퉁구스계로써 가장 가까운, 그리고 후예 언어로 추정하는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기야(Wanggiya)[2] 또는 왕기얀(Wanggiyan)[3].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이다. 원조비사 등 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다.
금나라의 황족은 금사, 송막기문, 고려사 등의 사료에서는 고려 혹은 신라 출신의 김함보라고 나오지만 아직 유전학적 연구가 없어 불확실한 단계다. 실제로 사료에 나타난 출신지와 유전학적 연구결과가 전혀 관련 없었던 집단들도 실제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추가로 특이한 점은 이러한 성향은 후대의 청나라도 그대로 이어받아 만주원류고등을 통해서 한국인과 자신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했다는 부분이다. 사실상 금나라가 위와 같은 기록을 남김으로서 금의 후예를 자청한 청나라가 그걸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해야하며 이러한 독특한 만주족의 민족의식은 한번 연구해봐야할 가치가 있는 부분으로 봐야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만주족과 한국인이 같은 민족이라는 뜻은 아니며 다만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여진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봐야할 것이다.
금은 중국식 국호이고, 자신들의 언어인 여진어로는 안춘 구룬(Anchun Gurun), 만주어로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이라고 불렀다. 아이신은 쇠, 구룬은 나라를 뜻하므로 '금나라'나 '아이신 구룬'이나 뜻은 같다.
이렇게 국호를 금이라고 붙인 까닭은 완안부가 웅거하던 주변 강에서 금이 많이 나서 그렇다는 설, 요나라의 국호는 빈철이라는 뜻인데 빈철을 금으로 극복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는 설[4], 자기들이 신라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서 신라의 왕성을 붙였다는 설, 북방민족이 금을 숭상해서 그렇다는 설, 본거지인 완안부 주변의 강 이름이 금인데 이 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금이라는 설 등이 있다.
원래 여진 자체가 발해 멸망 뒤로 거란족에게 그저 죽어지내던 민족이었는데, 요나라가 막장트리를 타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12세기 초 이미 통일을 완수했다. 이후 금태종 때 거란에게 맨날 터지던 송나라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송은 그간 자길 괴롭혔던 요에게 한방 먹일 기회라 생각해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음 목표는 뻔히 송이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에 증오가 커서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1125년에 요를 멸망시킨다. 이후 북송의 송휘종이 잔머리를 굴려서 요의 잔당들과 배신을 때리자, 1년만에 송의 수도 개봉(현재의 카이펑)을 박살내고 화북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 때 송은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수도로 하는 남송으로 그 세력이 약화했고, 금에게 황제·상황·황후·황자·황녀가 다 끌려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5] 이때 끌려간 인간이 수호지의 등장인물인 황제 송휘종.
참고로 건국으로부터 화북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그야말로 다크호스 왕조.[6]
맹안모극(猛安謀克)제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었다.[7]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처발렸다는 기록[8]이 있다(...).-그 금나라를 혼자서 쳐 바른 척준경은...-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파일:Attachment/금나라/jindynastysoldier.jpg
금나라 철기병 복원도.
기본적으로 요와 비슷하게 분리적 관인 통치를 했다.[9] 초창기에는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를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중원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10] 한족을 적극 기용, 남송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송사전 금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금태종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정복지의 한족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그런거 없고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했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11][12] 여진 문자는 금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고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했다.[13]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같은 걸출한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금세종부터 금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번영기를 누렸다.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세종 때가 어마어마한 리즈시절이었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일단 금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간 뒤로는,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받아냈지만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은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작전을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실패로 끝났다.
남송을 치는데 있어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데 반하여,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의 수준이었다.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반란군에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은 곧 숙주(宿州)까지 점령했으나,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금나라는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금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냥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냥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군신관계를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시켰다.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 만큼 절박했다.[14]
물론 남송이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 만한 수준도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이 격퇴했지만, 수비는 가능했다. 금이나 남송이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 터무니 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고, 또한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극단적인 속도로 지배층에 올랐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나왔다.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여진족의 수렵 경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농경으로 바뀌면서,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
금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마땅히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면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게다가 금이 조국을 멸망시킨 거란인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15]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16]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로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세종은 여러 모순 속에서도 전체적으로는 뛰어난 통치를 했지만, 장종이 즉위하고 위소왕에까지 이르자 금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한탁주의 북벌은 저지했으나, 몽골족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지출한 국비는 국가경제를 압박했고, 남송과 화약을 맺었으나 지칠대로 지쳐 서하를 구원도 못했다. 뒤에 몽골의 칭기즈 칸이 이끄는 군대가 밀려들어오자 위소왕은 죽고, 금선종이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송이 이번엔 니가 한번 죽어 보라는 식으로 몽골과 손을 잡고 남쪽에서 올라오기 시작, 애종 때 못 버텨 120년 만에 망했다. 당대 최강국이던만큼 칭기즈 칸의 생전에 멸망하지는[17] 않지만... 당연히 그 다음엔 몽골에게 남송도 털린다. 일종의 이이제이로 금나라를 제압하다가 망한 사연이다. 금나라 다음은 자기들이라며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금나라에 증오가 커서 깔끔하게 무시.잠깐...뭔가 북송 때도 이런 듯한데?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사실 이건 남송을 탓하기도 뭐한 게, 애초에 송나라가 금나라를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와중에 금이 남송을 먼저 침략했었다. 금나라의 입장에서는 몽골에게 털리기 시작하자 격전 중에 한다는 생각이 '빨리 남송을 멸망시켜서 그걸 기반으로 몽골과 전쟁해야지'였으니(...). 이건 뭐 게다가 송나라로서는 '몽골의 다음 목표는 우리일 지도 모른다'라고 알았더라도, 금나라나 몽골이나 송나라 입장에선 그놈이 그놈인지라, 금의 요구대로 금과 연합해 몽골과 싸웠다면, 금나라의 다음 목표 역시 송나라일 수도 있었다. 재방송 당연히 아직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몽골보다는 북송 때 그런 전례가 있던 금이 더 믿음이 안 갈 수밖에.
이렇게 금은 몽골과 몽골의 괴뢰로 바뀐 서하, 남송의 삼면에서 공격받는 뭔가 희한한 상황이 나왔다(...). 여기에 장종 때 거란 문자를 폐지하는 등 요나라 유민들에게도 영 불친절했던 상황에서 거란의 친척 민족인 몽골이 금을 공격하자 거란인들이 줄줄이 배신해 몽골에 붙는다(...). 서하가 공격받아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돕지 않았으니[18] 이만큼 막장스런 외교도 없다. 서하의 위치적인 중요성은 생각지도 않은 듯. 다 망하자 남송에 우리가 멸망하면 다음은 너희라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송의 반응은 좆까. 끝내 거란, 몽골, 남송에게 공공의 적이라서 몽골도 금나라가 자극했으니 이만하면 당대에서 만악의 근원 처참하게 멸망한다.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인 셈(...).
원래 요나라는 송을 적당히 상대하여 연운 16주 같은 중국의 북방영토를 야금야금 점령하는 정도로 만족했고, 그 대신 힘을 아껴서 북방 민족들을 광범위하게 통제했다. 반면 금나라는 송을 공격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북송을 멸망시켰고, 그 뒤에도 점령한 영토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따라서 북방민족까지 직접 통제할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이간책을 썼다. 즉, 북방민족을 통일할 가능성이 보일 만큼 강한 자가 나타나면 공격해서 멸망시키는 방식으로 분열 상태를 유지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덕분에 북방 민족들은 종종 쳐들어와서 자기들의 지도자를 살해하는 금나라에 원한을 품었고, 이간책 자체도 아주 효과적이지는 않아서 끝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막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금나라의 대외정책은 북으로는 칭기스칸의 몽골 등장을 못 막은 채 원한만 키웠고, 서로는 서하와도 마찰을 일으킨 데다 몽골의 침략 당시 돕지 않아 괴뢰국이 되는 것을 방관하여 몽골을 더욱 강화시켰으며(이전까지 공성전에 서툴렀던 몽골은 서하와의 전쟁을 거쳐 공성전 기술을 익혔다.) 남으로는 상황을 안 살피고 남송을 그저 잡아먹을 대상으로만 보며 공격을 거듭한 끝에 금나라 멸망의 순간 남송이 몽골을 돕게 했다. 말 그대로 동아시아 전체를 나락으로 몰고간 동반자폭이나 마찬가지인 막장정책이었다.
웅장한 겉과는 달리 당초에 내부적인 문제가 크던 나라이기도 하다. 나라 자체를 급하게 세웠고 소수의 여진족과 앙숙인 거란족,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도 감정이 영 나쁜 민족 문제부터 해서 송이 공물을 끊자마자 경제가 마비될 만큼 산업 구조도 엉망인 등(...). 후손인 만주족의 청나라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금사등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받은 후의 금나라를 현세 지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선종과 애종때의 기록들이 처참한데 어디가 함락당했다, 패배했다, 도륙당했다, 장수들과 관리들이 전사하거나 자살했다는 기록으로 빼곡하다. 그 절정은 애종 말기에 포위당한 수도 개봉성에 관한 기록인데 수십만명이 성 안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금나라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현실로 도래한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건국한 해(1115)와 망하는 해(1234)의 숫자가 매우 비범하다. 일일 해처럼 오르다가 흐름따라 망해버린 나라
2 문화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은 남송에서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19]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 "백성들이 말하길 오랬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20] 연운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21]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22]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23] 의상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 머리를 밀고 뒷 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뜰인 모양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국한지 12년만에 대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차지했지만 12년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 초반기의 경우 주변 국가들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퍼마신다던가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는다던가(...)[24] 황족, 귀족들 의복이 일반 여진족들과 별 차이가 없다던가 공평하게 모두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이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20년도 안되서 갑자기 대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아노미 현상.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복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금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건 당연지사.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25]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문화에 흠뻑 빠졌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등 금대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3 고려와의 관계
3.1 초기
금사(金史)에서 '예전에 고려에 예속했다.'라 인정하나, 끝내 고려는 금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금이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아버지인 영가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등장하여 완안부의 세력이 심상치 않아지자 예종은 본격적으로 군사를 들어 정벌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윤관의 동북9성 개척(1107). 하지만 이 군사 정벌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윤관이 포로로 잡힌 적도 있고,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구해냈다. 이 시점에서 고려의 1차 목표는 자국 영토 확장 및 북방 안정이라서, 여진의 성장 및 건국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되려 금나라의 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정작 동북9성은 개척이 어려워 다음해 여진에게 반환(...).
어쨌든 완안아골타가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건국(1115)하자 금 - 고려 관계는 상당히 미묘했다. 고려로서는 금을 정벌할 군사력은 없는데 예전에 신하였던 금을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힘들었고, 금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리지만 눈 앞의 요나라와 송나라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금이 건국한 1115년, 금과 고려의 이해관계가 가장 충돌하는 지역은 사실 동북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였다. 요나라의 멸망이 확실하자 금과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이 보주 점령에 성공했지만,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쿨하게(...) 대답한 뒤 즉시 보주의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아놔 고려가 공격하러 올 거임! 얼른 대비를 해야 됨!"이라며 경고한다.(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원년 11월)삼국지? 2년 뒤 금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자(물론, 금나라가 형)고 요구해왔으나 고려는 무시했다.(1117년)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돈다. 일단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금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한다.[26]
3.2 칭신
금은 1125년, 마침내 고려가 신하라 칭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27] 당시 고려는 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이들은 금에 숙이기로 결정, 이듬해 1126년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소드마스터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28], 금의 강성함을 잘 알 수 있다.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하지만 고려 조정이 금과의 관계를 되돌리거나 할 수는 없었는데,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시원하게 멸망해서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북송/고려와의 관계를 참고.
어쨌든 금은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보주(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3.3 칭신 이후 ~ 금 멸망
대체로 좋게 좋게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늘 긴장감이 있었다.
특히 칭신한 지 40년이나 지난 1164년에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분쟁이 일어난다. 대충 말로 풀지만, 금과 고려 양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분쟁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적었다. 특히 고려 기록에는 병마부사 윤인첨이 '恥削土(국토가 줄어짐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려사절요 권십일 의종장효대왕 을유 19년)
무엇보다도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다.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더니[29], 이듬해 사신을 보내어 "의종이 돌아서정신이 혼미해서 동생(명종)이 대신 왕이 됐어요. 데헷"이라고 알린다. 당연히 금 조정에선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난리가 났다.애초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믿기 어려운 얘기다. 금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왕이 병에 걸려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 지 고민 끝에 고려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 명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1175년, 금은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탓이다. 조위총은 금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라 요구한다. 하지만 금은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다. "잘했지?" 하고(...). 이 사건을 단순히 '금이 ㅄ이라서'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금나라의 영역확대의지가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읽어낼 수도 있다. 그냥 단순히 옆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가 싫어서라고도 볼 수도 있다. 450여 년 뒤 이괄의 난이 정묘호란의 빌미였음을 생각하면... 애초에 금나라는 자국 내부마저도 못 통합하는 판국인데 점령지를 더 늘려봤자 혼란이 더 일어날 가능성에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큰 사건이 없이 조공하고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하는 평범한 일들만 일어났다.고려 사신이 국경지역에서 역인驛人에게 맞아 죽은 사건만 빼면 이 사건은 금 안에서도 고려에 불만이 있었거나, 금의 변경 지역 통제력이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못가 역사상 최악의 기마민족이 동북아에 들이닥쳤다.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이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다.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와 금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3.4 그 밖의 이야기
뒷날 누르하치가 후금(청나라의 전신)을 세운 것처럼, "금"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다. 참고로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 기오로(愛新覺羅)에서의 '아이신'은 금, 기오로는 '씨(氏)'를 뜻한다.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환빠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를 뜻하고, 愛新覺羅가 "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며, 여진·만주족은 신라의 후예라고 말한다.[30]
4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
대수 | 묘호 | 시호 | 휘(여진식/중국식) | 연호 | 재위기간 |
초대 | 태조 (太祖) |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 수국(收國, 1115~1116) 천보(天輔, 1117~1123) | 1115~1123 |
2대 | 태종 (太宗) |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 천회(天會, 1123~1134) | 1123~1135 |
3대 | 희종 (熙宗) [31] |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32] |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 천회(天會, 1135~1138) 천권(天眷, 1138~1141) 황통(皇統, 1141~1149) | 1135~1149 |
4대 | - | 해릉양왕(海陵煬王)[33] |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 천덕(天德, 1149~1153) 정원(貞元, 1153~1156) 정륭(正隆, 1156~1161) | 1149~1161 |
5대 | 세종 (世宗) |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 대정(大定, 1161~1189) | 1161~1189 |
6대 | 장종 (章宗) |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 명창(明昌, 1190~1196) 승안(承安, 1196~1200) 태화(泰和, 1200~1208) | 1189~1208 |
7대 | - | 위소왕 (衛紹王)[34] |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35] | 대안(大安, 1209~1212) 숭경(崇慶, 1212~1213) 지녕(至寧, 1213) | 1208~1213 |
8대 | 선종 (宣宗) |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 정우(貞祐, 1213~1217) 흥정(興定, 1217~1222) 원광(元光, 1222~1223) | 1213~1223 |
9대 | 애종 (哀宗) [36] | 순정황제(順靖皇帝) |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 정대(正大, 1224~1232) 개흥(開興, 1232) 천흥(天興, 1232~1234) | 1223~1234 |
10대 | 소종 (昭宗) [37] | 말황제(末皇帝)[38] |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 성창(盛昌, 1234) | 1234 |
5 추존 황제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39] | 능호 | 비고 |
시조(始祖) |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 완안함보(完顔函普) | 941~960 | 희릉(熙陵) | 태조 추숭, 금의 시조 |
- | 연목현덕황제(淵穆玄德皇帝) | 완안오로(完顔烏魯) | 960~962 | 희릉(熙陵) | 태조 추숭, 함보의 장남 |
- | 화정경안황제(和靖慶安皇帝) | 완안발해(完顔跋海) | 962~983 | 건릉(建陵) | 태조 추숭, 오로의 장남 |
헌조(獻祖) | 순렬정소황제(純烈定昭皇帝) | 완안수가(完顔綏可) | 983~1005 | 휘릉(輝陵) | 태조 추숭, 발해의 장남 |
소조(昭祖) |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 완안석노(完顔石魯) | 1005~1021 | 안릉(安陵) | 태조 추숭, 수가의 장남 |
경조(景祖) | 영렬혜환황제(英烈惠桓皇帝) | 완안오고내(完顔烏古迺) | 1021~1074 | 정릉(定陵) | 태조 추숭, 석노의 장남 |
세조(世祖) | 신무성숙황제(神武聖肅皇帝) |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 | 1074~1092 | 영릉(永陵) | 태조 추숭, 오고내의 차남, 태조의 부친 |
숙종(肅宗) | 명예목헌황제(明睿穆憲皇帝) | 완안파자숙(完顔頗刺淑) | 1092~1094 | 태릉(泰陵) | 태조 추숭, 오고내의 4남 |
목종(穆宗) | 장순효평황제(章順孝平皇帝) | 완안영가(完顔盈歌) | 1094~1103 | 헌릉(獻陵) | 태조 추숭, 오고내의 5남 |
강종(康宗) | 헌민공간황제(獻敏恭簡皇帝) |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 | 1103~1113 | 교릉(喬陵) | 태조 추숭, 핵리발의 장남 |
휘종(徽宗) | 윤공극양효덕현공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佑聖景宣皇帝) | 완안종준(完顔宗峻) | - | - | 희종 추숭, 희종의 부친 |
덕종(德宗) | 헌고홍도문소무열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 완안종간(完顔宗幹) | - | - | 해릉양왕 추숭, 해릉양왕의 부친 |
예종(睿宗) | 입덕현인계성광운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文武簡肅皇帝) | 완안종요(完顔宗堯) | - | 경릉(景陵) | 세종 추숭, 세종의 부친 |
현종(顯宗) |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 완안윤공(完顔允恭) | - | 유릉(裕陵) | 장종 추숭, 장종의 부친 |
6 기타
6.1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시나리오1, 시나리오3에 등장. 망하기 직전 금 장종~애종 시기로, 영토 자체는 만주와 화북을 장악해 잘 표현한다. 역사적으로는 쇠퇴기이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먼치킨이 있는 데다[40] 당시 선진적이고 생산력도 좋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다는 저변도 있고 진천뢰가 있어 이게임의 공성종결자인 화포병를 징병할 수가 있어서 플레이하기 쉬운 세력.
- 문명 5 시나리오 몽골의 비상에서 적국으로 등장한다. 제일 가까운 데에 있어서 1번 타자로 썰리는 역할(...). 비주얼은 람캄행 모습으로 이름이 장종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중국식 발음이 Jin이라서 가끔 진나라로 오역도 한다.
- ↑ 『동아시아의 역사II 북방민족-서민문화』,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5쪽
- ↑ '왕야'에 가깝다.
- ↑ '왕얀'에 가깝다.
- ↑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금(金)만이 변치 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 금사 태조본기 / 하지만 요나라의 국호는 딱히 빈철을 의식하고 붙인 게 아니라 그냥 거란족이 살던 강인 요하에서 따왔다. 강 이름이 요(遼)이다.
- ↑ 정강의 변에 대한 인과응보였는지 금 말기 애종때 금의 수도이던 개봉을 몽골이 함락하자 금나라의 태후, 황후, 황녀들은 송나라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던 것처럼 똑같이 몽골로 다 끌려갔고(...) 남자 황족들은 모두 살해를 겪었다. 정강의 변 때보다 더 비참했다고 사서에 나온다.
- ↑ 참고로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 돌려달라고 고려에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이다. 이때로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당시 동북아시아의 두 거대제국을 무너뜨렸다. 고려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듯.
- ↑ 만주에서 나는 철 덕분에 철의 공급이 원활했다고. 이것은 고구려와 청나라도 마찬가지.
- ↑ 송사 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 ↑ 건국 초창기에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
- ↑ 중원을 침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지나가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고 뜯어 말려서 겨우 무사했다. 중원에 정착하고 한족 왕조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민족 출신의 정복왕조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왕조의 군주조차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게 되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대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 북송황실의 면류관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해릉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벙거지를 쓰고 가죽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인 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 ↑ 금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도 하였지만 흐지부지했다. 당시 금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은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 ↑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둥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 ↑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
- ↑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 ↑ 결혼
- ↑ 몽골의 원수가 금나라였기에 일단 칭기즈 칸이 잡아둔 목표는 금(주르첸)의 멸망이었다.
- ↑ 몽골이 서하를 공격한 목적부터가 마냥 심심해서 아니라 금나라 정벌 준비였다(...).
- ↑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차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
- ↑ 출처 :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
- ↑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
- ↑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
- ↑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
- ↑ 금태종 항목 참조.
- ↑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의 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 ↑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천회2년
- ↑ 이전까진 서로 호칭을 안 정하고 어물쩍 넘기며 지내왔다.
- ↑ 양판소라면 오히려 썰고 들어갔겠지만, 삼국지연의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전쟁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 ↑ 하필이면 의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낸 사신이었다.
- ↑ 환빠인지 몰라도 조선 초기 김종서 휘하에 있던 장수 이징옥이 이런 명분을 내세워 만주로 가서 대금황제라고 칭하며 금나라를 재건국하겠다는 기획을 가졌다. 비록 도중에 수하이던 이행검과 정종(영양위 정종 아님)에게 죽어서 실패했지만. 고우영은 한오백년이라는 작품에서 그 때 이징옥이 금을 재건국하고 조선을 먹고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면 어땠을까? 글로 상상하다가 그만 꿈깨!라는 글로 이 상상을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이원호가... 이징옥을 세계 깡패로 만들었다!
- ↑ 또는 민종(閔宗)
- ↑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
- ↑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 ↑ 또는 위왕(衛王)이나 무평황제(武平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
- ↑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
- ↑ 또는 의종(義宗)
- ↑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
- ↑ 이 황제의 재위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위한 황제. 항목 참조.
- ↑ 여진족 추장
- ↑ 시나리오1 한정으로 야율초재가 연경의 인재로 나온다.